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미모 얼굴에 가려진 김원준의 음악재능

[컬처]by 매일경제

장동건은 전성기 시절 '외모가 컴플렉스'라고 말하곤 했다. '조각 미남'의 대명사 장동건이 외모 컴플렉스라니. 당연히 '못생겨서'가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지나치게 잘생긴 외모가 자신의 커리어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떤 배역을 맡아도 연기보단 외모가 먼저 이슈가 되니 그 역시 답답했을 것이다. 배우는 연기로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연기를 뛰어넘는 외모 때문에 '저평가' 받는다고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2002년)이란 영화에 출연해 머리를 빡빡 깎고 얼굴엔 위장크림을 바른 채 열연을 펼친다. 일부러 김 감독 특유의 왜곡된 캐릭터를 골라 기존 자신의 틀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그럼에도 잘생긴 외모가 여전히 빛나 보인다는 점은 함정이다) 이보다 3년 전에 나온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선 일부러 중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조연 역할을 자처에 연기 커리어 쌓기에 나서기도 했다.(이 영화에서 박중훈은 장동건이 정말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2001년 개봉한 영화 '친구'에서 깡패 악역을 맡은 것 역시 부단한 연기변신의 노력이었던 셈이었다. 장동건은 특유의 선한 인상 때문에 미디어에서 주로 '귀공자' 역할만 도맡아 해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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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준 /사진=연합뉴스

가수 김원준 역시 지나치게 잘생긴 외모가 그의 음악성을 가린 케이스다. 김원준은 1990년대를 강타한 최고의 하이틴 스타였다. 만화책을 찢어 발기고 나온 듯한 그의 귀공자 외모는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는 당연한 결과를 낳았다. 치마 패션을 시도해 화제가 되고 당대 유명한 드라마에도 두루 얼굴을 비추며 인기 행진을 이어갔다. 그가 슈퍼스타로 발돋움한 결정적인 계기 역시 음악이 아닌 예능이었다. MBC '특종TV연예'에서 이영자와 '보디가드'를 패러디하며 이영자를 번쩍 안아든 모습이 방송된 다음날부터 그의 집으로 팬들이 속속 찾아오기 시작했다. 요컨대 미디어가 원하는 김원준의 이미지는 '음악인'이라기보다는 '노래도 하는 방송인'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김원준의 진정한 가치를 잊어버리곤 한다. 김원준의 데뷔 스토리는 흥미진진하다.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엄격하게 자랐다. 지나치게 엄격한 아버지는 때론 아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강하게 아들을 훈육해야 한다'는 강박이 꼭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원준은 어린 시절 주눅이 든 듯한 소극적인 아이였다고 한다.


그가 분출구를 찾은 것이 음악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아마추어 그룹 '쥬크박스'로 활동했고 서울예대 영화과에 진학해 메탈밴드와 통기타 클럽을 거치며 음악에 푹 빠졌다. 그러다 1992년 제일기획 개최 예정인 가수 오디션 기회를 얻어 300대1의 경쟁을 뚫고 합격해 한 달 보름 만에 앨범을 준비하는 강행군을 펼치게 된다. 삼성물산 새 의류 브랜드인 '카운트다운' 광고 기획 일환이었는데 참신한 신인가수를 내밀어 음악과 CF로 동시에 TV를 타격하며 인기몰이를 하겠다는 복안이었다. 김원준은 여기 주인공으로 낙점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이 강행군을 펼친 결과가 드라마틱한 대박이었다. 데뷔곡 '모두 잠든 후에'가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KBS 가요톱텐에서 4주 연속 1위를 하는 놀라운 결과를 낸다.(이 당시 5주 연속 1위를 하면 골든컵을 받으며 순위표에 은퇴하는 방식이었다. 단 1주차이로 골든컵을 놓친 셈이다)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이제 막 고졸신인으로 입단한 프로야구선수가 타율, 타점, 홈런 등 주요 타격순위 1위를 싹쓸이한 충격과 어슷비슷한 수준이다.


그런데 김원준을 단숨에 스타로 만든 '모두 잠은 후에'가 김원준이 작사·작곡한 노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뿐만이 아니다. 두 번째 앨범 타이틀 곡인 '언제나'역시 그가 만든 노래였다. 김원준의 인기는 3집 때 절정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는데 타이틀곡 '너 없는 동안'으로 활동하며 치마를 입고 허리를 돌리는 파격적인 안무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때 드디어 가요톱텐 5주 연속 1위를 하며 '골든컵'을 따내게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노래 역시 김원준이 작사 작곡을 맡았다. '너 없는 동안'이 수록된 3집 앨범은 앨범판매량만 140만장을 기록했다. 당대 최고 슈퍼스타 중 하나로 발돋움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이 바라보는 김원준의 이미지는 '활발하고 잘생기며 잘 노는 아이돌'의 모습이었다. 앨범의 거의 모든 곡을 만들어내는 김원준의 역량을 화려한 패션과 안무에 희석되어 대중에게 잘 전달되지 못했다. 그래서 김원준은 한발 더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연기를 잘하는 장동건이 이미지 변신을 위해 '더 센 것'을 찾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1995년 나온 4집 앨범은 그가 앨범 프로듀싱까지 담당하게 된다. 1996년 나온 다섯 번째 앨범은 록커의 이미지를 십분 차용해 '쇼(Show)'라는 노래로 활동하게 된다. 이 노래는 김동률이 작사·작곡했지만 댄스 가수로 알려진 김원준(사실 김원준은 메탈 그룹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을 정도로 록에 일가견이 있던 사람이었다)의 이미지를 한층 입체적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6집 앨범 타이틀곡인 '얄개시대' 역시 김원준이 만든 곳이지만, 기존의 이미지에 묻어가는 모습이었다면 7집 '가까이'에서는 큰 결심을 하고 '록발라드'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게 된다. 7집 앨범의 타이틀 '셀프 디스트럭션(Self Destruction)'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자기 파괴를 통해 아예 다른 가수로 서겠다는 큰 결심을 한 것이다.


하지만 차분히 음악성을 추구하겠다는 김원준의 결심은 아쉽게도 대중에게는 그다지 먹혀들지 않았다. 2000년 나온 8집 앨범, 2001년 9집 앨범은 냉정하게 말해 참패였다. 김원준이라는 가수 이름이 '과거형'으로 넘어간 것도 이 무렵부터다. 김원준은 이후 베일(V.E.I.L)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고 2010년부터 2013년까지는 김원준, 이세준, 배기성, 최재훈 등 동갑내기 가수 친구와 M4라는 프로젝트 그룹도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최근 김원준은 가요계 큰 흐름 중 하나인 '탑골 소환'의 그림 차원에서 과거에서 현재로 시간을 옮겨온 대표적인 가수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꽃미모가 나이에도 불구하고 거의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지금이 더 잘생긴 듯 느껴지기도 할 정도다) 하지만 김원준을 진정 잘 이해하려면 그의 외모가 아닌 여전한 음악성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그는 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있는 현직 교수이기도 하다.


[홍장원 기자]

2020.08.14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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