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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중국은 왜 40년 전 떠난 `비틀스` 존 레넌을 두려워할까

by매일경제

존 레넌 (가수, 1940~1980)

폴 오스터와 존 레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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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 작가는 많다. 그중 폴 오스터만큼 집요하게 뉴욕이라는 공간을 다루면서, 또 그만큼 성공한 작가는 많지 않다. 폴 오스터는 '우연'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믿는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뉴욕 안에서 거미줄 같은 우연에 얽히고 얽힌다. 뉴욕 자체가 우연이라는 동력으로 움직이는 톱니바퀴처럼 느껴질 정도다.


1970년대 중반 폴 오스터는 아직 무명작가였다. 그는 밥벌이를 위해 예술 서적을 다루는 서점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우연'히 슈퍼스타를 만났다. 그는 폴 오스터에게 만 레이 사진집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폴 오스터가 창고에서 사진집을 찾는 동안, 손님은 서점 벽에 걸려 있는 그림 앞으로 갔다. 로버트 머더웰 작품이었다. 노란색 바탕에 검은 선이 그어져 있는 추상화였다. 그는 폴 오스터에게 "선 하나 긋는 데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던 모양이군요"라고 말했다. 당시 로버트 더더웰은 뉴욕 스타 화가였다.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와 함께 추상표현주의를 개척한 예술가였다. 폴 오스터는 모두가 찬양하는 화가의 작품을 두고도 비아냥댈 수 있는 이 손님에게서 상쾌함을 느꼈다. 그날 폴 오스터가 맞이한 사람은 존 레넌이다.

마오쩌둥을 비판한 비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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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 앨범 ‘Abbey Road’ 커버.

1966년 11월 9일, 레넌은 런던에 있는 전위 예술 갤러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레넌은 높은 천장에 설치된 캔버스를 발견했다. 캔버스 아래엔 사다리가 있었다. 관객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돋보기로 캔버스에 적힌 작은 글씨를 확인하도록 한 설치예술이었다. 레넌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캔버스에 돋보기를 갖다댔다. 거기엔 'YES'라고 적혀 있었다. 레넌은 신의 계시라도 받은 듯 전율했다.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은 일본인 예술가 오노 요코였다. 만약 레넌이 그날 갤러리를 그냥 지나쳤으면 어땠을까. 만약 사다리에 오르지 않고, 갤러리를 빠져나왔으면 어땠을까. 어쨌든 레넌은 갤러리에 들어갔고, 그곳의 작품에 매료됐고, 이 우연은 비틀스라는 밴드의 역사까지 바꿨다. 레넌은 오노 요코에게 푹 빠졌다. 둘은 연인이 된다.


비틀스는 오늘날 명성에 비해 활동 기간은 짧다. 1962년에 첫 앨범을 내고 1970년에 해체했다. 8년간 비틀스가 음악사에 남긴 업적은 압도적이다. 영국 리버풀 노동자 집안 출신으로 뭉친 비틀스는 금세 유럽을 점령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다음 해인 1964년 미국에 진출했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비틀스는 아이콘이 됐다. 1950년대에 엘비스 프레슬리가 미국인들의 몸을 열어줬다면, 1960년대 비틀스는 젊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줬다.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던 비틀스는 히피들의 정신적 교주가 됐다.


비틀스의 양대 주축이었던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는 노선이 달랐다. 'Yesterday'를 작곡한 매카트니는 서정적인 선율로 대중의 보편적인 취향을 충족시키려 했다. 반면 레넌은 예술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했다. 그가 작곡한 'Revolution 9'에는 이런 가사가 흐른다. "네가 마오쩌둥 주석의 사진을 들고 다닌다고 해서, 그 누구와 어떻게든 혁명을 이룰 수 있는 건 아니야." 노래가 발표된 해는 1968년이다. 세계가 혁명의 기운으로 들끓었다. 중국에선 문화대혁명이, 프랑스에선 68혁명이, 일본에선 전공투 투쟁이 일어났다. 레넌은 혁명 세력 편이었다. 다만, 혁명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비극을 묵인하지 않았다. 위 노래를 통해 홍위병의 폭력을 부추기는 마오쩌둥을 비판하고, 그런 문화대혁명을 비판 없이 수용한 서양의 안일함을 꼬집었다. 레넌과 매카트니의 이상은 종종 부딪혔다. 둘을 조율한 사람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었다.


