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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신의 속죄는 가능한가" 원작 소설에 은폐된 영화 `어톤먼트` 비밀들

by매일경제

[문학과 영화 사이, 텍스크린-10] 소설 '속죄(Atonement)' vs. 영화 '어톤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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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문장을 함부로 다루는 편이라고 자책하진 않습니다만, 더 신경 써야 하는 글이라는 생각이 납덩이처럼 강하게 마음을 짓누르는 순간이 찾아오곤 합니다. 이언 매큐언 소설 '속죄'와 이를 원작 삼은 영화 '어톤먼트'는 죄 많은 영혼으로서는 첫 문장을 시작하기조차 망설여졌고, 그래서 약속했던 게재일이 늦었습니다.


매큐언의 이 소설은, 그 자체로 소설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내는 대작입니다. 부끄러운 자백입니다만 521쪽짜리 책을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읽으며 울컥하는 지점을 서너 번이나 만났습니다. 이 글은 가급적 최신 영화를 다루지 않으니 스포일러 금지 부담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편입니다만, 이번 10회 '속죄·어톤먼트' 편은 스포일러 경계를 아예 허물었으므로 영화 관람 전이라면 지금은 뒤로가기 버튼을 클릭하시고 다음에 읽으시길 권하며 조용히 글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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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부터 살피겠습니다.


때는 1935년, 천부적 문학 재능을 가진 탈리스 가문의 둘째 딸 13세 '브리오니'는 친언니 '세실리아'와 가사도우미 터너 아줌마의 외아들 '로비' 사이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어린 시절부터 소꿉친구였던 두 사람의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을 목격합니다. 잔뜩 화가 난 언니 세실리아가 로비 앞에서 속옷만 남긴 채 옷을 훌훌 벗더니 분수대로 뛰어들어 손에 뭔가를 들고 나옵니다. 로비는 그런 그녀를 쳐다봅니다. 창밖의 풍경은 어린 브리오니가 아직은 가닿지 못할, 어른의 세계였습니다.


바로 그날 밤, 저택 정원에서 강간 사건이 벌어집니다. 생존자는 브리오니·세실리아의 사촌 롤라였습니다. 브리오니는 상상력을 덧대 로비를 피의자로 지목합니다. 아래에서 설명되겠지만 복합적인 이유였습니다.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하고 의대 진학을 앞두고 있던 건실한 청년 로비는 수감됩니다. 그리고 곧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징집돼 전쟁터의 총알받이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사이 로비를 잃은 세실리아는 동생 브리오니의 위증을 묵인했던 가족들과 절교합니다. 악마와도 같은 묘사로 문학에 재능을 보여 로비와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대 입학 허가를 받았던 18세 브리오니는, 그러나 스스로 말없이 회심하여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종군(從軍) 간호사 직업을 선택하며 속죄의 순례를 선택합니다. 결국 세실리아와 로비와 재회한 브리오니는 사죄의 전언을 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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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놀랍게도 세 사람을 둘러싼 분노와 후회의 이야기는 '영국의 세계적인 대문호' 브리오니 탈리스의 자전적 실화 소설이었습니다. 굳이 분류하면 이렇습니다.


브리오니가 경험한 실존 인물과 실재 사건이 있었고(제1차 텍스트, 작중 어린 브리오니 기술), 그 사건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연극 대본이 숨겨져 있으며(제2차 텍스트, 작중 어린 브리오니 기술), 제1·2차 사건을 통합해 허구적으로 기록한 표면의 소설이 이어지다(제3차 텍스트, 노년의 브리오니 기술), 이 모든 삶의 허구성을 고백하는 현실(제4차 텍스트, 작가 이언 매큐언 기술)이라는 4중 겹을 형성합니다. 혼자 만들어본 표현입니다만 미장아빔(mise en abyme·이야기 속 이야기) 소설이란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죽음을 앞둔 브리오니 탈리스는 본인의 위증(僞證)이 두 인간의 삶을 전락시켰음을 후회하며 이 소설(제3차 텍스트)을 썼습니다. 실상은 달랐습니다. 로비는 덩케르크 철수작전 중 배에 타기 직전 패혈증으로 전사했고 세실리아는 방공호에 숨었다가 폭격 후 지하수가 들이쳐 그 자리에서 익사했습니다. 세실리아와 로비가 재회해 한동안 사랑을 나누며 지냈다는 소설 줄거리는 브리오니 탈리스가 그들의 사후 64년이 지난 1999년에 이르러 속죄하는 마음으로 다시 쓴 완전한 허구였습니다.


