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 당하고, 대중이 외면했던 마네의 그림

[컬처]by 오마이뉴스

의욕과 재기가 넘치던 마네의 쓸쓸하고 아련한 마무리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야기와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림에 대한 이해를 넘어 예술가, 그리고 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인간과 사물, 세상에 대한 그들의 철학과 고민을 엿보고 인간으로서의 좌절, 고통, 자부심, 고집을 조명해보면서 그림이 전달하는 의미와 그 너머 화가의 존재를 인식해보고자 한다.

벨벳 프록코트에 탑햇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거리를 거니는 댄디한 옷차림의 마네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아방가르드한 성향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세상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자꾸만 엇나가는 아카데미와 평론, 대중의 반응에 답답한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렸지만 계속되는 냉대와 거부, 한편으로 아카데미에 반기를 드는 젊은 화가들의 존경 사이에서 마네는 말 그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것이다.


아카데미에서 인정받는 스승의 스튜디오에서 배우고 루브르에서 대가들의 그림을 모사하는 등 그림에 대한 마네의 태도는 전통적인 방식에 가까웠다. 단지, 자신의 그림 속에 그려넣은 인물들이 흔히 전통적인 그림에서 기대할 수 있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당시의 살아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림의 테크닉이 정교하고 세련된 고전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다소 거칠고 투박했을 뿐이다. 하지만 마네는 이러한 대상과 테크닉의 차이가 그리도 엄청난 반응을 불러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살롱 낙선자가 너무 많이 나와 낙선자전을 따로 연 1863년,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1863)이 전시되었을 때 평단과 대중의 반응은 분노에 가까웠다. 라파엘의 원작에 등장하는 한 무리의 인물들에게서 구도와 동작을 따온 이 작품은 옷을 입고 있는 남자 둘과 벌거벗은 여인이 프랑스 파리 근교의 잔디 위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누드의 여성과 옷을 입은 남자들은 조르지오네의 '전원의 합주'(1505-10)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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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점심(1863). 마네 Source: Wikimedia Commons ⓒ 오르셰 미술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네의 그림은 스캔들에 가까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아무리 봐도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여인의 누드는 혼자서 두드러지듯 눈부신 하얀 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하얀 빛 때문이 아니었다. 당돌하게 관람자를 쳐다보고 있는 여인은 감추는 것도 없고 은밀하지도 않으며 부끄러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듯 오히려 뻔뻔하기까지 하다. 아무리 고전 작품의 구도를 빌렸다고는 해도 누구나 아는 배경에,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녀들의,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행태를 굳이 그림으로 보는 일은 민망하면서도 불쾌한 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그림에 대한 적대적인 반응이 놀랍고 당황스럽기만 했다. 고전을 모티브로 했고 그 흔한 누드를 그렸을 뿐인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아예 대놓고 따라 그린 것은 경의를 표하기 위한 화가들의 흔한 방식 중 하나였다. 워낙 실제 모델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마네는 당시 자신의 그림에 주요한 모델이었던 빅토린 뮈랭을 모델로 했고 살아있는 인물의 느낌과 분위기를 순간적으로 포착하고자 디테일을 제거하고 빠르게 그리는 방식을 취했다. 즉, 자신이 생각하기에 알맞다고 여겨지는 대상과 테크닉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인가. 사실 그랬다. 아카데미의 그림이라는 것은 그림의 주제도 주제지만, 그림에 등장하는 대상의 모습과 회화의 테크닉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라는 것은 원래 전통적인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다. 애초에 마네는 이러한 방식을 거부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렸으므로 그것이 아무리 고전을 바탕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고전을 모티브로 함으로써 고전과 아카데미에 더욱 더 반기를 드는 것으로 느껴진 것 또한 마네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재밌는 것은 마네 자신은 자신의 그림이 아카데미와 평단, 대중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리라 기대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자신의 그림이 불러온 반응을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모네는 자신의 그림에 대한 반응에 놀라움과 당혹감을 느꼈다. 마네는 자신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음 번에도 비슷한 그림으로 다시 한번 경악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1865년 마네의 '올랭피아'(1863)가 전시되었을 때 평단과 대중의 반응은 가혹했다. 이 작품은 모티브도 평가도 모든 면에서 '풀밭 위의 점심'을 닮아 있었다. 분명히 어디에서 많이 본 구도였고 흔히 볼 수 있는 누드화였지만 마네의 그림 속 여인은 역시나 용납하기 어려웠다.