엡스타인은 비틀스 제5의 멤버로 불린 인물이다. 그는 비틀스를 발굴하고, 스타로 키우고, 레넌과 매카트니 갈등의 중재자였다. 비틀스의 매니저이자 친구였던 그가 1967년 돌연사로 세상을 떠났다. 비틀스는 우왕좌왕했다. 바로 그때 오노 요코가 불쑥 등장했다. 1969년 레넌과 요코는 3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요코는 비틀스 활동에도 관여하려 한다. 멤버들의 불화는 격해졌다. 결국 1970년 비틀스라는 역사에 마침표가 찍혔다. 비틀스 팬들에게 요코는 그때도, 지금도 마녀로 통한다. 요코가 레넌을 꾀어내 비틀스를 떠나도록 부추겼다며 원망한다. 해체 후 비틀스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걷는다. 그중 레넌의 발걸음은 가장 대담했다.

프라하에는 '레넌 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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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프라하에 있는 ‘레넌 장벽’ /사진 출처=위키미디어커먼즈

체코 수도 프라하에는 유명한 장벽이 있다. 평범한 벽이었던 이곳이 특별해진 건 1980년부터다. 그해에 존 레넌이 죽었다. 누군가가 프라하의 한 광장에 있던 벽에 레넌의 얼굴과 그의 노래 가사를 그리며 스타를 추모했다. 그 당시 체코는 소련의 위성국가 중 하나였다. 엄혹한 공산주의 체제에서 자유와 평화는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금기였다. 체코 시민들은 조용히 반항했다. 존 레넌 얼굴이 그려진 벽에 남몰래 평화 메시지를 덧칠했다. 어느 순간 이 벽은 '레넌 벽'(Lennon Wall)으로 불렸다. 결국 1989년 체코 국민들은 비폭력 혁명으로 공산당 정권을 무너뜨리며 자유를 얻었다. 그 과정에서 '레넌 벽' 일대는 민주화 운동 거점 기능을 했다. 공산당 정부는 '레넌 벽'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시민들은 끝까지 저항해 지켜냈다. 이제 이 벽은 프라하를 찾는 여행객이 꼭 들르는 명소가 됐다.


자유를 갈망했던 체코가 상징적인 무기로 레넌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로버트 머더웰 그림을 두고도 빈정댔던 레넌은 모든 권위에 의문을 제기했던 예술가였다. 비틀스에서 나온 후엔 반전운동에 앞장섰고, 당시 불붙기 시작했던 여성운동에도 관여했다. 체제, 사유재산, 국가, 종교 등 세상이 당연하다고 여긴 규칙에 물음표를 붙였다. 레넌은 자유와 해방의 아이콘이 됐다. 레넌을 대중음악 스타라는 영역에서 빼내 드넓은 세계로 인도한 사람은 요코다. 레넌은 요코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흔히 세상은 요코를 존 레넌의 뮤즈라고 말한다. 엄밀히 따지면 틀린 평가다. 레넌에게 요코는 뮤즈보다는 종교였다.

왜 오노 요코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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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넌과 요코가 신혼여행 중 암스테르담 호텔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며 벌인 침대 시위. /사진 출처=위키미디어커먼즈

비틀스 멤버 중에서도 레넌의 유년은 유독 어두웠다. 선원이었던 아버지는 레넌이 태어나자마자 집을 나갔다. 엄마도 레넌이 10대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레넌은 소위 문제아였다. 어느 날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레넌은 자신도 그런 음악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꾼다. 비슷한 처지의 동네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했다. 비틀스가 탄생했다. 그 뒤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레넌은 전설이 됐다. 요코는 레넌과 정반대 배경 속에서 성장했다. 일본 재벌 가문에서 태어났고, 왕실과도 혈연으로 이어져 있었다.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2차 대전이 끝난 후엔 미국으로 건너와 예술을 배웠다.


요코를 만나기 전에도 레넌은 급진적이었고, 혁명을 노래했으며, 대담한 예술가였다. 다만, 불같은 성질을 제어하지 못해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는 경솔한 인간이기도 했다. 유년기 트라우마 때문에 종종 고독에서 허우적댔고, 마약과 술에 절어 망언도 일삼았다. 요코는 어떻게 시한폭탄 같았던 록스타를 제어했을까. 요코는 레넌과 연애하기 전부터 뉴욕이 주목하는 예술가였다. 백남준, 앤디 워홀과 교류하며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에 동참했다. 급진적인 사상을 가감 없이 드러냈고, 당연히 페미니스트였다. 자신의 철학을 벼르고 별러 예술에 접목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레넌은 요코의 작업을 보면서 자신이 음악으로 이루려 했던 이상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여겼다.