자, 영화와 소설은 어떻게 다를까요. 서두가 길었으나 이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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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영화의 첫 번째 차이점입니다. 영화를 보면 브리오니와 세실리아와 로비 사이에 진행된 사건의 원인인 감정이 단편적으로 반영되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로비를 짝사랑한 브리오니가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 간 불같은 사랑을 목격한 뒤 어떤 복수심에 사로잡혀 위험한 증언을 시도했다는 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높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소설에서는 위증의 이유가 좀 상이하게 그려집니다. 알파벳 'C'로 시작하는 외설적 단어가 적힌 로비의 편지를 훔쳐본 브리오니는, 로비에게서 언니 세실리아를 지켜주려 했습니다. 소설에서 브리오니는 자신이 사랑하는 로비를 언니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위증을 기획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와 정반대였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이 지켜줘야 한다고 판단했던 세실리아가 로비와 서재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면서 로비에게 흉악범 누명을 덮어씌운 것이었지요. 로비의 시점에서 적힌 브리오니 감정은 복잡합니다. 소설 텍스트의 중요한 지점이 스크린에 옮겨지면서 건조해졌습니다.



"봉인된 편지봉투를 뜯어 편지를 읽은 브리오니는 혐오감과 함께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그애는 언니를 보호하거나 언니에게 충고를 해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불타 언니를 찾아 나섰고, 닫힌 서재 문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어린애의 무지와 어리석은 상상과 정의감에 사로잡혀 로비에게 그만하라고 요구하기 위해서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소설 '속죄'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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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저편에서 등장인물 감정을 영화가 지극히 단순화했음을 고려한다면 로비에게 강간 누명을 씌우는 과정에서도 영화의 단순화 작업이 거칠게 진행됐음을 인지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영화 속 브리오니는 확신에 찬 마음으로 그를 강간범으로 지목합니다. 로비를 지목하며 "누가 그랬는지 알아요. 두 눈으로 그를 똑똑히 봤어요(Yes, I did. I saw him)"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브리오니에게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부재합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브리오니는 다소 망설이고 있고, 되려 증언을 강요하는 어른들에게 이용당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브리오니는 강간범 뒷모습을 보고 로비인지를 "알았다"고 표현하는데, 경찰은 브리오니에게 강간하고 도망치는 로비를 "보았다"고 대답하라고 은근히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영화와 소설의 이 같은 변화는 러닝타임의 현실적인 제약과 함께 브리오니의 죄의식을 한층 강조하려는 의도로 자행된 측면이 강하다고 판단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브리오니의 감정과 상황에 관한 감독의 생략은 아쉽습니다. 소설과 영화라는 두 장르 사이에서 인간의 설명 불가한 감정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장르는 역시 소설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만들기도 하고요. 원작의 대화는 아래와 같습니다.



"그러면 네가 그(범인)를 본 거구나."(수사 중인 경찰)

"그 사람(로비)이라는 걸 알아요."(브리오니)

"네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자. 지금 네 말은 네가 그(범인)를 보았다는 거지?"

"네, 내가 그(로비)를 봤어요."

"지금 네가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니?"

