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왜곡? 흥선 대원군은 막가파가 아니었다

[컬처]by 오마이뉴스

[사극으로 역사읽기] TV조선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


TV조선 <바람과 구름과 비>의 최근 방송분은 고종 즉위 이후의 상황을 다루면서 흥선대원군 이하응(전광렬 분)의 인상적인 변신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방영분에 나타난 대원군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폭군 그 자체다.


아들의 권세를 등에 업은 드라마 속의 대원군은 평소에 경계했던 유력자들의 기를 꺾거나 망신 주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안동(장동) 김씨 좌장인 김좌근(차광수 분)의 생일 잔치에 가서 독이 든 음식을 먹은 것처럼 연기하며 쓰러지더니, 결국 김좌근의 사죄와 2선 퇴진 약속을 받아낸다.


또 역술가로서 고종의 왕위 등극을 도왔지만 아무리 봐도 역술가로 만족하고 살 것 같지 않은 주인공 최천중(박시후 분)도 짓밟아 놓는다. 최천중을 암살하려 했을 뿐 아니라 그가 유민(유랑민)들과 함께 거주하는 주택 단지를 부수고 파괴한다. 최천중의 연인이자 무녀인 봉련(고성희 분)도 자기 집에 가둬놓고 정치적으로 활용한다.

특정 인물 깎아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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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조선 드라마 한장면. ⓒ TV조선

그에 더해, 상당히 거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내가 최고'라는 것을 마치 광고라도 하듯 권력을 무절제하게 남용한다. 조정 회의장에서도 임금과 신하들 앞에서 명령하듯 자기 의견을 쏟아낸다. 또 자기와 고종이 '지시'를 내리고 받는 관계임을 명확히 한다. 임금을 신하 다루 듯 하고 있는 것이다.


또 자기 아들을 왕으로 추대해준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조 대비, 김보연 분)에 대해서도 상당히 난폭하게 행동한다. 공식 석상에서도 신정왕후를 무시하고 무안을 준다.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신정왕후한테 배은망덕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사극들도 흥선대원군의 섭정 권력을 상당히 '강력하게 묘사했다. 그래서 위와 같은 대원군의 이미지가 <바람과 구름과 비>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 드라마는 기존 드라마의 대원군 묘사 방식을 답습하면서도, 그를 좀 더 강력하고 난폭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묘사 방식은 역사적 실제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우선, 조 대비를 함부로 다룬다는 설정부터가 그렇다.


흥선대원군의 섭정 기간에 안동 김씨뿐 아니라 풍양 조씨도 어느 정도 제어됐다. 과거의 세도가문들이 이 시기에 어느 정도 억제된 것이다. 그래서 순조·헌종·철종 시대에 나타난 왕권 무력화가 사라지고 주상의 권위가 되살아나는 양상이 이 시기에 나타나게 됐다.


군주권 강화로 인한 수혜를 고종이 아니라 대원군이 받기는 했지만, 이 당시에는 세도가문이 약해지고 왕권이 강해지는 흐름이 나타났다. 그렇기 때문에 풍양 조씨의 일원인 신정왕후의 입장에서 보면, 대원군의 섭정이 자기 가문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만했다.


이처럼 결과적으로는 대원군이 신정왕후에게 큰 이익을 주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원군이 드라마에서처럼 신정왕후에게 적대적 태도를 드러낸 것은 아니다. 아니, 그럴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대원군의 섭정 권력 자체가 신정왕후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이 즉위 당시 12세였기 때문에, 대왕대비인 신정왕후가 수렴청정(대리통치)에 착수했다. 신정왕후는 고종을 죽은 남편인 효명세자(추존왕 익종)와 자신의 양자로 입적한 뒤 고종을 왕으로 만들고 자신이 수렴청정을 했다. 그런 뒤 자신의 수렴청정 권한을 떼내어 흥선대원군에게 섭정 권한을 부여했다.


이 구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정왕후는 고종의 법적 어머니였다. 또 대원군이 행사하는 섭정 권한의 모태가 된 인물이다. 그래서 고종한테는 법적 어머니이고 대원군한테는 정치적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이 관계가 부정되면, 고종의 정통성은 물론이고 대원군의 섭정 권한도 위태해질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속 대원군은 이 구도를 무시한 채 신정왕후를 노골적으로 깎아내리고 있다. 거기다가 면전에서 망신까지 주고 있다. 대원군이 '정치적 저능아'였음을 전제로 하는 장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대원군의 섭정 시기에 신정왕후의 권위가 별로 훼손되지 않았다는 점은 신정왕후를 전문적으로 다룬 논문에서도 나타난다. 2008년에 <한국인물사연구> 제10호에 실린 역사학자 임혜련의 논문 '19세기 신정왕후 조씨의 생애와 수렴청정'은 대원군 섭정 시기에 신정왕후가 신하들의 업무보고인 차대(次對)와 신하를 불러 만나는 소견(召見)을 통해 국정 운영에 적극 참여했다고 말한다.


