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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잡초와 같았던 신윤복,
조선르네상스를 열다

by매일경제

매일경제

평양기생 장연홍. 일제강점기 수려한 외모로 인기를 끌었으며 비누광고 모델을 하기도 했다. 을사오적 중 한명인 이지용의 구애를 뿌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신윤복 풍속화의 주인공은 기생들이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떠돌면서 살았으며(東家食西家宿), 마치 이방인 같았고(似彷佛方外人), 항간의 사람들과 가까웠다(交結閭巷人)."

성호 이익의 손자인 이구환(1731~1784)이 엮은 '청구화사(靑丘畵史)'는 20대의 혜원 신윤복(申潤福·1758~?)을 언급하면서 이같이 소개한다. 청구화사는 표암 강세황의 고문서집인 '표암장서'에 수록돼 있다.


신윤복은 조선 후기 대표적 풍속화가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혜원풍속도화첩(국보 제135호)과 미인도(보물 제1973호) 등 그의 작품은 일반인에게도 익숙하다. 그의 명성에 비해 의아하게도 남아 있는 기록은 매우 소략하다. 위창 오세창(1864~1953)이 1917년 편찬한 '근역서화징'은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서화가 1117명의 인명을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신윤복을 소개하면서는 "자 입보(笠父), 호 혜원(蕙園), 고령인. 첨사 신한평의 아들, 화원. 벼슬은 첨사다. 풍속화를 잘 그렸다"고 짧게 서술한다.


오세창은 집 안에 아버지 오경석이 수집한 방대한 서화 수장고를 보유했고 우리나라 서화계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의 서화 정보와 감식안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 간략하게 언급한 것은 19세기 신윤복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음을 의미한다.


조선 말 중인 계보를 정리한 '성원록(姓源錄)'의 고령 신씨 조에 보면 그의 가계가 나온다. 신윤복은 신숙주의 동생으로 대사간을 지낸 신말주의 11대손이다. 신말주의 고손자 즉, 신윤복의 7대조가 관상감 잡직관에 진출한다. 중인 가문이 된 것이다. 신윤복의 8대조가 서자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버지 신한평은 도화서 화사였으며 실력을 인정받아 3번이나 참여했다. 신한평의 작품은 이광사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자신의 가족을 담은 자모육아(간송미술관 소장)가 전해진다. 첨사는 종3품 무관직인 첨절제사(각 도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 바로 밑의 직책)를 말한다. 왕실 화가로서 부자가 대를 이어 높은 벼슬을 지냈는데도 신윤복은 이름을 거의 남기지 못했다.


서유구가 쓴 '임원경제지'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신윤복이) 협사(狹斜·유흥가) 즉 색주가의 이속지사(俚俗之事·풍속화)를 즐겨 그렸다"는 것이다. 1939년 평론가 문일평(1888~1939)의 '호암전집'은 당시 구전을 인용해 "신윤복이 너무 비속한 것을 그리다가 도화서에서 쫓겨났다"고 전한다. 젊은 시절 격이 떨어지고 속된 그림을 그리다가 도화서에서 축출된 것이다. 고상한 부류에게 배척되다 보니 그 이후 삶도 잊혔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신윤복은 사실 그저 저잣거리를 전전하던 무명 작가에 불과했다. 신윤복의 호 혜원은 '혜초정원(蕙草庭園)'을 줄인 말이다. 혜초는 콩과 식물로, 여름에 작은 꽃이 피는 평범한 풀이다. 스스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처량한 신세를 빗댄 것이다.


도화서 선배로 비슷한 시기 도화서에서 함께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김홍도(1745~1806)는 그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10대 후반에 도화서에 들어간 김홍도는 영조와 정조의 어진을 그렸고 중인 신분으로 종6품 연풍현감 벼슬을 받기도 했다. 그는 파격적인 신윤복과 달리 보수주의적 성품에 보수주의적 화풍을 견지했다. 강세황이 쓴 '단원기'에서는 "얼굴이 청수하고 정신이 깨끗하여 보는 사람들은 모두 고상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다 알 수 있다.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크고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신선과 같다고 하였다"고 기술한다.


단원기는 김홍도가 음악을 즐겨 꽃 피고 달 밝은 저녁이면 거문고 한두 곡을 연주하며 즉석에서 한시를 남길 정도로 문학적 소양도 갖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산수화, 신선도 등 문인화 작품을 다수 남겼으며 풍경화 역시 농업이 유교 국가의 근간이었던 만큼 농촌의 일상이 주된 내용이다.


