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굴뚝을 보면 윤선도가 아른거린다

[여행]by 오마이뉴스

해남읍 연동마을 담은 높고 굴뚝 낮은 집, 녹우당


우두둑 두둑 초록비(綠雨) 내린다. 잔뜩 찌푸린 해남 하늘은 '산통' 끝에 장맛비를 쏟아 부었다. 궂은 날에 찾아 나선 곳은 해남읍내에서 그리 멀리 않은 연동마을이다. 해남윤씨 종가, 녹우당(綠雨堂)이 있는 마을이다.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이는 녹우당 뒷산 덕음산 비자 숲에서 시작한 비는 이내 연동마을을 푸르게 적셨다.

오마이뉴스

녹우당 정경. 호남제일의 갑부 집답게 전남에서 제일 크다. 집 앞에 있는 500년 묵은 은행나무는 입향조 윤효정이 아들 윤구의 진사시 합격을 기념해 심은 나무라 한다.(2013.08에 촬영) ⓒ 김정봉

종가가 제일 깊숙이 있고 덕음산에서 흘러온 냇물 따라 아래로 후손들이 뿌리를 내렸다. 이제 타성바지(자기와 다른 성(姓)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집성마을 모습은 많이 사라졌어도 녹우당은 500년을 버텨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윤선도유물전시관을 거쳐 바로 녹우당으로 갈 수 있으나 드문드문 보이는 마을 안 돌담을 눈짐작으로 이어가며 돌아가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있다.

해남윤씨 집안이 해남의 갑부가 된 사연

오마이뉴스

연동마을 정경. 집성촌의 모습은 많이 없어졌지만 이어졌다 끊어졌다, 드문드문 보이는 돌담을 보며 옛일을 더듬어 본다. ⓒ 김정봉

해남윤씨 입향조는 어초은 윤효정(1476-1543)이다. 윤효정이 백련동(현 연동마을)에 터 잡은 것은 해남의 대부호 해남정씨 정귀영의 사위가 되면서부터다. 이후 해남정씨의 소유였던 엄청난 땅을 상속받고 강진 덕정동에서 해남 백련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임란 이전에는 남녀차별 없이 균분상속의 관습에 따라 처가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처가 덕분에 해남윤씨 집안은 갑부가 된 셈이다. 엄청난 상속재산을 바탕으로 윤효정 이래 6대가 내리 문과에 합격함으로써 호남의 대표적인 명문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윤효정의 4세손, 고산 윤선도(1587-1671)와 윤선도의 증손 공재 윤두서(1668-1715)는 두 말 필요 없이 이 집안이 배출한 인물 중의 인물이다.

오마이뉴스

고산사당 정경. 고산 윤선도를 배향하는 불천위 사당이다. 300년 묵은 해송이 보살피고 있다. 녹우당 담 밖에 고산사당, 어초은사당이 잇닿아 있고 녹우당 뒷담, 오솔길 따라 가다보면 추원당이 있다. ⓒ 김정봉

고산은 대표적인 호남남인으로 후손마저 18세기 중엽, 윤두서의 아들 윤덕희(1685-1766) 이후 중앙 정관계로 진출하지 못했고 정치적으로 큰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상속재산에다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부를 축적해 향촌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윤선도의 경우 엄청난 재산을 유지 경영하는데 적극적이고 적잖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지방관들과 관계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윤두서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관직생활보다는 개간을 비롯해 토지경영에 적극적이었고 종가의 운영에 힘을 쏟았다.


현산면 바닷가 백포마을에 윤두서고택, 초호마을에 윤탁가옥이 잔뿌리를 내리고 윤선도의 경우 금쇄동과 보길도에 원림을 조성하고 두 곳을 오가며 말년까지 은둔을 거듭한 것도 이런 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녹우당 주변은 하나의 큰 원림

오마이뉴스

녹우당 솟을대문과 담.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싶은 겐가. 담은 높고 솟을대문마저 한 발치 물러나 있다. 평소 개방하지 않아서 내 눈에 담이 더 높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2013. 08에 촬영) ⓒ 김정봉

녹우당은 전남에 남아있는 민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집이다. 녹우당 일원에 두툼한 담으로 둘러싸인 녹우당과 고산사당, 어초은사당, 멀찌감치 추원당이 떨어져 있다.


