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버는 기계'가 된 인간은 아름답다…앤디워홀 팝아트에 담긴 철학

[컬처]by 매일경제

[죽은 예술가의 사회-60] 앤디 워홀(팝아트 아티스트, 1928~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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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아이콘 앤디 워홀

미국에서는 감옥에도 투자할 수 있다. 미국 정부는 비용 절감을 위해 일부 교도소를 민간 기업에 운영을 맡긴다. 이 교도소 기업들은 증시에 상장돼 있다. 감옥도 주식으로 만들어버리는 치밀한 자본주의는 미국의 강력한 무기다. 미국은 더 많은 부를 쌓기 위해 악착같이 싸우는 사람들의 욕망을 위대하게 여겼다. 그렇게 미국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됐다. 미국 경제 시스템을 수혈한 나라들 역시 고속 성장했다. 하지만 어디에든 그림자는 드리운다. 자본주의에는 감옥이라는 어둠도 돈으로 환산하는 비정한 얼굴이 있다. 이런 자본주의의 기운을 포착해 예술 장르로 만든 인물이 앤디 워홀이다. 그는 이 시대의 풍요와 비정함을 동시에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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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앤디 워홀이 상업 디자이너로 활동할 때 그린 일러스트 `슈즈`(1959) ⓒThe Andy Warhol Foundation

잭슨 폴록이 떠나고 앤디 워홀이 등장했다

1940년대 초반, 미국은 강대국 반열에 올랐다.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미국을 무시할 나라는 없었다. 하지만 미국에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유럽에서는 인상파, 다다이즘, 입체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야수파 등 다양한 예술 사조가 명멸했다. 그 시간에 미국은 도로를 내고, 빌딩을 짓고, 공장을 짓고, 자동차를 대량 생산했다. 황무지 개척에 힘 쏟느라 예술이라는 상징 자본을 쌓을 시간이 없었다.


현대예술 수도가 파리에서 뉴욕으로 기울기 시작한 건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부터다. 유럽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 자본가들은 유럽에서 온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뉴욕 곳곳에서 유럽 예술가들의 전시회가 열렸다. 뉴욕은 현대예술의 주요 무대로 부상했지만, 미국의 열등감은 치유되지 않았다. 미국에는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위대한 예술가가 필요했다. 그렇게 잭슨 폴록이라는 이단아가 탄생했다. 피카소 이후 더 이상 회화의 혁명은 없으리라 믿었던 미술계는 폴록의 액션페인팅을 보며 기겁했다. 미국의 평론가, 언론, 자본은 힘을 합쳐 폴록을 스타로 만들었다. 폴록은 전 세계가 가장 주목하는 화가가 됐다. 미국 미술 위상은 수직상승했다. 하지만 폴록의 시대는 길지 않았다. 그는 1956년 44세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미국은 새로운 미국인 예술가를 발굴해야 했다. 워홀은 바로 이 공백기에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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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 시대의 문을 연 `캠벨 수프`(1962) ⓒThe Andy Warhol Foundation

캠벨 수프 통조림

워홀은 미국으로 건너온 체코슬로바키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유년을 보내고 그곳에서 대학까지 나왔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워홀은 대학 졸업 후 곧장 뉴욕에 입성했다. 1950년대 초였다. 뉴욕 미술계 전체가 잭슨 폴록 찬양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워홀은 광고회사 일러스트레이터로 경력을 쌓았다. 뉴욕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뉴욕 아트 디렉터스 클럽' 어워드에서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이 대회는 디자인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불릴 만큼 권위가 있다.


