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한 '나주곰탕' 국물엔 일제 수탈의 아픔이…

[푸드]by 뉴시스

뉴트로 푸드

일제가 조선 소 대량 수탈… 통조림 만들고 소머리 등 부산물 넘겨

요즘은 사태·양지 등 살코기만 넣고 6시간 이상 푹 고아 담백한 맛

곰탕거리 주말이면 젊은이 꼬리물어…인증샷 올리는 '힙한 음식'


서울 을지로 허름한 골목이 젊은이들의 '뉴트로(neutro) 감성'을 자극하며 '힙지로'로 등극했습니다. 뉴트로는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로, 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경향을 뜻합니다. 뉴트로 바람은 음식(먹거리)에도 불어 오랜 동안 서민들의 사랑을 받아 온 음식들이 새롭게 조명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음식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숨어있는 이야기와 부모, 형제의 애환이 녹아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해방, 분단, 6·25 등 격동의 근현대사를 겪으며 가족의 한 끼를 걱정해야 했던 어머니의 눈물로 만든 음식이 있습니다. 일제 수탈 현장에서 민족의 눈물로 끓여낸 '국밥 한그릇'도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 스토리, 손맛이 깃든 전국의 맛을 찾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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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이 맑고 담백한 맛이 일품인 나주곰탕

차가운 겨울날씨가 이어지면서 속을 뜨끈하게 덥혀줄 '나주곰탕' 한 그릇이 간절해지는 계절이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은 나주곰탕에 100여년 전 일제강점기 식민지 수탈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 당시 사람들은 시장 통에서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곰탕 한 그릇을 귀한 음식으로 여기고 먹었지만, 맛을 선호하는 현대인들은 별미음식으로 찾고 있다. 민족의 아픔과 서러움이 녹아있는 '나주곰탕'에 얽힌 숨겨진 얘기를 찾아 떠나보자.


나주곰탕은 소뼈로 국물을 우려내는 타 지역 곰탕처럼 뿌연 국물 색을 띠지 않는다. 소의 살코기 부위인 양지와 목심, 사태만을 장시간 푹 고와서 만들어 맑고 담백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나주곰탕이 탄생한 나주는 고려시대부터 전주와 더불어 전라도 행정과 경제·군사·문화의 중심지였다.


983년 고려 성종 때 설치한 나주목은 913년 동안 유지됐고, 곡창지대를 끼고 농축업이 발달해 당시 인구는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혔다. 흥선대원군이 '나주에 가서 세금 자랑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조정에 올려 보냈을 만큼 부유한 고을이었다.


평야를 기반으로 생산된 넉넉한 농축산물과 전국 유일의 내륙 항구인 영산포 뱃길을 따라 유입된 각종 해산물이 더해지면서 전국 최초의 장시(5일장)가 열릴 만큼 각종 산물도 풍부했다. 이처럼 풍요로운 고장이었던 나주에서 시작된 맑은 곰탕의 유래는 아이러니하게도 민족의 암흑기였기 던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의 영혼 달래기 위해 일본인 사업가가 '축혼비(畜魂碑)' 세우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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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일본인 사업가 다케나카 신타로(竹中新太?)가 나주에 설립한 '다케나카 통조림공장' 전경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한반도를 침탈 한 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나주 등지에 비옥한 농지가 많아 경작용 일 소로 쓰기 위해 키우는 소 마릿수가 많은데 주목하고 1916년 현 나주시 죽림동 일대에 일본인 사업가 다케나카 신타로(竹中新太?)를 앞세워 당시 최신 설비를 갖춘 '다케나카 통조림공장'을 세운다.


이 공장은 전쟁터에 나간 일본군에게 군납용으로 보급할 쇠고기통조림을 주로 만들었다. 통조림용 소는 당시 나주시 금성동 일대 잿등에 있던 도축장에서 도살해 공급했다.


윤지향 나주시 학예연구사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기억으로는 나주를 비롯해 인근 함평, 영암 등지에서 트럭에 실려 온 소를 하루 200~300여 마리를 도축했고 작업에는 조선인 인부들이 대거 투입됐다"며 "태평양전쟁이 한 창이던 때는 하루에 400마리가 넘는 소가 도살되면서 도축장에서 현재 나주초등학교(송월동) 후문을 따라 흐르던 재신천이 핏빛으로 물 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고 말했다.


