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사는 나, 이런 장면이 힘이 될 줄 몰랐습니다

[컬처]by 오마이뉴스

영화 <엑시트>

"난 요즘 내가 무슨 재난 영화 속에 들어와 살고 있는 것 같아."

자신들도 힘들면서 "대구는 엄청 심각하다는 데 괜찮냐"고 안부를 물어오는 지인들에게 나는 이렇게 답하곤 했다. 정말 그랬다. 내가 살고 있는 대구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만 해도 나는 마치 영화를 찍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겪고 있는 상황들이 현실이 아닌 것 같았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현실 속 나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이의 등교가 미뤄지고, 재택근무 기간이 연장되고서야 현실감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건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루에도 수십에서 수백 명이 병에 감염되고 수많은 이들이 감염된 병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나의 현실 속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지금 재난의 한 가운데를 살고 있었다.


문득, 지난 여름 개봉했던 영화 <엑시트>가 떠올랐다. 무섭고 심각한 다른 재난 영화들과 달리 재난 상황을 코믹하게 그려낸 영화라는 점에서 마음이 갔다. 지금의 재난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순간을 찾게 해 줄 것만 같았다. 오랜 반자가격리 생활로 지치고 답답한 마음에 활력을 얻어보고자 영화를 다운받았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냥 웃어넘겨지지 않았다. 영화의 장면들이 자꾸만 지금 내가 겪는 현실과 겹쳐졌다.

위기상황서 드러나는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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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용남은 집안의 천덕꾸러기이다. ⓒ CJ엔터테인먼트

용남(조정석)은 집안의 천덕꾸러기다. 대학 졸업 후 백수로 지내는 그를 초등학생 조카조차 부끄러워한다. 누나 정현(김지영)은 어머니 칠순 잔치를 앞두고 "내세울 게 없으면 깔끔하게라도 가야 할 거 아니야"라며 용남을 마구 때려댄다. 누구도 그를 '귀한 사람'으로 대해주지 않고, 용남은 늘 풀이 죽어 지낸다. 가족들이 모두 모인 어머니의 칠순 잔칫날도 용남은 걱정해주는 척 무시하는 친척들의 반응에 주눅들 뿐이다.


칠순 잔치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려던 순간. 도심 한복판에 유독가스 물질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러자 가족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이제 어떤 회사에 다니는지, 결혼 상대는 있는지, 회사에서 일이 잘 풀리는지 따위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용남이 함께 있는 것, 그리고 가족 모두가 함께 살아남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서로의 존재 자체에 감사하며 가족들은 힘을 모은다. 물론, 그 안에도 혼자만 살기를 바라는 점장같은 사람도 있긴 하지만, 이들의 얍삽함은 서로를 위하는 가족들의 마음에 그 힘을 잃는다.


용남이 의주(윤아)와 둘이 남아 사투를 벌일 때, 가족들은 마음을 졸이며 용남을 응원한다. 용남이 부끄러워 친구들에게 '모른다'고 했던 조카도 "우리 삼촌 살려주세요"를 외치며 눈물 짓는다.


아마도 이것이 진심 아니었을까? 평소엔 눈칫밥만 먹던 용남도 실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아들, 삼촌, 동생, 그리고 조카였던 것이다. 마침내 용남이 구조되고 가족들과 다시 만났을 때, 가족들은 더 이상 용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재난은 서로의 소중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코로나 사태가 터진 후 걸려오는 가족들, 지인들, 친구들의 안부 전화는 늘 곁에 있어서 잘 몰랐던, 혹은 잠시 잊고 지냈던 사람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했다. 평소에는 간섭이라 여겨져 피하고 싶었던 집안 어른들의 걱정하는 마음도 이제는 고맙게 느껴진다. 용남이 재난을 통해 가족들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듯, 코로나 사태는 나를 사랑해주는 이들의 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어주고 있다.

연결되지 않으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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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남과 의주는 탈출을 위해 서로를 연결한 밧줄에 의지한다. ⓒ CJ엔터테인먼트

가족들이 먼저 구조된 후 용남과 의주는 다른 헬기가 곧 올 것이라는 구조대원의 말을 믿고 기다리지만, 결국 헬기는 오지 않는다. 가스는 점점 차오르고 용남과 의주는 살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건물에서 건물로, 다시 옥상으로. 그렇게 유독가스를 피해 구조될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계속 이동한다.


그런데 용남과 의주가 대피를 위해 의지하는 도구는 단 하나 굵은 밧줄 뿐이다. 건물과 건물을 건널 때도 밧줄을 이용해 건너가고 높은 곳에 오를 때도 밧줄 하나에 몸을 의지한다. 밧줄은 이들에겐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용남과 의주는 밧줄로 서로를 잇는다. 서로의 허리를 밧줄로 감아 연결하고, 일정한 거리 이상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밧줄이 허락하는 거리만큼만 간격을 두고,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며 마침내 원하는 곳에 오르고, 구조를 받는다.


