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모토에서 온 편지

[컬처]by 미스핏츠
구마모토에서 온 편지

할머니와 어머니하고 저녁밥을 먹던 도중, 9시 뉴스를 알리는 시그널이 안방에 울려 퍼졌다. 아나운서는 이런 저런 사건들을 이야기하더니, 일본 구마모토 현에서 큰 지진이 났다는 뉴스를 전했다. 나는 입버릇처럼 “가야겠다.”라고 말해버렸고,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숟가락으로 얻어맞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곧바로 비행기 표를 예약했고, 카메라를 챙겨 구마모토로 출발했다.

 

일단 독자들에게 양해 말씀을 구하고자 한다. 나는 글을 쓰는 것 보다는 사진을 찍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다. 글과 사진에 모두 탁월한 재능을 보유한 사람이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힌다. 이 컨텐츠는 글 보다는 사진의 비중이 높으며, 글의 질은 중학생의 일기 수준이다. 독자들도 그 사실을 유념하며 읽어주길 바란다.

 

4월 21일 인천에서 출발하여 점심 즈음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다. 원래는 공항에서 출발하는 구마모토 행 직행 버스가 있지만, 지금은 운행을 안 한다고 하여 후쿠오카 시내로 나가 구마모토로 가는 버스를 탔다. 후쿠오카에서 구마모토까진 3시간 정도가 걸렸고, 구마모토 시내 쪽에서 내려 숙소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예상외로 구마모토 시내 쪽은 피해가 거의 없었다. 상상했던 것처럼 무너진 건물이나 깨진 유리창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시내의 상황을 보며 숙소도 찾을 겸 구마모토 시내를 몇 시간이나 걸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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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내의 전차

누가 알았겠는가. 설마 그 넓은 구마모토 현의 모든 호텔에 빈 방이 없을 줄이야. 밤 10시 쯤 되었을 때, 안 되겠다 싶어 노숙을 하려고 괜찮은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 때, 한 호텔의 주인 분이 뛰어나와 “넓은 홀을 임시피난소로 만들어 놓았는데, 괜찮으시다면 거기서 주무세요.”라고 이야기하셨다. 지금 생각해봐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감사를 표하며 피난소 안으로 들어갔다.

 

담요 한 장 없이 자려니 약간 쌀쌀했지만, 노숙보다는 훨씬 나은 형편이었다. 호텔을 찾으러 구석구석 쏘다닌 탓에 몸엔 피로가 쌓여있었고, 몸을 뉘이자 마자 금세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한 30분 정도 꿀 같은 잠을 잤을 즈음에, 갑자기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친구가 옆에서 일어나라고 깨우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난 이곳에 혼자 왔다는 걸 깨달은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눈을 떠보니 건물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피난소의 주민분들도 잠에서 깨어 여진이 멈추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날 일어나 뉴스를 확인해 보니, 어제의 여진은 진도 4 정도의 꽤 강력한 여진이었다. 액땜을 했다고 생각하며, 밥을 먹으러 편의점으로 향했다. ‘일본은 편의점이 참 잘 돼 있지.’라고 생각하며 편의점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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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시내 편의점의 모습

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뉴스에선 편의점 보급라인이 어느 정도 정상화 되어서 먹을 것들은 있다고 하였는데,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나 보다. 간신히 주먹밥 1개를 구해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지진 피해가 가장 심했던 마을인 ‘마시키’마을로 출발했다.

 

마시키 마을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중에, 한 아주머니가 말을 거셨다. 여행 중이냐고 물어보셨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실상을 따지자면 내가 언론사의 취재진도 아니고, 그저 사진을 찍는 사람일 뿐이니 말이다. 대충 둘러대고 ‘마시키’ 마을에 가는 버스를 여기서 타는 것이 맞느냐고 아주머니께 물어보았다. 들어보니 ‘마시키’마을로 가는 버스는 도로가 정상이 아니라 다니지 않는다고 하였다. 난 정말 운이 나쁜 사람이다. 게다가 정보력도 없는 사람이다.

 

어쩔 수 없이 마시키 마을까지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숙소라도 잡을 수 있었다면 짐이라도 놓을 수 있었을 텐데,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백팩과 카메라를 꽉 붙잡고 걸어가던 도중, 점점 부서진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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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외곽의 무너진 집

반 쯤 무너진 집에 계시던 아저씨에게 몇 가지 여쭙고자 다가갔다. 들어보니, 여긴 아직 구마모토 지역이고, 마시키 마을까지는 한참 남았다고 했다. 진원지인 마시키 마을하고 거리가 꽤나 있는데도 이렇게 피해가 심하냐고 물어봤더니, 이정도 피해는 피해가 아니라고 하셨다. 마시키 마을은 아예 전부 무너졌다고 하시며 자기는 정말 괜찮다며 웃어 보이셨다.

 

마을 안의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지진 때문에 막힌 길이 많았다. 그래서 강을 끼고 쭉 2시간을 걸어서 마시키 마을에 도착했다. 일단 그 곳의 피난소 상황도 확인할 겸, 마시키 마을의 정보도 얻을 겸하여 ‘히로야스 소학교’ 대피소를 찾았다.

 

그 곳엔 많은 차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데, 한 일본 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 하니, 활짝 웃어 보이시며 자기의 핸드폰도 삼성이고 평소에 노블레스 웹툰을 즐겨보신다고 하셨다. 몇 분 정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나서, 아저씨께 이번 상황을 여러모로 물어봤다.

