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에 자금 대던 화가가 급히 그리느라 빼먹은 것

[컬처]by 오마이뉴스

독립운동에 앞장선 서화가 일주 김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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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괴석과 대나무, 1944년 ⓒ 고은솔

1980년대 후반 강남이 개발되고 아파트가 수없이 들어서자 미술계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강북의 오래된 부유층들이 강남으로 거주지를 옮기기 시작하며 그들의 집을 장식하였던 동양화나 서예 작품은 점차 관심을 잃어 갔다.


서구적 형식의 서양화가 새로운 주택에 맞는 것이라며 본격적으로 집안을 장식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한국의 전통적인 동양화나 서예는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여겨지고, 유화나 판화 등 서양적인 미술이 한국의 대표적인 미술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전통은 하루아침에 끊어지지 않아 여전히 한국의 전통 미술을 찾는 애호가들이 있었다. 이상범(李象範)과 변관식(卞寬植)으로 대변되는 고급 산수화는 계속해서 찾는 이가 있었고, 조선조 문인화의 전통을 잇는 수묵화도 인기가 있었다.


특히 매란국죽(梅蘭菊竹)을 중심으로 하는 사군자(四君子) 작품은 문기를 숭상하는 지성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고향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급속도로 도시화되고 서구화되어 가는 사회 속에서 동양 정신의 마지막 보루 같은 느낌을 주었다.

대표적인 사군자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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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용하, 국화, 1940년대 ⓒ 황정수

대부분의 동양화가들이 사군자를 그렸지만 품목에 따라 인기 있는 유명한 전문가들이 있었다. 매화 그림으로는 오경석(吳慶錫) 집안과 정학교(丁學敎) 부자의 솜씨가 인기 있었고, 허백련(許百鍊)이나 최린(崔麟) 등이 그린 매화 그림도 많은 이들이 선호하였다.


난초 그림으로는 청나라 상해화파의 화풍을 배워 유연하고 넉넉한 느낌을 주는 민영익(閔泳翊)의 난초 그림이 단연 인기가 있었다. 또한 '석파란'이라 불린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난초나 김응원(金應元) 등의 난초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국화 그림은 특별히 잘 그린다고 소문난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개성 출신 황용하(黃庸河)의 '실국'이라 불린 선묘를 잘 살린 그림이 많이 알려졌고, 강취운(康翠雲)이나 주산월(朱山月) 같은 평양 기생들의 국화 그림도 볼 만하였다.


대나무 그림으로는 단연 평양 출신 김규진(金圭鎭)과 대구 출신 서병오(徐丙五)의 것이 유명하였다. 김규진의 호방한 그림은 평양화단의 김유탁(金有鐸) 등에 이어졌고, 민영익의 영향을 받은 상해화풍의 서병오의 그림은 배효원(裵孝源), 서동균(徐東均) 등 대구 출신 제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재평가되기 시작한 김진우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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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사진 ⓒ 간송미술관

1990년을 전후로 근대기 서화가들 중에 유난히 미술계에 입에 많이 오르는 작가가 나타났다. 독특한 대나무 그림으로 유명한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 1883-1950)였다.


그는 그때까지 다른 서화가들에 비해 그리 유명하지도, 애호가들이 선호하는 편도 아니었다. 그런 김진우가 갑자기 평가가 높아진 것은 그가 단순한 서화가로서만 활동한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라는 불행한 현실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하며 그림을 그린 것을 높게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김진우는 강원도 영월 출신으로 성격이 강직하고 호탕한 편이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화서학파의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의 기치를 내건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의 진중에 들어가 그를 따른다. 그의 항일 의지는 유인석이 국내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만주로 망명했을 때에도 계속된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1915년 유인석이 죽자 스승을 잃은 상실감에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하며 위기를 맞는다. 그럼에도 그는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중국 명사를 만나 국권 회복의 방법을 모색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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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진, 목죽도, 1930년대 ⓒ 황정수

미술여행을 끝내고 1917년 경 부인과 아들을 서울로 올라오게 하여 자리를 잡는다. 그는 서울에 처음 올라와 종로통에 살다가 연지동으로 이사를 간다. 그는 서화가로서 활동하며 종로통에 '서화가게'를 차려 생업을 꾸린다.


김진우의 미술 학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보통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에게 사군자를 배웠고, 1918년 김규진이 개설한 '서화연구회' 제1회 졸업생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본인은 '나는 그림 스승이 없다, 감옥에서 스스로 터득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근거로 독학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술이라는 것은 쉽게 혼자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다.