레넌은 요코와 함께하며 그만이 할 수 있는 음악을 완성해 간다. 1971년 'Imagine'을 발표했다. 이 노래에서 레넌은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고, 국가도 없고, 사회도 없다고 상상해보세요"라고 제안한다. 뭔가를 깨달은 사람 특유의 달관이 느껴진다. 하지만 레넌은 "사랑을 하세요" "평화는 좋은 겁니다"와 같이 도덕책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은 몽상가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필요한 구체적인 곳을 찾아냈고, 그곳을 위한 치열한 가사를 썼다. 'The Luck of the Irish'에서 영국의 잔혹한 북아일랜드 탄압을 고발했다. '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에서는 흑인은 몇몇 나라에서만 차별받지만, 여성은 전 세계에서 차별당한다고 말한다. 'Attica State'에서는 뉴욕 교도소의 죄수들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저항하자 그들을 사살한 공권력을 고발한다. 이 세 곡이 실린 'Some Time in New York City'(1972)는 레넌의 앨범 중 가장 급진적인 작품이다. 당연히 제작과정에 요코가 깊게 관여했다.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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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가 해체하고 5년간, 그러니까 1975년까지 레넌은 말 그대로 날아다녔다. 전 세계 주요 도시를 돌아다니며 베트남전쟁 반대를 외쳤다. 젊은이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레넌은 당시 닉슨 미국 대통령에게 눈엣가시였다. FBI는 레넌과 요코를 일거수일투족 감시했다. 미국에서 추방하기 위해 흠을 잡으려 했다. 레넌은 도청, 협박, 비자 연장 거부 등 온갖 방해에 시달렸다. 결국 나가떨어진 건 닉슨이었다.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1974년 대통령직을 사퇴했다. 1975년 레넌은 길고 험난했던 여정을 쉬기로 했다. 요코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 해다. 레넌은 은퇴 선언을 하고 육아에 전념했다. 혁명가는 전업주부가 됐다. 공백은 5년간 이어졌다. 레넌은 1980년 'Double Fantasy' 앨범을 내며 컴백했다. 이 앨범은 유작이 됐다. 1980년 12월 8일, 레넌은 스튜디오 녹음을 위해 집을 나섰다. 집 앞엔 팬들이 모여 있었다. 레넌은 그들에게 사인을 해줬다. 볼 일을 마치고 저녁에 레넌과 요코는 귀가했다. 집 앞엔 낮에 레넌이 사인을 해줬던 청년 중 한 명이 아직 있었다. 그는 레넌을 향해 총을 쐈다. 범인은 경찰이 오기 전까지 사건 현장 인근에서 태연하게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 그가 레넌에게 방아쇠를 당긴 이유는 확실치 않다. 범인이 정신이 온전치 않은 청년이었다는 점 말고는 온통 미스터리다.


폴 오스터 주장처럼 우리 삶을 결정하는 건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가 아니라 우연의 힘일지도 모른다. 우연은 피할 수 없다. 다만, 누군가는 우연에 짓눌리고 누군가는 우연을 필연으로 바꾼다. 레넌은 후자였다. 회색빛 공업 도시에서 하층민으로 태어나 우연히 엘비스 프레슬리 음악을 듣고 가수가 됐다. 비틀스로 전설이 된 후에도 요코라는 변수를 맞닥뜨려 삶의 방향을 틀었다. 그 후 5년간 누구보다 뜨겁게 노래했고, 나머지 5년은 가족에게 충실했다. 그리고 폴 오스터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센트럴파크 인근에서 예고 없이 떠났다.


스타는 사라졌고, 누군가는 무심코 체코의 한 장벽에 레넌을 그리며 추모했다. 이 작은 우연은 그 나라의 역사까지 바꿨다. 오늘날 '레넌 벽'은 평화를 갈망하는 곳 어디에든 등장한다. 작년에는 자유를 꿈꾸는 홍콩에 세워졌다. 그런 홍콩을 응원하는 한국 대학 곳곳에서도 '레넌 벽'이 등장했다. 홍콩의 자유를 반대하는 중국인들은 '레넌 벽'을 훼손하려 했고, 많은 사람은 이에 맞섰다. 'Imagine'에서 레넌은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은 나를 몽상가라고 부를지도 모르지만,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선 '레넌 벽'이 세워지고 있다. 그곳엔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모인다. 그들은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확인한다.


조성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