10년간 광고회사를 다닌 워홀은 성공한 상업 디자이너 지위를 누렸지만, 만족하지 않았다. 잘나가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진지한 예술가가 되고 싶어 했다. 폴록처럼 슈퍼스타가 되기를 꿈꿨다. 그는 피카소도 폴록도 시도하지 않은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어 했다. 뉴욕의 한 갤러리 주인이 워홀에게 말했다. "이제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에서 이야기를 찾아야 해. 수프 캔을 그려보는 건 어때?" 기민한 직관력을 가진 워홀은 이 제안에서 성공의 냄새를 맡았다. 워홀은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있고, 자신도 자주 먹는 캠벨 수프 통조림을 떠올렸다. 1962년 워홀은 32개의 캠벨 수프 통조림을 그려 전시했다. 그렇게 팝아트 시대가 개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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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은 코카콜라처럼 대중이 사랑하는 상품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The Andy Warhol Foundation

"대통령도 나와 똑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

워홀은 자본주의를 이렇게 정의했다. "내가 미국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은 것을 소비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TV를 보고 코카콜라를 마시는데, 대통령이나 우리나 똑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 돈을 더 준다고 더 나은 코카콜라를 마실 수 없다."


1960년대 미국은 워홀이 예찬한 자본주의가 실현되던 시대였다. 컬러 텔레비전이 대대적으로 보급됐다. 미국인들은 텔레비전으로 드라마를 보고 비틀스 음악을 즐겼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극장에 가서 같은 돈을 지불하고 같은 영화를 보며 같은 배우에게 열광했다. 모든 사람이 햄버거를 먹으며 코카콜라를 곁들였다. 워홀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대중문화야말로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 워홀은 코카콜라처럼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제품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물론 워홀의 작품을 인정하지 않는 비평가도 많았다. 그들은 워홀에겐 진지함이나 예술가의 고뇌가 없다며 무시했다. 하지만 대중은 워홀의 실험에 호응했다. 알쏭달쏭한 추상화와 비교하면 워홀의 작품은 이해하기 쉬웠다. 워홀을 따라서 대중적인 코드를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들이 등장했다. 팝아트 전성기가 열렸다.


워홀은 자본주의를 소재로 작품을 만드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자본주의의 주인공이 되기로 한다. 1964년 뉴욕 맨해튼에 스튜디오를 연다. 워홀은 스튜디오를 '팩토리'(공장)라고 불렀다. 이 공장에서 워홀은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팝아트 작품을 대량으로 제조했다. 예술 작품을 대량생산한다는 개념 자체가 하나의 예술 실험으로 받아들여졌다. 워홀의 명성은 코카콜라나 캠벨 수프처럼 빠르게 퍼졌다.


팩토리에는 온갖 뉴요커들이 드나들었다. 가수, 배우, 시인, 화가, 모델이 팩토리에 모였다. 매일 밤 파티가 열렸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팩토리 안에서 함께 춤을 추고, 영감을 나눴다. 그들은 마약에 취해 흥청망청 젊음을 소비했다. 워홀은 팩토리에 온 다양한 군상을 관찰하며 그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팩토리를 찾은 인물들로 실험적인 단편 영화를 제작했고,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록밴드에 공연 무대를 제공했다. 워홀의 팩토리는 예술 공장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젊은 예술가들은 기꺼이 워홀의 재료가 되기 위해 팩토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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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의 죽음 직후 제작된 `마릴린 제단화`. ⓒThe Andy Warhol Foundation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워홀은 죽음이라는 주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1962년 마릴린 먼로가 세상을 떠난 직후 워홀은 먼로 얼굴로 연작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표작은 '마릴린 제단화'(1962)다. 워홀은 전성기 시절 먼로 얼굴 50개를 나열했다. 왼쪽 25개 캔버스에서 먼로 얼굴은 생기 넘치는 금빛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오른쪽 25개 캔버스 속 먼로는 흑백이다. 오른쪽으로 향할수록 얼굴은 서서히 희미해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다. 먼로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작품이다.