"신정왕후는 수렴청정기에 차대와 소견을 통해 정국을 운영하였다. 신정왕후는 차대에서 주도적으로 하교를 내려 정치에 참여하였다. 소견에서는 지방관이나 사신 이외에도 기존의 관료들과 국정을 운영하였다. 이를 통해 공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주도적으로 정치를 이끌어 갔다."


공식적으로는 신정왕후의 권력이 대원군의 권력보다 위에 있었으므로, 외형상으로는 신정왕후가 정국을 주도하는 것처럼 비쳐졌다. 드라마에서처럼 신정왕후의 권위가 크게 훼손됐다면,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대원군의 국정 운영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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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조선 의 한 장면 ⓒ TV조선

대원군이 조정 회의장에서 위세를 부리고 권력을 노골적으로 과시하며 자기 마음대로 국정을 이끌어가는 드라마 장면 역시 실제 현실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임금의 법적 아버지가 아닌 생부가 섭정 권한을 행사하는 일이 초유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원군 자신도 조심스럽게 권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람과 구름과 비> 속의 장면들은 이런 현실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부의 섭정이 종전에 없었던 일이므로, 대원군은 새롭게 시스템을 만들어 가면서 조심스럽게 권한을 행사해야 했다. 상황에 맞춰 형태를 변모시켰기 때문에 대원군의 섭정 시스템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소 변모하는 양상을 보였다. <바람과 구름과 비>가 다루는 초기 섭정 때 대원군이 이용한 시스템은 기존의 종친부와 의정부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왕족 사무를 관장하는 종친부는 권력을 행사하는 기구가 아니었다. 대원군은 바로 이 기구를 활용했다. 종친부에 집무실을 마련한 뒤 이 기구를 기반으로 의정부에 지시를 내리는 형식으로 그는 국정 운영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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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당시의 종친부 건물. 서울시 종로구 정독도서관 구내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공동 수반으로 하는 의정부는 고종 즉위 당시에는 힘이 없었다. 국가안전보장회의와 비슷한 비변사가 의정부를 대신해 실질적 최고 국가기관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대원군은 비변사가 갖고 있던 권한들을 의정부로 이관시키는 방식으로 의정부의 힘을 되살려놓았다.


종친부에 기반을 둔 대원군이 의정부의 옛날 위상을 회복시킨 것은, 종친부는 행정기관이 아니라서 이 기구만으로는 행정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 기관인 의정부를 이용하지 않고는 국가 행정에 간여할 수 없었기에 의정부를 강화시켰던 것이다.


그가 비변사의 권한을 의정부로 이관시킨 데는 또 다른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비변사가 기득권층인 노론당의 안방 같은 공간이 돼 있었기 때문이다. 기득권층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의정부를 되살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랬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이 국가행정의 일선에 직접 나서는 양상은 출현하지 않았다. 그의 지시는 종친부를 거치고 의정부를 거쳐 국가행정에 반영됐다. 드라마에서처럼 대원군의 의지가 곧바로 행정에 반영되는 구도는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대원군의 거점인 종친부는 권위는 있지만 실질적 힘은 없었다. 이런 기구를 앞세워 의정부를 조종하고 정부를 움직이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원군은 신정왕후의 지원 하에 종친부를 강화시키고 종친부 사람들을 의정부에 배치하는 방법을 구사했다.


역사학자인 김병우 대구한의대 관광레저학부 초빙교수가 2005년에 <대구사학> 제80집에 기고한 '대원군의 통치체제 확립과 통치정책'은 대원군 섭정 초기의 권력 시스템 구축 과정을 이렇게 요약한다.


"신정왕후는 종친부의 체제 정비와 권력기구화에 필요한 재정을 지원하였고, 대원군은 종친부와 종부시를 합부(合府)하였다. 종친부는 2품 이상의 종친들을 교정당상(校正堂上)으로 조직하였고, 대원군은 종정경 체제를 신설하여 정치세력화하고 의정부에 배치하였다. 이들은 군정과 재정을 장악하면서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독자적인 군사력이나 경제력 혹은 정치세력을 기반으로 권력을 잡은 인물이 아니었다. 왕실에 남자 후계자가 별로 없어서 자기 아들이 왕이 되고, 이 덕분에 섭정 권한을 행사하게 된 인물이다. 자기 역량이 아닌 시스템 덕분에 최고 권력자가 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기존 시스템을 존중하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기존 시스템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정부기관들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의 안동 김씨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형식상으로라도 군주권을 존중하고 정부 시스템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은<바람과 구름과 비>에서처럼 막가파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는 없었다.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정부 조직을 바꾸더라도 기존 시스템을 최대한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 역시 기존의 것들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김종성 기자(jkim0815@naver.com)

2020.07.2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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