담으로 골목이 생기고 오솔길이 생겼다. 연동마을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작은 마을 같다. 녹우당을 옛집으로 국한하지 않고 공간을 마을 어귀와 녹우당 뒤편, 덕음산 자락까지 확대할 때 녹우당의 진정한 멋을 볼 수 있다.

 

마을 어귀에 네모난 연못과 해송 숲이 있다. 연못을 파낸 흙으로 가산(假山)을 쌓고 가산과 못 주변에 해송을 심어 작은 숲을 만든 것이다. 마을 앞의 허한 곳을 막기 위해 조성한 비보숲이다. 이 숲과 연못을 녹우당의 앞뜰(전원前苑)이라면 녹우당 후원(後苑)은 녹우당 뒤편, 진록의 비자나무 숲이다. 녹우당의 두툼한 담 밖의 세상이다.


비자숲은 뒷산의 바위가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윤효정의 유훈에 따라 500년 전부터 후손들이 가꾼 숲이다. 인위적으로 가꾼 비자림과 굴참나무, 곰솔, 동백나무, 서어나무 등이 한데 어우러져 풀빛의 후원이 된다.

오마이뉴스

덕음산 비자나무. 솨~~녹우가 내린다. 솨~~녹우소리가 들린다. 이 나무는 내 시각과 청각을 모두 건드린다.(2015.05에 촬영) ⓒ 김정봉

녹우당 이름은 예서 나온 말이다. 비자 숲이 지나가는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마치 초록비가 내리는 것 같다 하여 녹우라 했다 한다. 사전(辭典) 말로는 늦봄에서 여름까지 풀과 나무가 푸를 때 내리는 비를 녹우라 하기도 한다. 미적 감각이 풍부한 윤선도에 이어 독창적 예술세계를 연 윤두서와 그의 아들, 손자에까지 예향(藝香)이 전해 내려온 고택에 어울리는 말이라면 나는 전자(前者)를 꼽겠다.

해남윤씨 종가, 녹우당

오마이뉴스

사랑채와 회화나무. 밖에서 하늘에 걸린 회화나무 가지만 보았다가 이번에 그 실체를 보았다. 차양을 드리기 위해 설치한 사랑채 겹처마지붕 구조가 독특하다. ⓒ 김정봉

녹우당에 발을 들여 놓았다. 해남은 물론 강진에 들렀을 때, 여서도, 청산도, 완도에 들를 때마다 그냥 지나치기 서운하여 빼놓지 않고 들른 녹우당이었지만 처음으로 녹우당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담 밖에서 헛물 마시며 하늘에 걸려 있는 가지만 보았던 회화나무의 실체를 보았다.

 

사랑채의 겹처마 구조가 독특하다. 빛이나 비를 막는 차양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랑채 앞에 처마를 내고 별도로 지붕을 설치한 것이다. 안채는 원래 'ㄷ' 자형이지만 사랑채가 잇닿아 있어 네모난 'ㅁ' 자로 보인다. 이 또한 남부지방에서는 독특한 주택구조다. 안채 아랫방과 건너 방 부엌의 지붕에 송광사에서 보았던 솟을지붕형태의 환기용 구조물이 환기를 돕는다.

오마이뉴스

안채지붕. 안채 지붕에는 솟을지붕모양의 환기장치가 달려 있다. 송광사에 보았던 구조물이 민가에 설치된 점이 특이하다. ⓒ 김정봉

사랑채 차양과 지붕의 환기장치는 전통의 틀에서 벗어난 실용적인 장치로 보인다. 이 집안의 이런 실용성은 가학으로 전해져 윤두서에서 절정을 이루고 윤두서의 외증손 정약용에까지 영향을 미친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건축은 전통을 고집하기보다는 사람을 중심으로 실용을 보태어 변화하는 게 순리라 생각한다.