워홀은 대중문화 이미지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살았고, 그것을 긍정하며 예술 주제로 삼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공허함도 봤다. 먼로의 실제 삶은 불행과 고독으로 가득했다. 운 좋게 스타가 되긴 했지만, 행복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하지만 세상의 관심사는 먼로의 섹스 심벌 이미지뿐이었다. 먼로는 죽었지만, 그의 이미지는 죽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먼로는 섹시한 여배우 대명사로 소비된다. 워홀이 스타의 죽음을 주제로 삼은 건 이미지가 전부가 돼버린 시대의 비정함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죽음에 집착한 워홀은 실제로 죽음 문턱까지 다녀왔다. 1968년이었다. 워홀 팩토리에 드나들던 인물 중 밸러리 솔라나스라는 여성이 있었다. '남성을 말살해야 한다'는 과격한 사상에 사로잡힌 인물이었다. 솔라나스는 작가였는데, 워홀이 자신의 작품을 하찮게 여기자 앙심을 품었다. 솔라나스는 워홀에게 세 발의 총알을 쐈다. 긴 수술 끝에 겨우 목숨을 건진 워홀은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 했다. 이 총격 사건 이후 워홀은 변했다. 날것의 에너지를 내뿜는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그들로부터 뭔가를 얻어냈던 워홀은 낯선 사람을 경계하며, 신경질적인 인간으로 변했다.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던 팩토리 운영 방식은 변화했다. 파티는 끝났다. 팩토리는 아무나 입장할 수 없는 폐쇄적인 공간이 됐다.


총격 사건 이후 워홀은 본격적으로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었다. 아예 해골 이미지로 연작을 그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부자들과 유명인 초상화를 그리며 막대한 대가를 받기도 했다. 뉴요커답게 그는 계속 돈을 벌어 풍요로운 삶을 유지했다. 동시에 그 풍요를 한 번에 앗아갈 죽음의 공포 앞에서 떨었다. 워홀은 죽음이 이른 시기에 자신에게 찾아올까 두려워 병적으로 건강관리에 집착했다. 하지만 그는 허무하게 떠났다. 1987년 담낭수술 중 의료사고로 59세에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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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격 사건 이후 1970년대부터 워홀은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에 매달렸다. ⓒThe Andy Warhol Foundation

"돈 버는 것이 최고의 예술"

"나를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봐주세요.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워홀은 자신의 겉모습만 봐달라고 했다. 그것이 전부라고 했다. 자본주의, 소비문화 시대의 승리자. 이것이 워홀의 표면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죽음의 이미지들은 표면 뒤의 다른 워홀을 상상하게 한다. 눈부신 성공을 누리는 와중에도 '결국 이 뒤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차린 사람의 공허가 느껴진다.


보통 사람의 삶은 워홀 작품처럼 비슷한 이미지의 나열로 가득하다. 우리는 매일 같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일터로 간다. 어제와 비슷한 일을 하고, 유사한 고민을 하고, 먹던 음식을 또 먹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안부를 물으면 "늘 똑같지"라고 대답한다. 일상은 귀찮고 성가시고 지루한 과제로 가득한데, 이 모든 것이 계속 반복된다. 어제와 비슷한 오늘을 살다 보면 고통에도 둔감해진다. 무서운 공포 영화도 수차례 반복해서 보면 끔찍하지 않은 법이다. 그래서 가끔씩 멈춰 서서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이 시대가 만들어낸 그저 그런 이미지 중 하나일 뿐인가' '나는 돈 버는 기계인가' 이런 자기연민이 꼭 나쁜 건 아니다. 이 삶에 관해 거리를 두고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다. 일상에 무뎌져 직진만 하다보면 어딘가가 곪는 법이다.


세속적인 성공에 광적으로 집착한 워홀도 이따금 죽음을 생각하며 멈췄다. 기계처럼 끊임없이 성공 신화를 찍어내던 워홀은 이 모든 것이 한 번에 사라질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또다시 기계처럼 돈을 벌었다. 워홀은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우리의 내일은 오늘과 비슷할 테고, 모레는 또 내일의 복사 버전일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언젠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할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허무에 유혹당하지 않고 오늘도 돈을 벌기 위해 묵묵히 몸을 움직인다. 워홀은 이렇게 말했다. "돈 버는 것이 최고의 예술이다."


[조성준 기자]

2020.10.1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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