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차범근 이전에 그가 있었다…아시아의 황금다리 최정민

[이슈]by 뉴시스

기사내용 요약

평안남도 출신으로 1·4 후퇴 때 월남 이력

한일전 킬러…日 수비수도 "위대한 공격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만든 양지축구단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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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1954년 3월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 일본과의 경기가 일본 도쿄에서 두차례 열렸다. 최초의 한일전으로 열린 이 경기에서 한국이 1승1무를 기록하며 월드컵 참가 티켓을 따냈다. 한국 선수 3명 중 맨 왼쪽이 최정민. (사진=대한축구협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뉴시스는 유구한 스포츠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전설적인 인물들을 소개하는 기획 기사를 새롭게 선보인다. 지금의 스포츠팬들에게는 잊혀진, 하지만 당대에는 최고의 스포츠 스타로 국민적 사랑을 받았던 최고의 전설들을 소개하는 시리즈 '전설리뷰'를 시작한다.

국가대표팀 골잡이 손흥민이 한국 축구의 아이콘 역할을 하고 있지만 1950~1960년대 대표팀 공격을 이끌었던 골잡이는 최정민이다.


1927년생으로 평양사대를 다녔던 최정민은 해방과 6·25 이후 샛별처럼 나타난 천재 선수다.


평안남도 출신으로 1·4 후퇴 때 월남했던 최정민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때부터 한국의 대표적인 골잡이로 이름을 날리며 '아시아의 황금 다리' 또는 '100만 불 왼쪽 다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국 축구의 제1세대 골잡이인 최정민은 특히 한일전에 강했다. 최정민은 1954년 3월7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스위스월드컵 예선 일본전에서 2골을 뽑아 5-1 대승을 이끌었다.


일본 국가대표를 지냈던 구쓰와다 미쓰오는 1954년 3월13일자 아사히스포츠 기사에서 "최전방의 최정민은 밀집 지역에서도 기교 있게 공을 빼 나와 일본 수비진을 괴롭혔다"고 최정민의 활약을 평가했다.


최정민은 1956년 멜버른올림픽 예선, 1959년 메르데카배 등 각종 대회에서 일본만 만나면 맹활약했다. 최정민의 골은 곧 승리라는 공식이 이어져 한국은 한일전 4승1무로 우위를 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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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1956년 홍콩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안컵에서 우승을 확정지은뒤 걸어나오는 태극전사들의 모습. (사진=대한축구협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도 최정민을 주목했다. FIFA는 "팬들 사이에 황금발로 알려져 있는 최정민은 당시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집요한 태도로 공격 최전방에서 파워 넘치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한국의 1956년과 60년 아시안컵 우승 주역"이라고 평했다. 일본의 수비수 류조 히라키는 FIFA와 인터뷰에서 "밸런스와 스피드를 가진 위대한 공격수여서 그를 저지할 수 없었다. 우리는 거인과 싸우는 어린이 그룹과 같았다"고 회고했다.


최정민은 한국이 1~2회 아시안컵(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을 석권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1회 아시안컵은 1956년 9월 홍콩에서 열렸다. 예선을 통과한 4개국이 풀리그로 우승을 가렸다. 1승1무를 거둔 뒤 베트남과 최종전을 치른 한국은 5-3으로 이겨 초대 아시안컵 챔피언에 등극했다. 이 경기에서 최정민이 2골을 넣었다.


2회 아시안컵은 1960년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다. 이 대회 역시 4개국 풀리그 방식으로 열렸다. 한국은 1차전에서 베트남을 5-1로 꺾었다. 최정민이 이 경기에서 1골을 넣었다. 이스라엘과 대만을 연파한 한국은 아시안컵 2연패를 달성했다. 하지만 한국은 그 이후 62년째 아시안컵 우승과 인연이 없다.


다만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참패는 최정민에게 아쉬운 대목이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당시 대표팀 골키퍼였던 홍덕영은 2001년 한국일보 기고문에서 "당시 세계 최강 헝가리에 0-9로 완패했지만 전반전에 좀 더 과감한 경기를 펼쳤더라면 한 골 정도는 넣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김용식 감독은 최전방 공격수 최정민에게도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하라'고 지시했었다"며 최정민이 공격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1956년 홍콩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안컵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우승했던 박경호는 2015년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호주 아시안컵을 앞둔 대표팀에 대한 평가를 해달라는 요청에 "우리 때는 '아시아의 황금다리'로 불린 스트라이커 최정민이 있었어. 키 1m78㎝로 당시엔 장신이면서도 빨랐고, 찬스를 놓치는 법이 없었지. 내가 늘 강조하는 3B(브레인·보디 밸런스·볼 컨트롤)를 모두 갖춘 선수였어. 지금 대표팀에는 최정민 같은 해결사가 보이지 않아 걱정이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1961년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지도자로 변신한 최정민은 세계 축구사에 가장 이질적이고 기형적인 팀인 양지축구단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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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북한의 1966 잉글랜드 월드컵 8강 진출에 자극받은 한국 정부는 1967년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의 주도로 양지 축구팀을 창단했다. 1970년까지 3년동안 존속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에 오르자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타도 북한축구' 특명을 내렸다. 김형욱은 대한축구협회 임원들을 소집해 국가대표 11명과 군, 대학의 우수 선수들을 중심으로 1967년 양지축구단을 결성했다. 양지라는 이름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앙정보부 부훈(部訓)에서 땄다.


골키퍼 이세연, 수비수 김호·김정남·조정수·서윤찬, 공격수 허윤정·정병탁·김삼락·이회택·임국찬 등 쟁쟁한 스타들이 모두 모였다. 양지축구단은 사실상 강제로 조직된 팀이었다. 정부는 징집 일정을 앞당겨 선수를 군에 입대시킨 뒤 양지축구단으로 전출시키기도 했다.


양지축구단은 1969년에는 한국 축구 사상 처음으로 유럽 전지훈련을 떠났다. 양지축구단은 서독과 프랑스, 스위스, 그리스 등을 105일간 돌며 26전18승2무6패라는 좋은 성적을 냈다. 공교롭게도 양지축구단이 존속하는 동안 남북 대결은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다.


양지축구단은 김형욱의 실각으로 1970년 3월17일 해체됐다. 양지축구단 소속 선수들은 이후 새 소속팀 등으로 흩어져 한국 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이후에도 지도자 생활을 이어간 최정민은 1977년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역임했지만 56세였던 1983년 12월 당뇨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 ​daero@newsis.com

2022.11.1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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