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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모네는 포기하지 않고 수련을 그렸다

by매일경제

[죽은 예술가의 사회-63] 클로드 모네 (화가, 1840~1926)

매일경제

빛이 주는 마법 같은 순간

따스한 날 오후, 느긋하게 산책해 본 사람들은 안다. 한낮 햇빛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눈꺼풀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덕분에 별 볼일 없던 동네 풍경도 포근한 수채화처럼 느껴진다. 시간은 낫낫하게 흐르고, 세상은 내가 알던 곳보다 조금 더 평화로워 보인다. 마법의 순간은 길지 않다. 빛은 멈추지 않고 변화한다. 빛을 통해서만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감각도 변덕이 심하다. 빛의 질감과 농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꿈결처럼 보이던 풍경은 부질없이 흩어진다.


클로드 모네는 빛이 전부라고 믿었던 화가다. 온화한 햇살이 선물하는 마법의 순간을 재빨리 스케치했다. 모네가 활동하던 시기 유럽은 산업혁명으로 뜨거웠다. 유럽은 근대사회라는 새로운 문을 열었다. 이 기간에 예술계에도 혁명이 일어났다. 이 혁명의 주도자가 모네다. 모네는 인상주의 사조를 창시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기존 화풍을 완벽히 거부했다. 거센 공격과 조롱을 받았지만 저항은 계속됐다. 혁명은 성공했다. 서양회화 역사가 뒤집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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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였던 모네가 그린 캐리커처.

캐리커처 그리며 돈 벌던 소년

따뜻한 봄날, 전국 각지에서 사생대회가 열린다. 학생들은 스케치북을 들고 공원에 가거나 동산에 오른다. 두 눈으로 자연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린다. 이렇게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리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서양화 화가들이 바깥에 나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19세기 중반부터다. 이전까지 화가들은 어두컴컴한 화실에 틀어박혀 상상력을 발휘해 그림을 그렸다. 문은 언젠간 열리는 법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화실 문을 활짝 열고 찬란한 빛이 가득한 세상으로 뛰쳐나왔다. 인상주의 대부였던 모네는 왜 캔버스를 들고 바깥에 나갔을까.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 일이 어떻게 미술 역사를 틀었을까.


1840년에 태어난 모네는 파리에서 멀지 않은 항구도시 르아브르에서 성장했다. 사업 수완이 좋았던 부친 덕분에 부족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모네는 공부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규율로 가득한 학교를 감옥처럼 여겼다. 모네는 항구에 나가 바닷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변화무쌍한 자연을 바라보며 때론 그 풍경을 그렸다. 모네는 자신에게 그림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특히 피사체 특징을 포착해 재빨리 묘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모네는 이 재능으로 캐리커처를 그렸다. 처음엔 취미 삼아 주변 사람을 그렸다. 점점 입소문이 났다. 모네에게 돈을 지불하고 캐리커처를 그려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늘었다. 10대였던 모네는 캐리커처만으로 웬만한 노동자보다 더 큰 수입을 올렸다. 아버지는 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모네가 화가의 길을 걷기보다는 자신의 사업을 이어받길 원했다. 이 시기에 모네에게 아픔이 찾아왔다. 1857년 모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조율하던 어머니가 떠나자 부자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모네는 아버지 뜻을 따르지 않고 화가의 길을 고수했다. 아버지는 재정적 지원을 끊으며 아들의 반항을 제압하려 했다. 모네는 집에서도 쫓겨났다. 그를 품어준 사람은 고모였다. 모네의 고모는 아마추어 화가이자 부자였다. 고모는 르아브르 지역에서 활동하는 젊은 화가들의 후원자였다. 고모는 모네에게 한 화가를 소개한다. 모네가 만난 인물은 외젠 부댕이었다. 모네의 삶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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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이었던 카미유를 모델로 그린 작품 `양산을 든 여인`(1875)

"왜 모두가 똑같은 그림을 그려야 합니까?"