김규진의 제자들인 이병직(李秉直)이나 이응노(李應魯) 같은 화가들과의 유사성 등을 보더라도 일정 부분 김규진의 지도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단지 다른 제자들과 달리 김진우는 사제 관계라기보다는 김규진과 서로 교류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강원도 대표 의원을 지냈으며, 1921년 귀국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다 붙잡혀 3년 징역형을 살기도 하였다. 감옥에서 나와 훗날 생활이 안정되자 권농동 김은호의 집 뒷집으로 이사 왔다가 다시 원서동으로 이사한다.


그가 결국 북촌 지역으로 옮겨 살게 된 것은 북촌이 여유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지만, 북촌 지역에 독립 운동에의 의지가 강한 지사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 김진우의 집 근처에 송진우, 김성수, 여운형 등이 살고 있었으며, 이들과 늘 가까이 지냈다.


이곳에 살며 김진우는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자금을 대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3.1운동이나 6.10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날이 되면 일경은 김진우를 예비 검속하여 일주일이나 보름 정도씩 구속하였다가 풀어주곤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예비 검속 때가 되면 그는 미리 알고 술에 잔뜩 취해 자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일본 경찰들이 하는 수 없이 들쳐 메고 갔다고 한다. 그렇게라도 일경을 골탕 먹이려 한 것이다.

김진우, 묵죽 묵난, 1930년대 ⓒ 고은솔

김진우는 1920, 1930년대에 많은 전시회를 하며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 판매한 그림 값의 대부분이 독립 운동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때 각지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려 팔린 돈을 독립운동에 쓰려다보니, 급히 그려 주느라 낙관을 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김진우의 작품은 다른 이들의 그림과는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보통 도제식 그림을 배우면 스승의 필치와 거의 같기 마련인데, 김진우의 작품은 다른 이의 작품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독특한 필치이다.


그의 작품은 스승으로 전하는 김규진의 필법과도 조금 다르고 다른 작가의 예에서도 보기 힘들다. 이는 평소에 중국의 '개자원화보'를 보며 많은 공부를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북송(北宋) 때의 유명한 문인화가 '문동(文同)'의 그림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김규진의 그림 속 대나무는 믿음직한 줄기에 따라 잎이 유연하게 이어져 완결된 구성을 보이는데, 김진우의 대나무 그림은 굳은 줄기에 댓잎이 붙어 있는 듯 마는 듯 이파리들이 날렵하게 흩날리는 모습이다. 이러한 댓잎 하나하나는 마치 창날의 모습 같기도 하고, 검 날의 모습 같기도 하여, 이는 김진우의 독립에의 의지가 잘 표현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난초 그림 또한 단정하면서도 굳건함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의 굳고 고결한 품성의 모습이 잘 반영되어 나타난 듯하다. 어떤 작품에서는 난초가 하늘을 향하여 춤을 추기도 하고, 유연하게 늘어지기도 하는데, 모두 작품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는다.

몽양 여운형 회갑에 그려준 괴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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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괴석 ⓒ 황정수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약세로 돌아서고 점차 일제의 패망이 다가오자 1944년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과 함께 건국동맹(建國同盟)을 결성한다. 두 사람은 굳건한 의지로 무장한 통 큰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멀지 않은 북촌 지역에 살아 시간이 나는 대로 만나 조국을 위한 대업의 꿈을 꾸었다.


김진우는 1946년 건국동맹을 결성한 동지 여운형의 회갑을 기념하여 '괴석도' 한 점을 그려준다. 화첩에 떨어져 나온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여운형 회갑 기념 화첩 중 한 장으로 보인다. 여운형의 삶을 '우뚝 솟은 한 조각 돌(屹然一片石)'이란 제목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이 돌은 몽양의 기상'이라 하였으며, 몽양이 '오래 살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으로 마무리 하였다.


한평생 조국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 힘쓴 여운형의 기세가 잘 이입된 명품이다. 먹의 농담을 잘 살려 괴석의 석질을 잘 표현하였다. 굴곡과 주름이 강하고 까슬까슬한 돌의 피부가 한 평생 조국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헌신한 여운형의 일생과 한 치의 차이도 없어 보인다. 이는 오랜 세월 여운형을 곁에서 지켜보아온 김진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 시대를 바람처럼 살아온 두 풍운객들의 동지애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김진우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은 회갑 이듬해인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파 한지근에게 저격을 당해 세상을 떠난다. 한국 독립운동의 거목이 홀연히 세상을 떠나는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 그가 살아 좌우 합작의 역사가 이루어졌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은 어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생각할수록 아쉬운 일이다.


여운형이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후 3년이 지난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다. 남침한 공산정권은 서울에 남아 있던 저명인사들을 검거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시킨다. 이때 김진우도 잡혀 들어간다. 이미 68세의 노령인 그는 겨울의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쓸쓸히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일제강점기에 그토록 자주 드나들었던 그 감옥에서 이념을 달리하는 동족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이 또한 새로운 조국의 비극이었다.


황정수 기자(galldada@hanmail.net)

2019.08.13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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