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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조각적sculptural 회화' 추구하는 서양화가 이재옥

by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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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옥 작 `Out of the box-1` 80x80cm, Oil on Canvas(2020)

서양화가 이재옥의 작품 이미지를 처음 본 건 지난 4월이었다. 스마트폰 화면으로 본 이미지는, 껍질을 깐 주황색 귤 과육이었다. 약 6개월이 지나 작업실을 찾았다. 눈에 먼저 들어온 건 마치 형형색색의 풍선이 뭔가에 눌어붙어 녹아내리는 듯한 장면이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캔버스에 그러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었다. 회화작가는 작품에서 구도의 중심이 되는 뼈대 장면부터 그린다. 서울의 위성도시, 중심지 역할을 하는 백화점 건물에 세일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여러 장 걸린 모습이 연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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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옥 작 `Tangerine Dream` 61x61cm, Oil on Canvas(2015)

한쪽 캔버스에는 귤 과육이 병에 들어 있기도 했다. 꽉 찬 느낌의 물기를 머금어 곧 터질 듯한 귤 과육은 캔버스 화폭의 땅김(tention)만큼이나 팽팽했다. 걸리버 여행기에 나온 듯 과육 아래에는 앙증맞은 왜건형 자동차가 놓였다. 귤 과육이 '거대한 인간 산(山)' 걸리버라면 차는 키가 6인치도 되지 않는 이야기 속 소인(小人)이다. 이러한 시각은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보고, 가까운 것으로 먼 것을 보는 미시적 이치를 깨달은 동양적 사유의 관점이다.


왜건 자동차는 여행용 짐을 차 지붕에 올린다. 차는 자유이고, 여행이다. 그러한 자유와 여행은 누구든 삶의 여정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작가는 작은 차를 몰고 자신의 거주지를 벗어나 계룡산 능선을 넘어 유성, 대전으로 마실을 다녀오기도 한다.


이재옥은 10년 이상 대전 신탄진에서 미술학원을 경영했다. 어느 날 학부모가 귤을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왔다. 아이들을 부르고 작은 귤 파티가 벌어졌다. 많은 사람이 거의 동시에 귤껍질을 까는 모습을 보면서 걸친 옷을 벗고 나신이 드러나듯 지난 20여 년 전 삶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지나갔다.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젊은 시절 좋아하는 이와 결혼을 부모가 반대한 대가와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선택지가 많지 않은 아이의 진로, 서울로 가지 못한 후회, 그림을 위한 이주였지만 힘든 기억만 남아 있는 프랑스에서의 사투 등. 순간 그림을 그리자는 꿈틀거리는 욕망이 솟구쳐 올라왔다. 자신의 삶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질게 군 인간에 대한 미련과 집착에서 멀어지자 이들과 용서와 화해의 방식으로 그림 그리는 행위가 아름다워 보였다. 한참 동안 그리지 않았던 행위에 따른 스스로의 죄의식과 채무감에서 벗어나는 통과의례이며 자신에 대한 가장 적절한 보상이기도 했다.


자신만의 색을 찾아야 했다. 포장지에 싸인 색깔별 사탕을 그렸다. 작가는 자신의 회로만에 진입하는 분신이며 붓에 묻히는 반복적 행동으로 인한 촉감과 코를 자극하는 특유의 냄새 끝에 물감의 물성 자체가 눈에 들어와 들여다보았다. 평면에 튜브를 몽땅 짜낸 듯한 물감을 그렸다. 귤 과육 그림을 통해 솔리드(solid:고정된 형태)를, 사탕과 짜낸 물감을 통해 색깔을 찾았다. 자신감이 붙자 점액질 물감의 물성과 역동성을 같이 그려보고 싶었다. 세워놓은 박스, 술병, 라이터, 맥주 캔에 물감이 흘러내린다. 엄격히 말하면 소품인 사물(object)의 파사드(facade)에 흐르는 물감을 그린다. 정물화에서는 사물이 적절한 자리에서 필수불가결한 대상이 되지만 이재옥 그림에서는 부차적인 존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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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옥 작 `앱슬루트` 73x100cm, Oil on Canvas(2019)

이재옥은 흐르는 형태(fluid form)를 통해 임파스토(impasto·두꺼운 물감의 붓터치) 기법으로 덮인 솔리드를 나타내고 싶어한다. 흐르는 건 액체 상태가 돼야 가능하다. 중력의 힘으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든, 물리적 낙차로 낮은 곳으로 흐르든 그 각각의 액체가 갖고 있는 재료적 한계로 흐르는 행위는 시간의 제한을 받아 일정한 시점에서 멈춘다. 물감이 흘러내린 최종 지점과 그 궤적을 그린다.