"네."(소설 '속죄' 259쪽)



"'보았다'는 자신의 말이 실제로 무엇을 본 것이라기보다는 '알았다'는 쪽에 가깝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싶었다. 설명을 들은 후에 수사관들이 일을 그대로 진행할 것인지는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브리오니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수사관들은 태도를 싹 바꾸어 냉정한 어투로 그녀가 한 최초의 증언을 상기시키곤 했다. 둘 중 하나이지 중간일 수는 없었다."(소설 '속죄' 244쪽)


브리오니가 쓴, 영화 첫 장면에 등장하는 연극 대본 '아라벨라의 시련'에 관한 부분은 두 번째 차이를 형성합니다. '아라벨라의 시련'은 어린 브리오니가 쓴 첫 번째 희곡이었습니다. 아라벨라라는 여성이 외국에서 온 남성과 사랑에 빠져 영국 남부 소도시 이스트본(Eastbourne)으로 떠나는 도피 행각을 벌였지만 결국 후회하고 귀가해 부모님이 정해준 남성과 결혼하면서 '행복'을 되찾는다는 다소 힘 빠지는 줄거리입니다. 브리오니는 영화 첫 장면에서 '아라벨라의 시련'을 가족과 친척 앞을 관객 삼아 상연하려 분투하지만 결국 무대에 올리지 못하지요. 소녀 브리오니는 이 희곡을 쓰면서 '이성에 근거하지 않은 눈먼 사랑은 불행하게 끝날 수밖에 없다'로 이 소설의 주제를 규정하고,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명백히 교훈적인 이야기"라고 자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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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풋내기 시절 브리오니의 희곡 '아라벨라의 시련'은 영화 초반부에만 나오고 이후 거론되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소설 '속죄'에서는 '아라벨라의 시련'이 노인이 된 브리오니 앞에서 결국 상연됩니다. 증조고모할머니인 브리오니 앞에서 증손녀와 증손자인 꼬마들이 '아라벨라의 시련'을 연기합니다. 무려 64년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브리오니 자신도 잊어버린 원고를 아이들이 어디서 찾았는지 궁금해하며 떨리는 심정으로 대사를 듣던 브리오니는 거대한 질량의 슬픔과 회한에 잠깁니다. 한때 자신이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있다고 믿으며 썼던 희곡은, 두 사람의 삶을 붕괴시킨 '그날의 위증'을 환기했기 때문입니다.


브리오니는 "이성에 근거하지 않은 눈먼 사랑은 불행하게 끝날 수밖에 없다"는 자신의 철없던 믿음을 희곡의 허상계에 담아냈지요. 그런데 브리오니는 그와 동시에 세실리아와 로비의 삶이라는 실제계에서도 이를 이미 오래전 증명해버렸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어린 시절 깨달아버린 바로 저 잔혹하고도 끔찍한 생의 진실이 결코 진실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다시 말해 자신의 오래전 판단을 스스로 배반하고자 평생에 걸쳐 세실리아와 로비에 관한 소설을 다시 썼던 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64년 만에 자신의 죄가 얽힌 연극이 눈앞에서 펼쳐지니 손으로 입을 막을 수밖에요.



"나는 맨 앞줄에 놓인 안락의자로 안내를 받았다. 곧 기대와 초조가 섞인 고요가 방을 채웠다. 마술 쇼를 하겠거니 예상했던 내 귀에 너무나도 놀랍고 충격적인 말이 들려왔다. '이것은 즉흥적인 성격을 가진 아라벨라라는 아가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외국에서 온 남자와 사랑에 빠져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였죠. 사랑하는 맏딸이 허락도 받지 않고 집을 나가 이스트본으로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님은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소설 '속죄' 514~515쪽)