만일 둘이 연결되지 않았더라면, 홀로 남겨졌더라면 어땠을까? 탈출하기 시작했을 때 용남이 방독면을 찾으러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던 잠시 동안 홀로 남겨진 의주는 "무서워, 어디 간 거야" 라며 울부짓는다. 아마 용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과 의주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그 상황에서 탈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국가 전체가 (아니 전 세계가) 재난이나 마찬가지인 지금의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때문 아닐까? 자신의 전문분야를 살려 힘든 이들을 도우려고 나서는 재능기부자들, 더 힘든 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십시일반 모아 보내는 물품들, 마스크 착용과 손씻기 등 예방수칙들을 다 함께 지키는 마음들.


서로를 위해 불편을 감수하고 배려하며 함께 하는 이런 마음들은 든든한 연결감을 선사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는 손길들은 용남과 의주가 의지했던 밧줄처럼, 지금 이 시기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고 있다.

생명을 대하는 자세

한편, 영화 속 재난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생명의 가치에 대해 돌아보게 했다. 먼저 구조대원들의 자세다. 용남의 가족들을 구조한 후 구조대원들은 용남과 의주에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저버린다. 단 두 명을 구조하는 것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용남과 의주 역시 두 명뿐인 우리는 버림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네킹까지 동원해 많은 수의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는 시도를 한다.


더 많은 사람이 구조되는 게 좋은 일이긴 하다. 하지만 용남과 의주의 생명은 다수를 위해 희생돼도 괜찮은 생명이었던 걸까. 결코 아닐 것이다. 그 누구의 목숨도 다른 누구의 것보다 가치가 덜하다 할 수 없다. 다수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아닌 한 명이라도 더 구한다는 마음으로 구조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영화 속 시민들이 용남과 의주의 탈출장면을 대하는 태도였다. 시민들은 드론에 비친 용남과 의주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도 구조를 요청하고 적극적으로 돕기보다는 마치 게임보듯 지켜보기만 한다. 물론 시민들이 띄운 드론들이 이들의 위치를 알리고, 탈출에 도움을 준 면도 있었다. 하지만, 드론 중계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마치 재미있는 게임을 보거나 아슬아슬한 스포츠 중계를 보는 듯했다. 게다가 영화 속 일부 공무원들은 구조를 두고 실적 경쟁을 하기도 한다.


이런 장면들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했다. 코로나 발생 초기 한 명 한 명의 감염에 속상해했던 마음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건 아닌지, 확진자와 사망자 수에 대한 보도가 이젠 그냥 숫자로만 느껴지는 건 아닌지, 슬픔에 무뎌지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또한,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는지를 따지면서 경쟁의 도구로 이 상황을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뉴스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어딘지 씁쓸한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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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만 남겨진 용남과 의주는 많은 수로 보이기 위해 옥상에 마네킹들을 설치해놓고 구조를 요청한다. ⓒ CJ엔터테인먼트

영화 초반 용남은 선배와 술을 마시다 긴급재난문자를 받는다. "또 지진이네, 우리동네 아니어서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용남에게 선배는 "넌 니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냐? 너 지금 재난 속에 있어, 지진 쓰나미 그런 거만 재난이 아니라 우리 상황이 재난 그 자체라고"라고 일갈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내게도 긴급재난문자 한 통이 왔다. 집회금지, 모임금지, 실내 체육시설 이용금지, 마스크 착용 등 재난 시 생활수칙을 알려왔다. 조금씩 확진자 수가 줄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재난상황 속에 있다.


내가, 내 가족이 감염되지 않았다 해서 '다행'이라 여기거나 확진자 수가 줄었다고 해서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안도했던 용남에게 진짜 재난이 닥쳤듯, 방심하는 순간 재난은 몸집을 더욱 키울 것이다. 지금 다 함께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사회적 거리두기'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철저하게 위생관리를 하며, 사람들과 만남을 자제하고, 적정한 거리를 두고 생활하는 것. 예외 없이 함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심리적 연결은 더 깊게 유지해야 할 것이다. 몸이 멀어진다고, 자주 만나지 못한다고 심리적 연결마저 사라진다면,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견뎌낼 힘을 잃을 것이다. 용남과 의주가 살아남은 비결은 '연결'이었음을 잊지 말자.


전화나 메시지, SNS를 활용해 서로의 안부를 묻고, 무너진 일상을 위로하는 것은 재난을 이겨내는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생명의 가치를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는다면 아무리 강력한 바이러스도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가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송주연 기자(serene_joo@naver.com)

2020.04.0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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