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만 평 언덕에 빼곡히 적힌 이름들의 정체

[여행]by 오마이뉴스

캘리포니아 이름 골짜기(Valley of the Names)


세상에는 특이한 곳이 많이 있다. 특이한 무엇이 있는 곳, 모양이 특이하다거나 빛깔이 이상하다거나, 다른 곳에는 없는 게 있는 등 지구상에는 이상한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있다. 그런 곳 가운데 캘리포니아에 있는 좀 특이한 골짜기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름하여 '이름 골짜기(Valley of the Names)'다.

오마이뉴스

밸리의 입구. 밸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놀라는 것은 벌판이 너무 황량하다는 것이다. ⓒ 이만섭

내가 이곳에 다녀온 건 지난해 3월이다. 이곳을 알게 된 사연은 단순하다.


여행할 곳을 찾기 위해 다른 날처럼 구글 지도를 열고 이곳저곳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찾아낸 곳이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에 걸쳐 있는 피카초 주립 휴양지(Picacho State Recreation Area)다.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나오며 지도를 다시 보는데 이름이 특이한 곳이 표기돼 있었고, 그곳이 바로 이름 골짜기다.


이름 골짜기에 처음 들어서면 놀라는 것은 먼저 그 규모다. 사실 여기가 공식적으로 공원이나 어떤 유적지로 지정된 것은 아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와서 빈 곳 아무 데나 이름을 써놓고 가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이 골짜기인지도 구분이 안 간다. 크기는 대략 1200에이커(약 485만㎡, 146만 평)라고는 하는데 계속 확장되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언덕을 뒤덮은 이름들의 의미

오마이뉴스

드넓은 밸리에 빼곡하게 새긴 이름들. 1200에이커가 넘는 밸리 어디를 가도 빼곡하게 이름이 새겨졌다 ⓒ 이만섭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던 1940년대 미군 훈련소가 이 근방에 있었는데, 이때 훈련받던 군인들이 주변에 있던 돌로 모래 위에 이름을 쓰면서부터 유래했다. 그 당시에는 '낙서 언덕(Grafiti Mesa)'으로 불렸다. 그들이 철수한 뒤에도 이름 쓰기가 계속되면서 오늘날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군인들이 이름을 쓰기 시작한 까닭은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연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외로움 등을 그들의 이름을 써서 달래려 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전쟁을 수행하던 그들의 고된 훈련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오마이뉴스

이름 골짜기라고 해서 이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간간히 하고 싶은 말을 쓰거나 그려놓은 것들도 있다. ⓒ 이만섭

오마이뉴스

낙서도 있다. 이름 골짜기라고 해서 이름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고싶은 말을 써놓거나 그려놓은 것들도 보인다, ⓒ 이만섭

그러나 그 뒤에도 여기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한두 사람도 아니고 무려 1200에이커나 되는 넓은 곳을 빼곡하게 채워나간 그 이름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간간히 이름 옆에 그들의 정체를 드러낼 단서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달랑 이름만 있고, 그 이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줄을 긋거나 모양을 만들어 놓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돌을 하나하나 올려서 쓰는 글씨이다 보니 설명을 못하기도 할 테고, 처음부터 그럴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이런저런 추론을 하다 보면 희미하게나마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그들은 굳이 거기에 쓴 이름이 사람들에게 읽히거나 불리기를 바라고 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자기들만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름을 새겨 넣었을 것이다. 누군가 다른 이들이 와서 읽지 않아도 그 이름이 거기에 있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이름을 새긴 사람과 그 이름의 주인공의 관계에 있을 것이고, 그 관계는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을 것이라는 것도 짐작이 가능하다. 이를테면 자녀 관계, 형제나 자매, 연인, 친구, 그것도 아니면 은밀하게 짝사랑하던 연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여

오마이뉴스

십자가 표식이 있는 이름. 죽은이를 기리기 위해 이름을 새겨놓은 것들도 많이 있다. ⓒ 이만섭

여기에 새긴 수많은 이름들은 여기에 다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름의 상징만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확인하는 그 이름들이 누구이고, 아니면 어떤 의미인지 당사자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면 과연 그들이 보편적으로 실존한다고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일까? 어떤 시인이 와서 이들의 이름을 불러봐도 그들은 나의 어떤 의미도 될 수 없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름을 남기는 곳이 있다. 여행자들이 들락거리는 선술집 벽면에 가득한 낙서들, 그 가운데 특히 이름들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진지한 의미로 이런 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다. 진도의 팽목항에 수없이 나부끼는 깃발들과 이름들과 낙서와 메모들이 그렇다.


이런 행위가 땅에 새긴 이름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그들이 드러내는 상징의 무게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름을 새긴 이들의 참담함과 억울함, 분함과 그리움이 뒤섞인, 말할 수 없는 분노의 외침이라는 점에서 저들이 어쩌면 재미 삼아 새긴 이름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다.

오마이뉴스

이름인지 불분명한 그림. 이니셜을 써놓았는지 이름이 분명하지 않으나, 년도가 있는 것을 보면 출생년도 같기도하다. ⓒ 이만섭

그렇다고 그들이 땅에 이름을 새기는 행위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누군가가 존재했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이곳에 새겨진 이름들은 그저 이름을 새긴 사람들이 무엇인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 하나의 상징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오는 사람들이 그 이름을 보고 새긴 이의 의도를 일일이 파악하진 않는다. 그 글씨가 드러내는 기호와 상징을 읽어내고 상상하다 보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이름이 있고, 그 이름들이 실체로서 존재하는가와는 상관없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곳

오마이뉴스

이름 또는 기호들. 새긴 의도가 불분명한 것들도 있다. 이름같기도 하고, 무슨 암호 같기도 한 이들과 마주하면서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 이만섭

세상에 어떤 조형물이 이만큼 즐거운 상상을 이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복잡한 구조물, 건축물, 조각품, 각종 예술품들이라고 이처럼 다양한 상상을 하게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단순한 작업이 이렇게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살면서 우리는 현실의 문제들에 골몰하다 보면 상상력이 고갈되고 생활은 피폐해지기도 한다. 이럴 때 이런 곳에 한번 획 다녀오면 고갈되어가는 상상력이 되살아날지도 모르겠다. 설령 이런 까닭이 아니라도 바람이라도 쐴 요량으로 다녀오면 기분전환에는 그만일 곳이다.


이곳은 샌디에이고에서 연결되는 프리웨이 8번을 타고 애리조나 유마에서 내려 피카초 로드를 타고 가다보면 만날 수 있다. 들어가기는 애리조나지만 이름 계곡은 윈터헤븐이라는 캘리포니아 지역이다. 좌표는 "32.871181, -114.682405" 이므로 지도에서 찾아보면 된다.


한 가지 주의할 점. 프리웨이서에 내려 들어가는 길은 대부분 비포장 구간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외진 곳이므로 차에 연료 채우고 먹을 물을 준비해 가는 것도 잊지 말자.


이만섭 기자(leemansup@gmail.com)

2020.02.14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Copyright © ZUM internet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