"내가 한 사람의 화가가 되었다면 그것은 모두 외젠 부댕 덕분이다." 모네가 존경한 부댕은 풍경화 화가였다. 주로 바다 풍경을 그렸다. 당시엔 부댕처럼 일상적인 풍경을 그리는 화가는 극소수였다. 그는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고기잡이배와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구름을 묘사했다. 특히 부댕의 그림 속 구름은 인상적이다. 이 구름은 빛과 바람과 같은 자연 재료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몽환적인 느낌이 가득하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부댕의 구름을 두고 "술이나 아편처럼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고 평했다. 모네의 캐리커처 작품을 본 부댕은 소년의 재능을 알아본다. 부댕은 모네를 풍경화 세계에 초대했다. 인물 특징을 재빨리 캐치하는 모네의 관찰력이라면 자연을 묘사하는 데도 능력을 발휘하리라 본 것이다. 모네는 부댕의 제자가 됐다. 스승은 제자에게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경을 낚아채 캔버스에 묘사하는 기술을 알려줬다. 인상주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1861년 모네는 군대에 징집됐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 배치됐다. 당시에는 비용만 지불하면 조기 제대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회유했다. 그림을 포기하면 제대 비용을 대주겠다고 말했다. 모네는 거절하고 계속 군 생활을 했다. 예정대로라면 7년간 군 생활을 해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네는 입대 1년 만에 심한 장티푸스에 걸려 조기 제대했다. 모네는 고향이 아닌 파리로 향했다.


당시 파리 미술계 권력을 잡은 건 왕립미술아카데미였다. 아카데미는 매년 '파리 살롱전'이란 공모전을 개최했다. 사실상 파리에 모인 모든 화가의 목표는 살롱전 입상이었다. 이 공모전을 통과해야만 화가로 인정받았다. 모네는 샤를 글레르라는 화가의 화실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글레르는 살롱전에서 입상한 경력이 있고, 아카데미의 지지를 받는 화가였다. 글레르는 제자들에게 옛 거장 그림을 모사하면서 그들의 기술을 익히도록 지시했다. 모네는 이 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수백 년 전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진 화풍을 답습하고 싶지 않았다. 첫 번째 스승이었던 부댕처럼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었다. 글레르와 모네는 종종 부딪혔다. 글레르는 그리스신화나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영웅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라고 지시했다. 모네는 파리 길거리를 그리며 반항했다. 글레르는 거리 풍경 따위를 그리는 모네를 못마땅해했다. 그런 작품으로는 살롱전에 통과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모네는 "왜 모두가 똑같은 그림을 그려야 합니까?"라고 맞섰다. 모네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젊은 화가 몇 명과 함께 글레르의 화실을 뛰쳐나왔다. 그중엔 르누아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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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사조를 연 작품 `인상, 해돋이`(1872)

조롱으로부터 탄생한 인상주의 사조

1863년 모네, 르누아르와 같은 반항아들은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한다. 그해 살롱전은 다른 해보다 입상자 수가 적었다. 살롱전만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려온 화가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아카데미는 불만을 잠재우려 이례적으로 공모전에서 탈락한 작품만을 모아 전시회를 열어줬다. 이 전시회에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란 그림이 걸렸다. 이 작품이 일으킨 파장은 컸다. 마네는 풀밭에서 잘 차려 입은 남성 두 명과 그들 곁에 나체로 앉은 여성을 그렸다. 알몸인 여성은 당당한 눈빛으로 우리를 응시한다. 비평가들은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이런 외설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서양 회화에서 누드 역사는 깊다. 하지만 그림 속에서 옷을 벗은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다. 비너스처럼 신화 속 여신만이 나체로 등장했다. 기독교 문화에 뿌리를 둔 서양 회화에서 알몸 차림 여성은 오직 여신이어야 했다. 그런데 마네는 평범한 여성을 모델로 누드화를 그리며 규칙을 어겼다.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엔 세속적이고 선정적이었다. 모네는 자신과 이름마저 비슷한 마네의 도발에 영감을 받았다. 모네와 그의 친구들은 마네처럼 자신의 눈으로 지금 이 세상을 관찰하고 그리기로 한다. 화실을 뛰쳐나온 모네는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원근법, 명암법 따위는 무시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바람에 출렁이는 강물을 자유분방한 기법으로 그렸다.


모네와 그의 동료들은 꾸준히 살롱전에 도전했지만 보수적인 아카데미는 반항아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네는 10년이나 살롱전 문을 노크했다. 그사이에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둘 낳았다. 모네는 무능력한 가장이었다. 주류 미술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그의 그림이 팔릴 리가 없었다.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할 만큼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모네는 1874년 과감한 시도를 한다. 자신처럼 새로운 회화를 꿈꿨다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화가들과 함께 자체적인 전시회를 열기로 한다. 이 전시회에 참여한 화가 중엔 르누아르, 드가, 세잔, 피사로가 있었다. 모두 오늘날 위대한 예술가로 칭송받는 예술가지만 당신엔 실패자로 분류됐다.