담은 높고 굴뚝은 낮다

오마이뉴스

안채와 굴뚝. ‘ㅁ’ 자 모양의 안채구조 또한 남부지방에서는 독특해 보인다. 여러 화목이 심어져 있는 화단에서 붉은 색 굴뚝은 훌륭한 장식역할을 한다. 기와색 지붕과 붉은 황토색 몸체가 대비되어 색감이 좋다. ⓒ 김정봉

녹우당을 감싼 담은 높기만 하다. 솟을대문마저 한발 물러앉았다. 밖에서 보면 지붕만 보이고 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녹우당에 푹 안겨 바깥세상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조용히 관망하며 살고 싶은 옛 주인들의 마음이 담긴 것은 아닌지.


담은 높더라도 굴뚝은 낮다. 몇 년간 우리나라 북쪽에서 남쪽까지 굴뚝을 보고 다녀봤어도 지역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 점을 발견하였다. 따뜻한 남쪽 해남이어서 굴뚝이 낮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굴뚝이 낮은 것은 담이 높은 것과 같은 이치라 생각해 본다.

 

안채굴뚝은 여러 화초가 있는 화단 안에서 훌륭한 장식 역할을 한다. 회색빛 기단에 붉은 황토를 벽돌모양으로 두텁게 쌓아 연기구멍을 내었다. 거기에 수키와와 암키와로 굴뚝지붕을 만들어 얹었다. 회색 기단, 붉은 몸체, 재색지붕이 대비되어 색감이 좋다.

오마이뉴스

안사당. 녹우당 동북쪽 조용한 곳에 안사당이 있다. 대숲과 동백나무가 무성한 그윽한 곳이다. ⓒ 김정봉

안채 후원으로 돌아가 보았다. 동북쪽 안사당으로 가는 길이다. 대숲과 동백이 비를 반기며 진한 풀내음을 내뿜고 있었다. 막돌 기단 위에 다소곳하게 서서 뭔가 조용히 관망하는 굴뚝 하나, 녹우당 사랑채에서 보았던 편액 글씨와 참 잘 어울린다. 글씨는 정관(靜觀).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정관은 '만물정관개자득(萬物靜觀皆自得)'에서 나온 말로 만물을 고요히 바라보니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이라.


이 집의 중심인물 윤선도는 그리 길지 않은 관직 생활을 하고 나머지 유배와 은둔생활을 거듭하며 파란의 생을 산 인물이다. 그렇지만 마냥 세상을 등지며 은둔만 고집하지 않았다. 은둔하는 가운데 조용히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에 나갈 기회를 적극적으로 타진한 인물이다. 이 굴뚝을 보면 윤선도가 아른거린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초록비 맞으며 세상을 조용히 바라보며(정관) 때를 기다리고 있노라 한다.

오마이뉴스

'정관(靜觀)' 글씨. ‘녹우당’과 함께 사랑채에 달려있는 편액으로 이광사가 썼다. 집주인의 은둔적 사고를 잘 나타낸 글씨로 보인다. ⓒ 김정봉

오마이뉴스

후원 굴뚝. 풀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진한 녹빛이 가득한 후원에 뽀얀 굴뚝이 다소곳하게 서있다. 정관 글씨가 집주인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라면 이 굴뚝은 그 생각을 표현한 구조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 김정봉

고산이 은둔하며 세상을 정관하려했다면 당쟁 여파로 낙향을 결심한 공재 윤두서는 무엇을 정관하려 했을까? 현산면 공재고택에 들러 그의 무덤 앞에서 물어볼 참이다.


김정봉 기자(jbcaesar@naver.com)

2019.08.01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Copyright © ZUM internet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