이에 반해 신윤복은 양반층 풍류나 남녀 간 연애, 향락적인 생활을 주로 그렸다. 특히 남성 위주 사회에서 이전 화가들이 무관심했던 여인들 풍속을 화폭에 담았다. 조선시대 가장 천한 신분에 속했던 기녀를 주인공으로 삼아 기방이나 여속에 대한 관심을 고도의 회화성으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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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 중 월야밀회. 두 남녀가 달밤에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고 한 여자가 그들을 엿보고 있다. 신윤복은 금기시되던 남녀의 애정관계를 사실적이며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의 이 같은 파격은 시대 변화의 산물이다. 풍속화는 영조(재위 1746~1775)부터 순조(재위 1800~1834) 초반까지 크게 유행한다. 이 시기 한양에는 근대적 소비사회가 도래한다.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성장하면서 유흥·소비 문화가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부와 권력이 집중된 경화사족과 신흥계층으로 부상한 시전상인, 역관, 의관, 여항인(중인 문인) 등 중인들이 이러한 변화를 이끌었다. 특히 역관은 중국 무역을 주관하고, 의관은 지방의 약재가 거래되는 약방을 장악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부유한 양반과 중인들은 기방을 중심으로 한 향락 문화를 발전시킨다. 그들은 동시에 미술품으로도 눈을 돌린다. 그들은 종전의 관념적 화풍 대신 자유분방하고 개성 넘치는 풍속화에 빠져들었다. 산수화 분야에서 진경산수화가 크게 유행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윤복은 더욱 앞서 나가 동시대 풍속화에서 배경에 불과했던 기녀와 여성을 전면에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신윤복이 유명세를 얻은 것은 100년이 지난 일제강점기에 와서다. 한국에서 미술을 연구했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7~1935)가 그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신윤복의 그림을 두고 "시정촌락 풍속을 정묘하고 농염하게 그렸다"고 평가했다. 이어 1930년대 간행된 '조선명화전람회목록'은 "하층민의 생활풍속을 그린 '조선풍속화계의 백미'"로 해석했고 1938년 월북 예술가 김용준(1904~1967)은 잡지 '문장'에서 "가장 위대하고 혁명적 정신이 풍부한 작가"라고 극찬했다.


현전하는 신윤복의 풍속화는 50점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간송미술관의 국보 제135호 혜원진신첩 30점, 보물 제1973호 미인도 1점, 국립중앙박물관의 여속도첩 6점, 신위화첩 중 일부, 행려풍속도병풍 4점, 사시장춘 1점 등이다. 기타 산수화 7점, 영모화 3점, 진위 논란이 있는 춘화 일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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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전신첩 중 월야정인. 통행이 금지된 시각에 남녀가 은밀한 만남을 갖고 있다. 엄격한 도덕적 제약 하에서 용솟음치는 인간의 욕망을 잘 표현했다. 간송미술관 소장.

혜원전신첩은 '단오풍정' '월하정인' '주유청강' '청금상련' '상춘야흥' 등 신윤복의 명작이 총집결된 화첩이다. 일본으로 유출돼 고미술 무역상인 야마나카 상회 오사카지점이 소유하고 있던 것을 간송 전형필이 1934년 2만5000원에 구입했다. 혜원전신첩이라는 명칭은 오세창이 새로 틀을 짜고 발문을 쓰면서 붙였다. 전신(傳神)은 단순한 외형이 아니라 사물이나 사람의 본질과 정신을 표현하거나, 실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뜻이다. '단오풍정' 등 개별 그림의 명칭도 후대에 만들어졌다.


각 면 가로 28㎝, 세로 35㎝다. 주로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 간 애정과 낭만, 양반사회의 풍류를 다루고 있다. 가늘고 섬세한 부드러운 필선과 아름다운 색채가 세련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등장인물들을 갸름한 얼굴에 눈꼬리가 올라가게 표현해 선정적인 느낌이 들며 인물들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주위 배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점이 돋보인다. 대부분 작품에 짤막한 글과 함께 낙관이 있지만 연대를 밝히지 않아 화풍의 변천 과정은 알 수 없다. 혜원전신첩은 미술작품으로서뿐만 아니라 18세기 말 당시 사회상의 일면을 보여줘 생활사와 복식사 연구에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70년 국보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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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장춘. 매우 애로틱한 풍속화이다. 남녀가 방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시중드는 어린 소녀가 문입구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윤복의 '미인도' 역시 우리 회화사에서 독보적 걸작이다. 2018년 보물로 지정됐다. 가체를 사용한 탐스러운 얹은머리에 젖가슴이 드러날 만큼 길이가 짧고 소매통이 팔뚝에 붙을 만큼 좁은 저고리를 입었으며 속에 무지개 치마를 받쳐 입어 큰 치마가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차림새는 여체의 관능미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쪽빛 큰 치마 밑으로 살짝 드러난 하얀 버선발과 왼쪽 겨드랑이 근처에서 흘러내린 두 가닥 주홍색 허리끈과 풀어헤친 진자주 옷고름은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림 왼편에 제화시(題畵詩)가 쓰여 있다. "가슴속에 춘정이 가득하니, 붓 끝으로 겉모습과 함께 속마음까지 그려냈네(盤薄胸中萬化春, 筆端能言物傳神)." 초상화 모델은 신윤복이 열렬히 사랑했던 여인이었던 것이다.


이 그림은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미인도이기도 하다. 이후 혜원풍의 미인도가 크게 유행한다. 혜원풍 미인도는 자세나 구도, 무엇보다 독상들로 전신상이며 일반 사대부 초상화와는 달리 배경 묘사가 공통적으로 생략돼 있다.


그러나 신윤복 이후 사실적인 풍속화는 명맥이 끊긴다. 문화계에서 퇴폐를 일소하기 위한 개혁운동이 전개되고 문인화풍이 확산하면서 풍속화는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비판 속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조선의 르네상스는 꽃을 채 피우기도 전에 찰나적으로 져버렸던 것이다.


배한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