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컬처 ] 매리킴의 연극 내비게이션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연극의 거울, <시련>

by매리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연극의 거울,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서 연극의 기능을 이야기할 때, 아서 밀러의 <시련>은 그 기능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아서 밀러는 이 작품을 1953년에 쓰고 발표했는데, <세일즈 맨의 죽음> 등의 작품을 통해 동시대 사회의 비극에 천착해오던 작가 밀러가 갑자기 먼 과거인 17세기의 마녀사냥 이야기를 끄집어낸 데는 1950년대 미국 사회를 휩쓴 매카시즘(McCarthyism)이 발단이 되었다. 

 

1950년대 전 미국을 뒤흔든 매카시즘 광풍은 공화당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의 “미국 국무성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탄선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냉전의 긴장이 첨예하던 시절, 당시 공산권 국가들의 강한 영향력에 예민해져 있던 미국은 공산주의자 색출이라는 명분하에 무차별한 공포 정치를 펼쳐나갔고 수많은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다. 주동자 매카시는 광란에 가까운 열정으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지목, 고발하며 자신의 명성을 공고히 했고, 많은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 예술인들이 이에 반론하려 했지만 공산주의자로 취급 받을 것이 두려워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아서 밀러는 <시련>을 발표함으로써 17세기 세일럼의 마녀재판이란 연극적 프리즘을 통해 당대의 비극적 상황을 날카롭게 지적하고자 했다. <시련>의 작가 노트에서 아서 밀러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역사상의 역할과 유사한, 어떤 경우에는 아주 똑같은 역할을 한다. 따라서 관객들은 이 연극 속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괴이하고 무서운 사건들 중의 하나가 갖는 본질을 찾아내리라 믿는다.” 그는 이 작품 안에서 사소한 거짓말이 사람들의 이익과 사회구조와 얽히면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비극의 과정을 통째로 보여주었고, 이를 통해 당대 미국에 몰아친 매카시즘의 집단적 광기와 비겁한 소시민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연극의 거울,

<시련>은 17세기 세일럼에서 일어난 마녀사냥 사건을 통해 ‘두려움’이 한 사회의 구성원들을 어떻게 지배하고 다스리는지, 그리고 여기에 욕망과 탐욕이 더해지면 어떤 끔찍한 비극이 만들어지는지 선명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1692년 메사추세츠 주의 작은 마을 세일럼. 엄격한 청교도 윤리에 의해 다스려지는 이 마을에서 어느 날 밤 소녀들이 숲 속에서 발가벗고 춤을 추며 혼령을 불러내는 금지된 놀이를 벌인다. 이것을 지다가던 목사에게 들키게 되자 소녀들은 불호령이 두려운 나머지 악마에 홀린 척 연기를 꾸며댄다.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된 일이었지만 어른들이 소녀들의 거짓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간다. 

 

이제 자신들의 손으로 어찌 할 수 없을 만큼 커진 상황과 마주하게 된 소녀들은 더욱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더 필사적으로 ‘마귀에 쓰인’ 연기를 펼치게 된다. 이는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 광기 어린 피바람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잡혀갈까 두려워 줄줄이 남을 마녀로 몰아대고, 이 틈을 타서 그동안 개인적으로 원한을 가졌던 이웃을 고발한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거짓 증언 속에 사건은 종교적 무게를 지닌 마녀재판으로까지 확대되고, 급기야는 교수대가 등장하게 된다.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연극의 거울,

개척 시대의 미국, 거친 환경과 투쟁하며 살아가는 중에 엄격한 청교도적 규범에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사람들의 욕구불만은 거의 폭발 직전에 다다라 있었다. 그랬던 것이 소녀들이 만들어낸 작은 거짓말을 통해 터져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악마와 대항해 싸운다는 확고한 명분 아래, 오랫동안 억눌러 온 이기심을 드러내며 잔인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복수를 시작했다. 집단적 광기라 불릴만한 이 마녀사냥으로 최소한 175명이 감옥에 갇혔고, 이 중 20명이 처형되고 5명이 옥중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오늘날 미국 동부의 작은 마을 세일럼은 마녀박물관과 기념품들이 넘쳐나는 관광도시가 됐지만, 이곳에서 일어난 희대의 마녀재판은 여전히 사람들의 호기심과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서 밀러의 <시련>이 17세기 세일럼의 마녀사냥을 통해 1950년대 미국의 매카시즘 광풍을 비추는 거울로써 기능했다면, 국립극단의 <시련> 공연은 무대를 통해 다시 한 번 동시대를 비추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연출가와 무대미술가는 아예 무대 위, 모든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 앞에 객석을 일부 마련했다. 이로 인해 무대 위의 관객들은 아비게일과 소녀들이 만들어내는 거짓말을 모두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는 목격자이자, 피의 마녀재판이 이루어지는 법정의 증인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이들 관객이 똑똑히 지켜보는 앞에서 모든 사건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이 작품이 17세기 세일럼의 비극적 역사가 아니라, 지금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재진행형의 비극’임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공연기간 | 12월 28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사진제공 | 국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