식민지 수탈의 상징인 '다케나카 통조림공장'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 목재 건물 옆에 가축(소)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일본인 사업가가 건립한 '축혼비(畜魂碑)'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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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도축한 소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통조림공장 안에 세운 축혼비.

일제가 당시 얼마나 많은 조선의 한우를 매일 같이 도축했는지 보여주는 수탈의 상징물이다. 일제는 통조림 제조과정에서 사용하지 않고 버려지다시피 한 소머리와 각종 부산물 등의 부위를 조선인 상인들에게 헐값에 넘겼다.


당시 상인들은 시장 저잣거리에 솥을 걸고 장작불을 피워서 소머리와 각종 부산물에서 떼어낸 살코기 등을 넣고 끓인 국밥 형태의 곰탕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고급 부위는 일본군과 일본인들이 차지한 탓에 부산물 만 넣고 끓인 곰국은 수차례 기름기를 걷어내는 수고를 거쳐야만 맑고 개운한 맛의 국물을 얻을 수 있었다.


나주 사람들은 당시 시장에서 팔았던 맑은 국물의 국밥이 나주곰탕의 시초가 됐다고 입을 모은다. 세월이 흘러 현재 나주시 과원동 금성관(錦城館·조선시대 관아) 앞에 들어선 나주 곰탕집 거리에서 즐길 수 있는 곰탕은 주로 소의 사태·목심·양지 등의 살코기 만 넣고 6시간 이상 푹 고아 국물이 맑고 담백한 맛을 낸다.

수차례는 토렴 과정 거치며 먹기 딱 좋은 75도 정도면 손님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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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 수육 썰기

모든 곰탕집들마다 한 결 같이 삶은 고기는 먼저 건져서 먹기 좋은 적당한 크기로 잘라둔다. 고기는 뚝배기에 밥을 말아 뜨거운 국물로 수차례 토렴한 뒤 계란지단과 송송 썬 파 등의 고명과 함께 얹어 손님에게 낸다. 나주곰탕은 경상도식 따로 국밥처럼 밥을 따로 내지 않는다. 밥이 담긴 뚝배기에 국물을 부었다 따르기를 수차례 반복하며 데우는 토렴 과정을 거쳐 먹기 딱 좋은 온도인 75도 정도에 이르면 손님상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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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담긴 뚝배기에 국물을 부었다 따르기를 수차례 반복하며 데우는 토렴 과정

알맞은 온도는 급하게 먹어도 뜨거운 국물에 입천장을 데지 않을 정도로 적당하다. 곰탕에는 여러 반찬이 필요 없다. 함께 나오는 걸쭉한 양념국물이 스민 곰삭은 깍두기와 전라도식 묵은 배추김치를 함께 곁들이면 입안은 금세 호사스런 맛으로 가득 찬다. 미식가들 중에는 잘 숙성된 깍두기 국물을 곰탕에 넣어 먹기도 한다.


곰탕만으로 뭔가 부족하다면 참깨가 솔솔 뿌려진 쫄깃하고 부드러운 우설(소 혓바닥)이 섞인 갓 삶은 따뜻한 수육 한 접시를 참기름 소금장에 푹 찍어 먹으면 금상첨화다. 나주곰탕거리에는 이름난 맛집이 즐비하지만 100년이 넘는 세월 속에 4대째 운영 중인 '나주곰탕 하얀집'은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오래된 노포 식당으로 나주를 대표한다.


이곳 못지않게 맛과 전통 때문에 점심시간이면 손님들이 줄을 서는 3대째 운영 중인 '나주곰탕 노안집'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이 방문해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음식문화에 일고 있는 복고 열풍을 보여 주듯 나주곰탕거리에도 주말이면 외지에서 찾아오는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3대째 나주 노안곰탕' 식당 주인 나종필씨는 "주말과 연휴 때면 전국의 유명 맛집을 찾아다니는 젊은 세대들의 발걸음이 식당으로 이어지고 있고, 이제는 그 모습에 익숙해 졌다"며 "이들은 한 결 같이 곰탕을 먹기 전에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SNS에 올릴 사진을 먼저 찍고 나서야 수저를 든다"고 말했다.


앞 세대들에게는 오래되고 익숙한 식당과 음식이지만, 젊은 세대에겐 오히려 '힙'하게 인식되는 모양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일고 있는 오래된 것(retro)을 새롭게(new) 즐기려는 '뉴트로(newtro)'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나주=뉴시스] 이창우 기자

2020.02.1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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