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사람들은 '수호신 거북'을 어떻게 지켰을까?

[컬처]by 오마이뉴스

[한국의 유물유적] 보물 제109호 ‘(전)성거사지오층석탑’

오마이뉴스

▲ 1961년에 대한민국 보물 제109호로 지정된 ‘(전)성거사지오층석탑’ ⓒ 임영열

먼 옛날부터 광주 사람들은 동쪽의 무등산과 함께 서쪽에 있는 '성거산(聖居山)'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며 살았다. 커다란 거북 모양을 하고 있는 성거산의 상서로운 거북이 광주를 수호하고 있다고 믿었기에 옛사람들은 이곳을 '성소(聖所)'로 삼았다.


산의 모습이 마치 커다란 거북이 한 마리가 머리를 들고 북서쪽을 바라보는 형상을 취하고 있어 '성구강(聖龜岡)'이라고도 불렀다. '성스러운 거북이가 살고 있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도 동네 이름을 거북 '구(龜)'자를 써서 '구동(龜洞)'이라고 부르고 있다.

오마이뉴스

▲ 먼 옛날 광주사람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성거산은 사라지고 광주광역시 제 1호 공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의 명암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광주공원.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에 자리하고 있다 ⓒ 임영열

세월이 흘러 거북의 정기가 서려있는 성스러운 언덕은 사라지고 광주광역시 제1호 공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에 있는 '광주공원'의 옛이야기다.


광주사람들의 성소, 성거산은 일제시대를 거치며 대부분 망가졌다. 거북의 등은 처참하게 파헤쳐지고 그 자리에 일본인들의 신사(神社)와 그들의 왕을 위해 목숨 바친 전몰자들을 기리는 충혼탑을 세웠다. 신사를 성역화하기 위해 일본 본토에서 공수해온 일본산 나무를 심어 향토 수종의 씨를 말려 버렸다.

오마이뉴스

▲ 해방과 동시에 일본 신사는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 6·25 한국전쟁 당시 목숨을 잃은 호국 영령들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한 현충탑이 들어섰다 ⓒ 임영열

해방과 동시에 일본 신사는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 6·25 한국전쟁 당시 목숨을 잃은 호국 영령들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한 현충탑이 들어섰다. 1960~1970년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가 높았던 광주공원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명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1980년 5·18 때 시민군들이 부대를 편성하고 훈련을 했던 5·18 사적지와 4·19 희생자를 기리는 '희생영령추모비'가 자리하고 있다. 한국 시문학파의 창시자, 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의 '쌍시비'도 사이좋게 나란히 서있다. 구 한말 의병장이었던 '심남일 순절비'가 우뚝하고, 친일파 윤웅열·이근호· 홍난유의 비석이 뽑힌 채 누워있는 '사적비군'도 공원 안에 있다.

오마이뉴스

▲ 광주공원에는 한국 시문학파의 창시자, 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의 ‘쌍시비’도 사이좋게 나란히 서있다. 영랑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 까지는’과 용아의 대표작 ‘나 두 야 간다’가 새겨져 있다 ⓒ 임영열

오마이뉴스

▲ 광주공원 ‘사적비군’에는 친일파 윤웅열, 이근호, 홍난유의 비석이 뽑힌 채 누워있다 ⓒ 임영열

광주의 수호신, 거북을 지켜라

우리 근현대사의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광주공원에는 옛 광주 사람들이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겼던 '성구강(聖龜岡)'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그려볼 수 있는 특별한 보물이 하나 숨겨져 있다.


공원 정문에서 우측을 도로 따라 오르면 곧장 심남일 의병장 순절비가 나오고 그 아래쪽으로 눈을 살짝 돌리면 균형이 잘 잡힌 8등신의 늘씬한 석탑이 나뭇잎 사이에 살짝 가려 있다. 한 발짝 내려가면 웅장하면서도 세련된 5층 석탑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팝업창처럼 툭 튀어나온다. 대한민국 보물 제109호 '(전)성거사지오층석탑' 이다.