작가가 귤 과육 옆의 작은 왜건형 자동차든, 건축가가 모형을 만들듯이 작은 박스에서 흘러내리는 물감을 주목하는 행위는 밧줄에 묶인 '거대한 인간 산(山)' 걸리버 옆 소인과 대화하는 관점이다. 큰 소리를 내야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소인에게 집중한다.


사진을 이용한 회화 작업을 하는 신디 셔먼(Cindy Sherman, 1954~ )은 자화상 시리즈에서 동물 내장을 자신의 목에 건 모습을 그린다. 빛에 비친 내장은 번들거린다. 고형(固形) 상태의 표면은 액체이기에 번들거린다. 그 '번들거림'은 자신의 얼굴에 칠한 화장의 컬러와 더불어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이재옥 작품에서는 이러한 '번들거림'이 강조되지 않지만 전체 구도와 재료에서 흰색 터치가 빛과 조화하며 그 매개(媒介) 역할을 한다.


인터뷰 준비를 위해 조용한 아파트 실내에 앉아 있는데 작가의 중학생 딸인 김휘가 문을 열고 나와 맞은편 방으로 휙 하고 지나갔다. 나에게 인사를 했으나 알아듣지 못했다. 이재옥 작품의 핵심은 이러한 지나가는 순간의, 물감이 흘러내리는 정서, 정취(情趣)를 그리고자 한다.


고형 상태로 부조(浮彫) 또는 임파스토일 것이라 생각하고 직접 작품에 다가서면, 평면의 한계로 포착하기 힘들다. 떨어져서 본 대상의 재료는 매끈한 아크릴로 보였다. 가까이 서보니 유화다.


'형태가 갖고 있는 시간과 사건은 튜브를 짜낸(물감을 흘러내리게 한) 그 순간부터 응고되기 시작한다. 솔리드 형태와 어떻게 어울릴지는 재료의 물성과 평면을 둘러싼 공간에 작용하는 기운이 해결할 일'이라고 상상해본다. 색깔과 색채도 응고한다. 최종적으로는 작가의 붓질 테크닉, 운필(運筆) 리듬이 작품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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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옥 작 `하이네캔` 166x91cm, Oil on Canvas(2019)

이재옥 작품은 무한한 확장성을 갖고 있다. 동양적 미학과 사유의 관점은 대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흐르는 형태'를 받쳐주기 위한 소품들이 그냥 선택되지는 않은 듯하다. 이재옥 회화에서 이 소품들은 벽면에 걸린 회화와 별개로 기성품화된(ready made) 실제의 덩어리(volume)를 갖추고 특정 공간을 정의하기 위한 독립된 작품으로 등장할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이재옥은 가능한 한 단순하고 최소한의 요소를 통해 최대 효과를 이루려는 목적을 갖고 작업을 하기에 미니멀리스트(minimalist)다. 미니멀리스트가 미니멀리즘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회화에서 미니멀리즘은 이브 클랭(Yves Klein, 1928~1962)류의 모노크롬, 한국 미술에서는 단색화로 치환되기도 한다. 이재옥 작품은 도널드 저드(Donald Judd, 1928~1994)의 미니멀리즘과 비견될 수 있다. 저드의 작품은 회화와 조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3차원적 작품'으로 구현됐다. 조각은 공간이 필요하다. 공간 속 조각은 솔리드다. 솔리드는 void(빈 공간)와 관계성에서 의미를 찾는다.


이재옥은 이탈리아 현대미술가 조르조 모란디(Giorgio Morandi, 1890~1964)처럼 '공간, 빛, 색, 형태' 네 가지 요소의 배치, 조합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미니멀리즘을 찾아갈 듯하다. 이재옥은 10월 21일부터 11월 20일까지 서울 인사동 '통인화랑 스트릿갤러리'에서 전시를 연다.


[심정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