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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깊어가는 겨울과 함께할 책

『불안의 책』

by문학동네

쓸쓸해지는 계절에 어울리는 책! 『불안의 책』! 

안녕하세요! 깊어가는 계절에 어울릴 만한 책을 한 권 소개할까 합니다.

『불안의 책』

이번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0번으로 출간된 『불안의 책』이에요. 리스본의 영혼, 포르투갈의 국민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대표작이죠. 그 동안 국내에 두 개의 중역본이 출간되었기 때문에 페소아와 『불안의 책』에 대해 아시는 분들도 많을 것 같아요. 이번에 문학동네에서 나온 『불안의 책』은 포르투갈어 원전 완역본이랍니다. 페소아가 포르투갈어로 쓴 문장의 맛과 결을 살리려 무한한 공을 들여 출간한 책이에요.

『불안의 책』 『불안의 책』 『불안의 책』

페르난두 페소아


페소아는 아주 많은 글을 썼지만 출간에는 적극적이지 않아 생전에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가라고 해요. 그러다 사후 2만 7500장이 넘는 원고가 담긴 트렁크가 발견되었고, 연구자들이 그의 글을 출간하면서 아주 유명해졌어요. 『불안의 책』도 원고 더미에 있던 글들을 연구자들이 묶어 출간한 책이랍니다. 후세 사람들이 출간한 책이라 판본에 따라 수록된 글의 개수와 배열이 다른데요, 문학동네에서는 리처드 제니스라는 유명한 페소아 연구가의 편집본을 완역했어요.

『불안의 책』 『불안의 책』

좌 페소아의 원고가 담긴 트렁크. 우『불안의 책』 원서

창조하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을 파괴했다. 내 안의 나 자신을 너무 많이 밖으로 드러낸 나머지 이제 내 안에서 나는 껍데기로만 존재한다. 나는 다양한 배우들이 다양한 작품을 공연하는 텅 빈 무대다. (텍스트 299)

우선, 페소아에 대해 한 가지 알려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페소아는 글을 쓸 때 자기 자신으로서 쓴 게 아니라 자신과 별개인 인격체를 만들어내 그에게 글을 쓰는 임무를 부여했어요. 작가의 분신이 아니라 고유한 이름과 전기(傳記)를 지닌 독립체인거죠. 그들을 헤테로님(heteronym), 즉 이명(異名) 인물이라 하는데 그런 이명이 70개가 넘는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불안의 책』 『불안의 책』

리스본에서 만날 수 있는 페소아의 형상들


『불안의 책』은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라는 이명 인물의 작품이에요. 수많은 이명 인물들 중에서 페소아와 가장 비슷한 인물이랍니다. 단조로운 일상을 영위하는 회계사무원이지만 회계장부를 앞에 두고 꿈을 꾸며 내면의 세계를 확장시켜가는 소아르스. 소아르스도 페소아처럼 리스본의 거리를 거닐며 사색에 잠기고 글을 끄적이죠.

 

『불안의 책』에는 소아르스가 끄적인 481개의 글이 담겨 있어요. 하나의 스토리로 이어지는 글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한 단상들이랍니다. 종잇조각에 끄적인 작가의 필체가 그대로 느껴지는 듯한 글이에요. 깊은 곳의 감정을 끄집어내기도 하고, 인생에 대해 얘기하기도 하고, 주변 인물들을 묘사하기도 해요. 한 남자의 내면세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영혼의 기록이죠.

오로지 꿈만 꾸었을 뿐이다. 꿈만이, 오직 그것만이 내 인생의 의미다. 내면의 삶이 아닌 다른 것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아픔들은 내 안으로 향하는 창문을 열고 거기 있는 것들을 바라보느라 나 자신을 잊어버릴 때 가라앉곤 했다. (텍스트 92)

나는 지금 회계장부 위에 고개를 숙이고 어느 이름 없는 회사의 의미 없는 출납 기록을 열심히 작성하고 있다. 그러는 동시에 나의 생각은 실재하지 않는 동양의 어느 풍경 안을 지나는, 존재하지 않는 배의 항로를 똑같은 집중력으로 따라가는 중이다. (텍스트 302)

『불안의 책』에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도 없고 과거와 현재, 미래의 경계도 없어요. 지금 감각하고 느끼는 것이 현실이자 현재죠.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지만 머릿속으로 남쪽 바다를 꿈꾸고 있다면 그에게는 남쪽 바다가 현실인 거예요.

 

지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의 전(全) 존재를 상상할 수 있는 힘, 동료의 굽은 등을 보며 눈물겨울 정도의 친밀감을 느끼는 여린 마음, 스치는 바람결을, 달라진 공기의 질감을, 미묘하게 변해가는 빛의 색채를 감지하는 촉수. 우리 안에 얼마나 섬세한 감정의 결이, 광대한 우주가 있는지,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삶이 얼마나 풍부할 수 있는지 소아르스는 잘 보여준답니다.

 

무뎌진 감정의 날을 살리고, 내면의 문을 조금만 열면 우리도 좀더 풍부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똑같은 시간을 살지만 그 시간의 깊이를 키워가는 거죠.

『불안의 책』

『불안의 책』 표지 이미지가 된 그림이랍니다. 모라이스라는 포르투갈 화가 선생님께서 그린 그림인데요, 수많은 페소아의 모습을,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혼재해 있는 『불안의 책』의 이미지를 아주 잘 나타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림에 대한 비용은 주지 않아도 된다고, 대신 자신의 그림이 들어간 『불안의 책』이 나오면 포르투갈로 보내달라고 하신 화가 선생님 감사드려요! 페소아가 한국에 알려지는 건 기쁜 일이라고 하셨죠.)

『불안의 책』

한 꼭지 더. 『불안의 책』을 원작으로 한 「불안의 영화」도 있답니다. 리스본의 정경이나 소아르스의 모습이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 조금 아쉬웠어요.

요즘처럼 어둠이 깊어지는 시기, 생각에 잠기기도 좋고 책 읽기도 좋은 날,『불안의 책』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외부가 아니라 나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 그윽이 나 자신에게 잠겨보는 건 어떨까요? 내 안에 어떤 감정이 있는지, 어떤 불안한 요소가 나를 흔들리게 하는지, 나는 어떤 것을 상상하고 꿈꾸는지, 거리의 찬바람을 맞으며 한 번쯤은 리스본의 소아르스가 되어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세상의 첫날부터 단조롭게 비만 계속 온 것처럼, 이 슬픈 겨울의 차가운 오후에 비가 내린다. 비가 오고, 내 마음이 비 때문에 꺾이기라도 한 것처럼, 내리는 비가 아무것도 키우지 못하고, 씻어내지 못하고, 기쁘게 하지 못하는 도시의 땅바닥을 멍한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비가 오고, 나는 불현듯,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동물, 오두막에 있는 양 존재의 한구석에 웅크린 채 미약한 열기가 영원한 진실인 양 만족해하며 생각과 감정을 꿈꾸는 동물이 되었다는 거대한 무게감에 짓눌린다. (텍스트 391)

『불안의 책』의 한 구절입니다. 요즘 같은 날씨를 잘 표현하는 구절인 것 같아 가져와봤어요.^^;;


올 겨울은 『불안의 책』과 함께!


편집자 문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