이때 동생 브리오니가 쓴 '아라벨라의 시련' 이야기를 듣고 저 희곡의 대실패를 예감했던 1935년 세실리아를 떠올리지 않기란 불가능합니다. 영화에선 생략되었습니다만 소설에서 세실리아는 '아라벨라의 시련'을 브리오니와 사촌동생들이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속으로 무시합니다. 유치한 내용이 담긴 브리오니 희곡은 결국 '대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속내였지요. 그러나 브리오니가 실패했던 희곡 '아라벨라의 시련'과 달리, 브리오니가 현실에 설계한, 세실리아와 로비의 삶에 덧씌운 운명의 굴레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세실리아와 로비의 실제 삶을 설계하고 조작한 사람은 바로 그의 동생 브리오니였지요. 로비에게 덧씌운 그 시절 누명은 완벽히 성공했습니다. 소설에만 나오는 다음 세실리아의 사유 장면은 읽을수록 슬프고 또 기묘합니다.



"브리오니는 작가가 되겠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다른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날 아침 세실리아는 브리오니가 전날 도착해 아직 여독도 풀리지 않은 불쌍한 사촌들을 이끌고, 레온과 그의 친구가 도착하는 저녁에 무대에 올릴 연극 연습을 위해 유아실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다고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날이 너무 더웠을 뿐 아니라 어차피 도움을 주더라도 그 연극은 대실패로 끝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소설 '속죄'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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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차이점입니다. 영화 '어톤먼트'에서 노년의 브리오니는 세실리아와 로비를 치명적 이별을 다룬 작품을 '마지막 소설'로 언급하지만, 소설 '속죄'에서 브리오니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홀로 평생에 걸쳐 저 소설을 반복해 집필하고 있었습니다. 소녀 브리오니의 첫 번째 소설이기도 했지요.


소설 제목은 '분수대 옆의 두 사람'으로, 어린 브리오니는 종군 간호사로 일하던 1940년 잡지사 '호라이즌'에 이 소설을 투고했습니다. 석연찮은 이유로 다투던 세실리아와 로비의 분수대 앞 모습만을 자기 식으로 해석한 소설이었습니다. 줄거리가 없이, 오직 자신이 본 풍경만 묘사했지요. 풍경'만' 쓴 이유는 이러했습니다. 브리오니는 '분수대 사건' 이후 세실리아와 로비에 관한 비극적 현실은커녕 어떠한 이야기도 문장으로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악의적 기만에서 탈주하려 했습니다. 깊은 죄의식에서 도망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소설에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 한 편지가 등장합니다. 브리오니는 자신이 투고한 잡지인 '호라이즌' 편집자한테서 답신을 받았습니다. 답신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줄거리 없는 소설은 결코 소설일 수 없으며, 분수대 앞의 두 남녀의 불가해한 장면을 목격한 화자는 두 남녀의 인생에 차라리 사악하게라도 개입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답신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잡지사 편집자는 '악함마저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므로 어떻게든 개입해야 한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브리오니가 실제로는 어떤 일을 행했는지에 관한 사전 정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편집자의 주장은 진짜와 같은 정도를 뜻하는 예술 용어인 '핍진성(逼眞性)'이란 단어로 환원 가능할 텐데, 저 지독한 핍진성이 현실에서 구현될 때 인간은 절망하고야 맙니다. 그러니까, 브리오니가 은폐하고자 애썼던 본인의 위증 이유가 타자인 호라이즌 편집자에 의해 정당화되는, 엄청난 모순을 소설 '속죄'는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에워싼 모든 감정을 포착하는 이언 매큐언의 광기 어린 감각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편지(호라이즌 편집자의 답신)는 그녀(브리오니)의 아픈 곳을 찌르고 있었다. '소녀가 자기 앞에 펼쳐진 이 이상한 장면을 완전히 오해하거나 화를 낸다면, 그것이 젊은 남녀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 소녀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에게 끔찍한 불행을 가져다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 정말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그녀는 보잘것없는 글재주로 하찮은 소설 하나 써냄으로써 그 사실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중략) 그녀가 삶에서 정면으로 부딪치기 싫어했던 것은 소설에서도 빠져 있었다."(소설 '속죄' 438~4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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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영화에 나오지 않는 또 하나의 차이점을 언급하며 글을 맺습니다. 브리오니는 이 소설의 가장 마지막 장에서 소설가를 신(神)의 위치로 격상시킵니다. 이런 문장이 그렇습니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소설 '속죄' 521쪽)