오마이뉴스

▲ 광주를 지켜주는 거북이 목에 세워진 보물 제109호 ‘(전)성거사지오층석탑’ ⓒ 임영열

광주의 서쪽에 있다 하여 한동안 '서오층석탑'이라 불렀다. 조선 전기에 발행된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산현 편에 따르면 '성거산에 성거사(聖居寺)가 있다'라는 짧은 기록만 있을 뿐, 성거사가 언제 창건되었고 폐사되었는지 그 내력은 알 수가 없다. 이 기록과 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근거로 '(전)성거사지오층석탑'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전설에 따르면 광주의 수호신, 거북은 광주 도심 쪽 광주천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형국인지라 거북이 천변 물길을 따라 떠날까 봐 항상 마음을 졸이며 살았다. 상서로운 영물(靈物)이 떠나버린다면 광주는 더 이상 발전이 없을 거라 생각한 사람들은 거북이 성거산을 떠나지 못하게 할 묘안을 짜냈다.


거북의 목덜미에 해당하는 부분에 '성거사'를 창건하고 무거운 5층 석탑을 세워 거북의 목을 눌렀다.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 덕분에 거북은 성거산을 떠나지 않고 광주를 지켜줘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 믿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지금도 광주는 거북이가 머리를 향하고 있는 북서쪽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 광주를 지켜주는 비보사찰 성거사의 유일한 유물인 오층 석탑은 10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상륜부가 없어진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양호한 상태다 ⓒ 임영열

안정감과 세련미가 돋보이는 고려 초기의 석탑

광주를 지켜주는 비보사찰 성거사의 유일한 유물인 오층 석탑은 10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상륜부가 없어진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양호한 상태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건립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기단부에 있다. 신라시대 석탑은 2층 기단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단층 기단으로 간략화되고 기단이 높아지는 특징을 보인다. 기단의 좌우에 우주를 돌출시켜 입체감을 표현하고 있다.


1층 탑신은 여느 탑들과는 다르게 여러 개의 부재를 사용했다. 옥개석은 칼로 자른 듯 정교하게 다듬어졌으며 모서리를 위로 살짝 쳐들어 곡선미를 강조했다. 높이 7m의 오층 석탑은 상층부로 올라 갈수록 지붕돌과 탑신의 줄어드는 비율이 크지 않아 실제보다 높고 웅장하게 보이면서 안정감과 세련미가 돋보인다.

오마이뉴스

▲ 신라시대 석탑은 2층 기단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단층 기단으로 간략화되고 기단이 높아지는 특징을 보인다 ⓒ 임영열

광주를 지켜주고 있는 거북의 목에 세워진 '(전)성거사지오층석탑'은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만행을 겪으면서 그 존재 가치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1961년에 대한민국 보물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7월 해체 복원하면서 2층 탑신부 중앙에서 탑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금동 사리갖춤'이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사리장엄구는 화려한 금동 전각형으로 4면에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탑신부를 열면 기단의 네 모서리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세워져 있고 가운데 연꽃 받침 위에 '은제 사리함'이 놓여 있다. 지붕에는 화려한 꽃과 풍경을 걸어 놓았다. 고려시대 금속공예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사리장엄구 주위에서 동경과 사경, 옥류도 함께 발견되었다.

오마이뉴스

▲ 1961년 7월 해체 복원하면서 2층 탑신부 중앙에서 탑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금동 사리갖춤이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고려시대 금속공예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사리갖춤은 국립광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국립광주박물관

문서로 기록된 확실한 사료(史料)는 없지만, 이 같은 유물들을 종합해 봤을 때 고려 초기 이 지역에 불교를 기반으로 한 상당한 실력의 호족 세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국립광주박물관에 가면 석탑의 건립 시기와 당시 찬란했던 금속공예 예술 수준을 증언하고 있는 높이 15cm의 황금빛 사리장엄구를 볼 수 있다.


임영열 기자(youngim1473@hanmail.net)

2020.08.05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Copyright © ZUM internet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