 

1. 마시키 마을 안에 ‘키야마’라는 장소가 마시키 내에선 가장 많이 피해를 입었다.

2. 자원봉사하러 온 학생들은 일을 안 한다. (고등학생이라 어쩔 수 없지~ 라고 하셨다.)

3. 마시키 마을 다음으로 피해가 심한 미나미아소 마을까진 대중교통은 물론이고, 택시로도 못 간다고 하셨다. 다리가 무너졌기 때문에, 다리까지는 갈 수 있지만, 지도를 보니 거기서 걸어가려면 2시간 정도가 걸린다.

4. 피난소는 꽉 찼지만, 물이나 식량이 부족한 상황은 아니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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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키 마을의 히로야스 소학교 피난소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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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야스 소학교 피난소의 운동장

아저씨께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마시키 마을 중에서도 피해가 가장 심하다는 ‘키야마’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 거의 모든 집이 무너져있었다. 태풍의 눈은 고요하다던데, 지진의 진원지는 바람 한 점 막아줄 집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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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소의 아저씨께서 지금 당장의 걱정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걱정이 훨씬 크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생업을 이어가던 가게는 전부 부서졌고, 다른 지역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이 돌아올 집도 전부 무너졌다. 희망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스와 수도도 끊겨 당장의 어려움도 크긴 하지만, 미래가 없다는 것은 절망적이다.

 

게다가 점점 지진 관련사(死) 사망자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지진 관련사(死)는 지진에 의한 2차 피해로 사망하는 것을 말한다. 피난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정신적, 신체적 스트레스로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을 지진 관련사로 칭한다. 현재 지진 관련사 사망자는 총 16명이다. 대부분 이코노미 증후군1)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곳에 살고 있었다. 다른 지역으로 나갈 법도 한데, 피난소의 아저씨는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마을이다.”라며 단호하게 말씀하시며, 마을을 떠나기 보다는 마을 복구를 위해 일하겠다고 하셨다. 아이들은 웃고 떠들며 놀고 있었고, 어른들은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 짓고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그들은 간신히 미소를 머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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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키 마을의 주민들

그렇게 촬영을 마치고, 다시 2시간을 걸어 구마모토 시내로 돌아왔다. 호텔이 오늘도 모두 꽉 찼다는 소식에, 구청 피난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기약 없는 피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치 무인도에 표류하듯이, 언제 복구 될지 모르는 자신들의 집에 돌아가기만을 꿈꾸며 찬 바닥에 몸을 뉘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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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청 피난소의 모습

정말 민폐라고 생각했지만, 잘 곳이 정말 없었다. 다행히도 자리는 꽤나 많이 있기에 가방을 놓고 바닥에 누웠다. 그리고 어김없이 여진이 또 찾아왔다. 서러움에 눈물이 쏟아질 뻔했지만, 이 곳의 사람들을 보자 그런 기분이 싹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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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청 피난소를 바라보는 주민

아침에 일어나자 장대비가 쏟아졌다. 핸드폰을 켜고 구마모토 지진에 대한 한국 언론사의 기사들을 습관처럼 찾아봤다. 그 때 처음 기사의 댓글란을 보게 되었다. 온통 일본에 대한 욕뿐이었다. 심지어 인과응보라는 말도 적혀있었다. 순간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 부끄럽고 이 곳의 피난민분들께 너무나도 죄송했다.

 

나는 절대로 역사를 잊으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역사를 잊지 않는 만큼, 여기 있는 사람들도 잊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끼니도 겨우 해결하고, 일주일 간 씻지도 못하고, 여진 때문에 밤엔 잠도 설치는 생활을 많은 주민들이 하고 있다. 집이 무너지고, 가게가 무너져 앞으로의 생활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착잡한 마음에 담배를 피러 나왔는데, 한 아저씨와 대화를 나눴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 하니 자기는 한국을 정말 좋아한다고 활짝 웃으시며 여러 가지를 물어보셨다. 그러다 아저씨는 한국 분들은 지금 상황을 응원해주고 계시냐고 물어보셨다. 순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나마 달린 입은 울음이 터질까봐 열지 못했다. 그래도 말은 해야겠기에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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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소에서 씻지 못하는 주민들을 위해 머리를 감겨주는 자원봉사자들

한국에 돌아오기 위해 구마모토에서 출발하여 후쿠오카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가 출발하며 땅이 울리는 느낌이 다리에 전해지자, 공포가 먼저 마음을 후벼 팠다. 여진에 대한 기억 때문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여진만을 경험한 나도 이런데, 본진과 여진을 2주 동안 경험한 주민 분들은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며 집에 돌아와 열심히 사진들을 보정하고 재단하였다.

 

이 글과 몇 장의 사진들이 주민들에게 힘이 되길 바라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을 코딱지만큼이라도 바꿔 놓고 싶은 마음이다. 물론 응원해주시는 분들도 계시고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도 많은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대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최소한, 인간 대 인간으로서 이 곳의 주민들을 바라봐주었으면 한다. 일본 정부를 두둔하려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일본 정부와 일부 혐한 일본인들에 대한 분노를, 죄 없는 주민들을 욕하며 푸는 것에 대해 슬픔을 느낀다. 이들이 이번 지진에서 흘린 피와 눈물은 결단코 분풀이의 대상이나, 여흥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잘 것 없는 글과 사진을 끝까지 봐줘서 감사하다. 이 글과 사진을 위해 힘써준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낀다, 앞으로도 현장에서 열심히 뛰는 사진가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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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 및 편집 / 요정, 저년이

글 / 사이먼

2017.11.1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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