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멀리 왔다』 (실천문학사, 2016)

[컬처]by 웹진 <문화 다>

김남극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너무 멀리 왔다』(실천문학사)가 출간되었다. 시인은 첫 시집 『하룻밤 돌배나무 아래서 잤다』(문학동네)를 통해 '오지(奧地)의 시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만큼 우리가 지나쳐버린, 혹은 잊고 있었던 하나의 세계를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아버지, 요즘 누가 시를 읽나요?

‘망연히 쓸쓸히 고요히’라는 부제를 붙일 법한 이번 시집에서 김남극 시인은 주변적 삶에서 비롯되는 감정과 자신의 일상을 반추하며‘중심’에서 비켜선 채 살아가는 존재, 중년에 접어든 한 사내가 세월의 흐름 앞에서 느끼게 되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한 번은 본 듯한 얼굴”을 시집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천천히 걷다가 어디서 만나봄직한 시인의 시들은 빠르게 움직이는 삶과 경쟁하지 않는다. 첨단의 감각을 앞세워 세상의 질서에 맞서는 불화의 시학도 아니고, 상식적인 이해의 근거를 뒤흔드는 사유의 시학도 아니다. 김남극의 시는 삶에, 일상에 가장 밀착되어 있으면서 그것들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지금, 여기에’ 가장 가까이 와 있는 시집이다.

『너무 멀리 왔다』 (실천문학사, 2

랜드로바 구두 밑창이 갈라져 빗길을 걸으면 양말이 젖는다

 

그럴 때마다 그 구두를 신은 시간과 구두를 신고 걸은 길과 또 구두를 신고 함께 걸은 사랑하는 이의 상처가 생각나

갑자기 우울해진다

우울이 구두다

그러니까 나는 우울을 신고는

우울하지 않은 척 다니다가 끝내 내게 들킨 거다

 

구두 밑창을 갈러 가게에 들렀더니 새 구두를 사는 게 낫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나는 또 우울을 숨기고 살 수밖에

광택으로 우울을 가리고 살다가 또 양말이 젖고서야

그렇지,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 구석진 선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실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랜드로바 구두」전문

낡고 닿은 ‘랜드로바 구두’를 통해 시인은 시간, 길, 사람 그러니까 삶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에 붙잡힌다. 시인에게 구두는 우울과 같고 구두를 신고 다니는 ‘공산품화’ 된 인간의 삶은 자연히 ‘나는 어쩌다 이렇게 멀리 오게 된 걸까?’라는 실존적 물음과 연결된다. 이 우울한 질문의 시간은 “우울하지 않은 척”으로 위장된 허위의 시간을 중단시키고 ‘우울’에 연루되어 있는 중년의 진실을 드러내며 이 세계의, 사람의 내면을 나란히 응시하도록 만든다.

친구 아버지 장지에 가서

운구를 하고 회다지를 하고 돌아와

술이 취해 자다가 일어났다

 

저녁빛이 방바닥에 조금 남아 있다

그늘이 더 넓다

그늘을 채우면서 사는 게 인생이라더니

그 그늘을 다 못 채운 친구 아버지는

조금은 더 쓸쓸했겠다

 

-「어느 저녁」부분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삶을 더 자주 고민하는 일이다. 김남극의 시에서 (몸으로)늙고 (마음으로)병들어 가고 있다는 정서는 주로‘저녁’‘밤’이라는 세계를 바탕으로 나타나는데 이때의 ‘어둠’은 black(黑)보다는 dark(玄)에 가깝다. 백(白)이 아니라 빛(光)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 시인은 죽음(어둠, 우울, 슬픔)의 가운데에서도 삶을 돌아본다. 아픈 아내의 시간과 시험 공부하는 딸의 시간과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는 남편과 아버지의 시간 모두에 불쑥 침범하는 쓸쓸함을 시인은 고요히 응시한다. 그것이 마치 우리 모두가 알고도 속고 있는 삶이라도 되는 듯이.

 

망연히, 쓸쓸히, 고요히.

 

우리는 어느 저녁, 시집을 읽다가, 물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그저 저 세 단어로도 충분한 일이 아닌가.

2016.11.2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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