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봐라. 뭔가 꿈틀거리지 않나` 외치는 서양화가 정일영

[컬처]by 매일경제

8년여 만에 서양화가 정일영의 양평 작업실을 찾았다. 지난 7월 28일 양수역에서 만나 그의 작업실인 서종면 서후리로 이동하는 길은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2차선에서 단차선으로 바뀐 도로 양쪽은 녹음이 짙푸르렀고 숲이 무성하였다. 도로 끝에 마을이 있다고 했다.


작업실 문을 열자 작품들이 풍성하게 들어차 있었다. 천장 높은 데까지 특유의 밝은색 풍경들이 즐비하였다. 8년여 전에는 보이지 않던 해경(海景)도 많았다. 울산, 무안, 일본 돗토리현의 풍경을 담았다. 한 달여 미국 뉴저지에 머물렀던 특유의 시점으로 본 집 주변의 풍경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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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감성 독도. 2018

정일영은 최소 한 장소에서 일주일은 머문다. 대상을 익히고 형태를 지우며 색을 올리면서 마무리까지 원칙적으로 사생 작업을 한다. 그가 사진의 도움을 받은 건 몇 시간의 체류만 허락받은 독도 작업이 유일하다. 작품은 언뜻 보면 스펙트럼이 넓지 않은 듯 보인다. 오로지 풍경 그 자체이고, 특유의 화풍이 관통하기 때문이다.


그는 서른한 살에 미술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서울 노량진 대형 독서실의 총무를 맡아보았던 적이 있다. 동료 총무를 위해 경찰서에 불려가 진술해야 했다. 다음 날 실기 고사에 늦었다. 이미 치워진 이젤을 가져와 시험을 치렀으나 떨어졌다. 그는 몇 년 뒤 입학했다. 모교 대학원에서부터 본격화된 그의 작품은 비구상에서 출발한다. 도시 풍경 속 인물 작품도 등장한다. 대학원 논문을 쓰면서 '그리고자 하는 게 뭔가?'를 고민했다. 인물은 소재일 뿐이었다. 그 자체로 주제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가 20대를 보낸 거의 빛이 들지 않는 지하 단칸방의 세계는 낮과 밤의 일상을 바꾸었다. 배회하면서 본 도시 주변의 밤 풍경은 간판의 네온사인 빛이 이미지로 점철되어 있다. 이때의 빛에 대한 회상이 세 번째 초대전인 '도시의 불빛 속으로'(2006년)라는 타이틀로 이루어졌다. 그는 이 주제로 본격적인 작업의 방향을 잡았다.


그가 최초 그린 것을 지워가는 우선순위는 의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체험한 이미지다. 무의식화되어 있는, 알고 있는 이미지를 배제하고 깨닫고 의식하지 못했던 이미지들을 끄집어내고자 했다.


그는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풍경을 도구로 지난 삶에서 각인된 심연의 풍경을 입힌다. 작품 하는 주변 환경의 영향 또한 크다. 한때 그린벨트 숲에 놓인 매우 오래된 아파트 거실에서 작업을 했다. 스승인 서양화가 서용선을 따라 강원도 폐광인 철암 지역을 주제로 매달 '철암 그리기'에 따라 다녔다. 나와는 제100회째 행사, 철암에서 만나기도 했다. 그는 제법 오랫동안 가톨릭 독서 모임에 애정을 갖고 다녔다. 모임의 리더가 생태 신학에 대해 자주 강의했다. 절대자는 우주와 자연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믿음이 생태신학의 요체이다. 철암 가는 길, 철암은 계절마다 많이 달랐다. 기후 온난화가 그가 오가는 길을 이미 덮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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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게 말을 걸다 2008

'나무에게 말을 걸다'(2008년) 전시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담배를 필 때마다 든 '내가 내려다보는 숲은, 높은 아파트에서 내가 담배를 피고 있다는 걸 의식할까' 하는 의문이었다.


'생각하는 숲'(2009년)은 풍경 그림에 인물이 겹친다. 스스로 생각한 생태 신학적 사고의 영향이다. 수년 전 소재로 그렸던 인물이 각각의 대상과 장소에 깃들어 내재돼 절대자의 다른 모습으로 발현되어 느껴졌던 것이다. 불현듯 자신이 제대로 하고 있나. 작업에 대한 깊은 반성의 계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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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풍경 2014

그는 양평 숲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현장 작업을 시작하였다. '평범한 풍경'(2014년)은 대상에서 오는 영향보다는 생태 신학적 이념이 우선시되었다. 우주와 자연 속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믿음은 더욱 강해져갔다. 삶의 상태, 인간의 모습, 사회적 현상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는 게 아니고, 시각적으로 바라보는 대상에는 뭔가 있다는 확신을 확인해야 했다. 사생으로 캔버스에 구현되어 표현되는 현장은 자연을 들여다보는 뭔가가 녹아들 것이다는 믿음이었다.


갇힌 공간에서 트인 공간을 경험하고 싶었다. 마산, 해남 등 바닷가 작업의 현장으로 옮겨다녔다. 여행 작업은 현장에서 끌어와서 작업실에서 할 수 있을 것이다는 전제가 있었다.


정일영은 풍경 너머의 뭔가를 그리고자 한다. 작품의 특징인 언뜻언뜻 보이는 원색에는 생명력의 오라(aura)가 뿜어져 나온다. 그는 '봐라. 뭔가 꿈틀거리지 않나'라고 말한다. 나무는 각각의 생명 작용을, 숲의 나무들은 다른 나무와 경쟁을 한다. 그는 장독대에 정한수를 떠놓고 자식의 무운을 비는 토속 샤머니즘도 제도권 종교와 동등하게 본다. 그가 오랫동안 젖어든 생태 신학과 어느 정도 접점을 찾은 듯하다.


그는 총 7단계로 작업을 진행한다. 전 단계에 그려진 이미지의 형태와 색이 남아있다. 그의 붓터치는 마치 굼벵이가 기어가듯 제법 굵은 폭으로 꾸불꾸불하고 3~4㎝ 간격으로 끊어져 있다. 나무줄기 하나하나에 깃든 생동감을 표현하였고, 자신의 호흡법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색채가 단순한 여름보다는 겨울을 좋아한다. 그에게 인식된 겨울 작품은 여전히 초록이 주류다. 흙색의 마른 풀이 있어 여름과 대비된다. 초록이 없으면 단순하다. 그림자.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눈이 없다. 풍경에서 중요한 빛은 오전 대상과 오후 대상을 명확히 구분한다.


총 13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가 밝고 투명한 색을 갖게 된 것은 흰색을 바탕에 깔고 원색을 얹기 때문이다. 그러한 색은 20대 밤거리 거닐던 상점의 간판과 교회 십자가의 네온 빛에서 왔다. 그는 네온 빛을 보면 편했고 위안을 받았다. 디지털 이미지에 익숙한 이들이 자연에 오면 어색해 한다. 자연을 집중해서 잘 보지도 못한다.


사물이 의미가 된다. 가족을 대상으로 인물 전시를 했다. '익숙한, 막연한 관계'(2016년)이다. 그냥 지나는 가족이 의미를 갖고 보는 사물과의 관계보다 더 의미 있다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스쳤다.


뉴노멀이 된 코로나19는 기후온난화가 직접적인 원인이고, 그가 한때 신앙으로 가졌던 가톨릭의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가 지금의 팬데믹 상황을 경고하고 있다는 인식은 없었다. 작가는 형상적 사고를 하는 존재이다. 숲에 내재된 고통스런 존재를 응시할 정일영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다.


[심정택 작가]

2020.08.2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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