모네가 준비한 전시회는 표면적으론 대실패로 끝났다. 관객은 얼마 없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혹평을 쏟아냈다. 모네는 '인상, 해돋이'란 작품을 출품했다. 유년 시절을 보낸 르아브르 항구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모네는 해가 떠오르는 찰나를 재빨리 묘사했다. 태양 빛으로 은은하게 물든 바다를 거칠게 묘사했다. 하늘과 바다 경계는 불분명하고, 바다에 떠 있는 배는 안개 때문에 흐릿한 윤곽만 남아 있다. 그림 전체가 몽환적인 뉘앙스로 가득하다. 한 비평가는 이 그림을 보고 '겨우 한순간의 인상 따위나 묘사한 그림'이라며 작품 제품을 비꼬아 조롱했다. 모네는 이 조롱을 듣고 생각했다. '내 눈에 비친 인상을 묘사하는 것이 왜 잘못됐나.' 모네는 자신의 화풍을 '인상주의'라고 명명한다. 인상주의 사조는 이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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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수련 연장 중 한 작품.(1916~1919)

인상주의라는 혁명

인상주의 화가들은 조롱과 비난에도 1886년까지 총 8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10년 넘게 주류 미술계에 맞서 싸운 셈이다. 오랫동안 그림은 귀족 계층이 향유하는 고급 문화였다. 하지만 산업혁명 덕분에 자본가 계급이 등장했고, 그들은 귀족과 다른 취향을 추구했다. 자본가들은 새로운 화풍인 인상주의에 푹 빠졌고, 모네와 그의 친구들을 후원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위상은 드라마틱하게 격상했다. 모네는 모진 모험 끝에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가 됐다.


회화 역사에서 인상주의 화가들이 특히 중요히 다뤄지는 이유는 그들이 빛을 그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상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 화가들은 족쇄를 차고 있었다. 그들은 신화 속 장면을 상상해 그리거나, 귀족 초상화를 제작했다. 화가보다는 작품 그 자체가 중요했다. 모네는 이 족쇄를 끊었다. 모네 이후로 화가 개성이 중요해졌다. 화가 개인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어떤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가가 화두가 됐다. 화가들은 해방감을 느꼈다. 무엇이든 그릴 수 있게 됐다. 표현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추상주의 사조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이룬 해방의 축복 속에서 태어났다.


명성과 부와 평온을 얻은 후 모네는 걱정 없이 그림만 그릴 수 있었다. 파리 근교에 집을 짓고 정원도 가꿨다. 정원엔 수련이 가득한 연못이 있었다. 모네는 집에 머물며 연못과 수련 풍경을 그렸다. 70세를 맞은 모네에게 시련이 닥쳤다. 백내장 증세가 나타났다. 병은 갈수록 심해졌다. 오른쪽 눈은 사실상 실명 상태에 가까웠고, 왼쪽 눈으로도 제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었다. 오직 눈에 의존해 그림을 그려온 모네는 절망에 빠졌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꿋꿋이 수련을 그렸다. 그는 인생 후반부 30년을 꼬박 바쳐 250여 점 수련 연작을 그렸다. 백내장 환자는 유독 붉은빛을 강렬하게 인식한다. 모네가 말년에 그린 수련은 붉은색으로 가득하다. 피사체 형체는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뭉개져 있다. 그림만 놓고 보면 연못과 수련을 그렸다고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다. 모네는 자신의 눈이 정상이 아님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고장 난 자신의 눈에 비친 세상을 정직하게 그렸다. 모네의 후기작은 추상주의 화풍 탄생에 기여했다. 1926년 모네는 8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시련이 와도 무릎 꿇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아버지와의 불화,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의 빈곤, 비평가들의 온갖 조롱에도 모네는 뚜벅뚜벅 걸었다.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치명적인 상황에 부닥치고도 하던 일을 계속했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자연을 포착한 이 화가는 자신의 삶만큼은 파도에 쓸려가지 않도록 단단히 부여잡았다. 모네의 인생은 그의 작품만큼 인상적이다.


[조성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