이상적인 형상도 아니고 수줍거나 초월한 표정도 아니며 무엇보다 그림 밖 관람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올랭피아는 아름답지도 않고 만만하지도 않았다. 당혹스러움도 잠깐 이내 욕을 퍼부어대거나 그림을 훼손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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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랭피아(1863). 마네 Source: Wikimedia Commons ⓒ 오르셰 미술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를 모티브로 한 이 그림에서 마네는 당시 19세기 프랑스의 비너스를 그리고 싶었던 것일까. 매춘부임에 분명한 그녀는 손님을 맞을 준비를 모두 마친 것으로 보인다. 마침 손님의 도착을 알리며 꽃을 들고 등장한 흑인 하녀는 침대의 하얀 시트와 창백하게 빛나는 올랭피아의 피부색과 완벽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침대 발치에는 티치아노의 그림에 등장하는 충실함을 의미하는 잠자는 강아지 대신 등을 동그랗게 말고 잔뜩 흥분한 검은 고양이를 그려 넣어 다른 그림 찾기의 묘미를 주듯 유머러스하지만, 그밖의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 무엇보다도 도전적이고 노골적인 단적인 예라고 할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고전 작품의 전형적인 장면들은 익숙하기는 하지만 현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기 보다는 이 세상의 것을 뛰어넘는 존재들이나 영웅들로 이루어진 것이 보통이다. 즉, 고전을 고전이게 하는 것은 구도와 동작이 아니라 그들의 이상적인 모습에 있었다. 이를 무시하고 현실의 모습을 투박하게 담아낸 마네의 작품은 따라서 아무리 고전을 모티브로 했다 하더라도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그림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아카데미와 평단에 대한 답답한 심정을 마네는 다음과 같이 피력하기도 했다.

"기다리라고 한다. 무엇을 기다리란 말인가? 심사위원들이 사라질 때까지? 대중과 직접 담판을 짓는 편이 낫다. 사실 내가 하려는 것은 남들이 나의 적으로 만들어놓은 대중과 화해하려는 것이다. … 나는 언제 어디서나 재능을 알아보고 인정하려는 것일 뿐 전통적인 그림을 전복하거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네의 바람과는 달리 대중들 또한 그의 그림을 이해하기는커녕 좋아해주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인상주의자들의 전폭적인 존경과 지지를 받으며 그들만의 리그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해서 현실의 대상과 투박한 테크닉을 절대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비록 누드를 그리는 일은 이 정도에서 그만두었지만 카페가 되었든, 강가가 되었든, 길가가 되었든 눈에 보이는 대상을 요점만을 파악해 빠르게 스케치하듯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마네는 유난히 정물의 표현에 공을 들이고 실제로 정물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그렸다. 그리고 그의 그림 한 켠에는 언제나 정물이 등장했다. 말년에 다리에 괴저가 생겨 제대로 걷지도 못할 때 파리 근교에서 요양을 하면서 그린 그림들도 대부분 꽃을 대상으로 한 정물화였다. 병문안을 오면서 가져온 꽃들을 그림에 담아내곤 했던 마네는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한편으로는 곧 지고 말 꽃처럼 인생의 무상함을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나 마네의 사랑은 파리의 거리에 있었다. 멋지게 차려입고 탑햇에 지팡이를 들고 거리를 거닐며 사람들을 보고 카페에 앉아 주변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몸이 호전되면 파리로 돌아와 어김없이 밖으로 나갔던 마네는 결국 병이 악화돼 죽기 1년 전 그린 카페 그림을 마지막 걸작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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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베르제르 바. 마네 Source: Wikimedia Commons ⓒ 코톨드 미술관

'폴리베르제르 바'(1882)는 카페 직원이 바에서 멍하니 서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그림 속 그녀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인지, 아니면 몽상에 잠긴 것인지 애매하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뒷모습과 한 남자의 모습을 통해 그녀가 혼자서 한가로이 있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시공간을 초월해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듯하다. 마치 모든 것이 아련한 꿈인 듯, 자신이 발딛고 있지만 왠지 자신이 속한 곳은 아닌 것처럼, 지쳐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미련이 남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오른쪽 아래에 자리한 생생한 오렌지와 사과, 정교하게 그려넣은 술병들을 보면서 이것이 꿈이 아님을, 모든 것이 현실임을 깨닫게 된다. 단지 그녀 혼자서만 아련한 것임을, 그녀를 제외한 모든 것은 어김없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돌아갈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여전히 하고 싶은 것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고, 그리고 싶은 것도 많았던 마네의 마음이 아프게 다가온다.


이준희 기자(ljuneh@naver.com)

2020.03.1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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