유신론 관점에서 우리가 기억하기로, 신은 세계와 인간을 창조했고 죄(罪)란 신의 율법을 배반한 인간의 영역이었습니다. 죄는 인간에 속하는 일이었지 신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지요. 인간의 모든 윤리가 신이라는 거대 존재의 하부 영역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브리오니는 노년에 이르러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집니다. '소설 세계의 창조주인 작가는 과연 소설 속 인물에게 속죄할 필요성이 없는가.' 나아가 소설 속 인물에 관한 소설가의 속죄가 과연 가능하기는 한가라는 질문도 던집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어떤 섬광처럼 이 소설이 엄청난 확장성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이 정말 전율에 가까울 정도로 위대하게 도약하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신이 각자에게 부여한 운명에 따라 움직이고 살아가는 개체라면, 인간은 신의 속죄를 요구해야 하고 신은 우리에게 사죄해야 합니다. 이 소설과 이 영화를 본 우리가 브리오니 탈리스에게 응당 속죄를 요구하듯이 말이지요. 자신의 운명을 거역했다가 다시 돌아온 아라벨라적(的) 윤리관을 브리오니(신의 위치)는 강제하나 세실리아·로비(인간의 위치)는 신이 강제한 윤리에서 탈주하는 인간이기를 선택했다가 그 죄과로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주변을 돌아볼까요. 인간의 의지대로 사랑하고 살아가려는 비극의 훼방꾼은 인간이기보다는 바로 신 그 자체였고, 그 운명 속에서 눈물을 쏟는 인간의 비참만이 우리네 풍경이었습니다. 따라서 브리오니의 속죄를 독자와 관객이 요구하듯이 인간은 신에게 속죄를 요구할 가능성을 획득한다고 이언 매큐언은 묻고 있습니다. 앞서 이 소설을 '4중 겹'의 미장아빔 소설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소설은 현재 이 소설을 읽는 독자인 우리 층위까지 한 겹을 추가해 버림으로써 '5중 겹'의 미장아빔 소설로 진화합니다. 브리오니의 속죄가 정당화되기 어렵듯이 신의 속죄도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겠지만요.


왜일까요. 노년의 브리오니가 치매에 걸려 망각으로 항해를 시작하듯이 어쩌면 원작 소설에서 이언 매큐언이 상정하고자 했던 신도 우리네 인간의 슬픔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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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토리텔링이라는 점에서 소설과 영화는 닮았습니다. 기술적 한계를 초월해버린 영화는 소설에 담긴 어떠한 장면도 간명한 컷으로 구현해내는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문자화된 텍스트(text)로서 보이지 않는 상상력을 자극하며 독자와 만날지, 영상화된 스크린(screen)에서 언어로 설명 불가능한 표현력을 보여주며 관객과 대면할지의 차이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소설과 영화가 빼닮았더라도 그 간극에선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무수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텍스크린(teXcreen)'은 텍스트(text)와 스크린(screen) 사이에서 차이점을 발견해 예술 형식의 변화와 콘텐츠의 내용적 진화를 고민하려는 연재기획입니다. 굳이 'X'를 대문자로 표기한 건 텍스트와 스크린의 컬래버레이션(X) 시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문학이 죽었다고 여겨지는 오늘날, 영화로 만들어지는 소설은 문학의 대중화라는 불가피한 시대정신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습니다. 반드시 매회 소설을 완독하고 영화를 다시 본 뒤 두 장르 간 차이를 진단하고 비교합니다. 격주 금요일 오후 온라인에 연재됩니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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