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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안치용의 테크 인 시네마

트렌치 코트의 애수 이전에 병사들의 휴먼테크가 있었다

by오마이뉴스

< 1917 >


'테크인시네마'는 영화평론가이자 인문학자인 안치용 한국 CSR연구소장이 영화에서 드러난 '테크'의 동향과 의미, 문명사적 향배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영화 속 '테크'와 영화를 만드는 데 동원된 '테크'를 함께 조명하여 영화와 '테크'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모색합니다.


<애수>는 1940년 개봉된 로맨스 영화로 영화사의 한 장을 장식한다. 원제는 'Waterloo Bridge'. 영국 런던의 워털루 다리를 중심으로 펼쳐진 이루지 못한 사랑을 그렸다. 시대배경은 1차ㆍ2차 세계대전이 겹쳐진다.


<애수>와 관련된 많은 얘기 중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두 주연배우 로버트 테일러와 비비언 리가 빗속에서 포옹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의류나 패션업계에서도 많이 인용하는데, 그때 테일러가 입은 의상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테일러가 입은 겉옷이 트렌치코트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토머스 버버리가 영국 육군성의 승인을 받고 레인코트 용도로 이 트렌치코트를 개발한 연유로 버버리 코트라고도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트렌치코트를 논하면 곧 바로 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1차 세계대전에 붙은 별칭 가운데 'the Great War'가 있는가 하면 '참호전'도 있다. 참호(trench)전이야말로 1차 세계대전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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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트렌치 코트' 하면 인용되는 유명한 장면 ⓒ 애수

국내에서 지난 2월에 개봉된 영화 < 1917 >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 1917 >의 전언이 무엇인지는 잠시 제쳐두고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며 주목한 것은 참호였다. 1918년 종전을 앞두고 개봉된 찰리 채플린의 영화 < 어깨총(Shoulder Arms) >은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참호전의 실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실상'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불가피하게 반전(反戰)영화가 되었다.


< 1917 >은 반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고, 참호전에 집중하지 않았지만 이 영화에서 참호는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참호의 의미에 관한 논의는 생략하자. 세트장으로서 참호는 크게 3곳으로 나뉜다. 출발지점의 영국군 참호, 경과지점의 버려진 독일군 참호, 도착지점의 다른 영국군 부대의 참호.


전쟁에 참호가 등장한 시기는 고대로 올라가지만, 지금과 같은 참호는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멀리서도 위력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는 현대식 화기가 출현한 반면 보병들이 그런 공격을 막아낼 효율적인 수단이 없었기에 엄폐목적의 참호를 파기 시작하면서이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근대 유럽의 전쟁을 다룬 영화를 보면 양측이 평지에서 밀집대형을 취한 채로 총기를 발사했다. 화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명중률 또한 떨어졌기에 그런 공격대형을 취했지만, 1차 세계대전기에 그런 식으로 공격했다가 전멸당하고 만다.


대치하는 양측은 서로 참호를 파고 들어가 가끔씩 무모하게 돌격해오는 적을 참호 안에서 총을 쏴서 해치울 수 있었다. 이후 전쟁무기가 발전하고 화력 또한 막강해지면서 참호전의 중요도는 낮아지게 되지만 1차 세계대전에선 참호 밖의 전투는 막대한 병력손실을 의미했다. 참호전에선 수비자가 공격자보다 우위에 설 수밖에 없기에 독일군과 연합군 모두 일단 최대한 많은 참호를 구축하는 데 전념했다.


영국군 병사 '스코필드'(조지 맥케이)와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가 휴식하고 있다가 장군에게 불려가는 장면에서 참호가 나온다. 꽤 깊게 파져 있고 아래에는 토사의 붕괴를 막기 위해 나무판자로 벽을 둘러싸 옹벽 비슷한 기능을 수행한다. 곳곳에 흙이나 모래를 넣은 마대자루를 쌓아올린 임시구조물을 볼 수 있다. 참호의 견고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콘크리트를 타설하기도 하는데, 콘크리트가 들어간 견고한 형태의 참호는 스코필드와 블레이크가 도착한 독일군 진영에서 볼 수 있다. 독일군 참호가 훨씬 깊고 더 견고하고 정교한 느낌을 준다.


참호를 만들 때 폭발이나 총격 같은 전장의 위험으로부터 보병들을 보호할 수 있다면 어떤 재료든 사용된다. 전쟁이란 긴급한 상황에서는 FM대로의 참호를 만드는 게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창의적인 해법이 동원될 수 있다. 병사의 안전을 지키고 참호의 무너져 내림을 방지하면서 내구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임시방편이 동원되지만 돌이나 바위를 쓰는 것은 금지된다. 적군의 포탄이 참호에 떨어졌을 때 돌이나 바위가 산탄처럼 비산해 아군에게 추가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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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17> ▲ 영화 <1917>에 나오는 독일군 참호 ⓒ 영화 <1917>

참호는 위에서 봤을 때 구불구불하고 복잡하게 짓는다. <1917>에서 독일군 참호처럼 깊이 팔수록 좋지만 그러려면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 1917 >에서 스코필드가 갖은 고초를 극복하고 도착한 '매켄지' 중령의 부대 1600명의 영국군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곳도 참호였다. 영화 제작진의 정교한 노력 때문이겠지만 그곳의 참호는 새로 건설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흙이나 모래를 채운 마대자루로 만든 구조물이나 나무옹벽, 콘크리트 등이 보이지 않는다. 참호의 벽면엔 야전삽으로 긁어낸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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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17> ▲ 영화 <1917>의 마지막 참호 ⓒ 영화 <1917>

보일 듯 말 듯 한 야전삽의 흔적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높인다고 할 때 영화 초반에 보여준 참호바닥의 진흙탕 또한 사소하지만 역사적 고증을 거친 것이었으리라. 참호 안은 대체로 생명을 지키는 데는 유리했지만 건강을 지키는 데는 그렇지 않았다. 참호 바닥엔 항상 물이 차올라서 거의 군화를 신고 지내야 하는 군인들이 '참호족'(Trench Foot)이란 병에 걸리곤 했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면 발을 절단해야 했다고 한다. 우아한 트렌치코트 밑엔 끔찍한 '트렌치푸트'가 있었던 셈이다.


아무튼 1차 세계대전에 병사로 참가한 많은 젊은이들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구조물을 땅에다 만들었는데, 그것이 참호이고 참호를 만드는 데 동원된 장비는 단 하나 야전삽이었다. 야전삽을 움직인 동력은 병사의 손이었다. 참호기술은 휴먼테크였던 셈이다.


안치용 기자(carmine.draco@gmail.com)

덧붙이는 글 | 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안치용의 시네마 인문학'(https://blog.naver.com/ahnaa)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