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 켜는 안전 램프, 주간주행등의 역사

주간주행등은 안전을 위해 낮에 켜는 등입니다.

자동차에는 여러 종류의 조명이 탑재됩니다. 대표적 기본 조명인 전조등(헤드램프)과 후미등(테일램프), 방향지시등, 안개등 따위가 대표적이고, 세세하게는 실내에 설치되는 맵램프(독도등), 룸램프(실내등)와 각종 계기 및 조작 장치에 들어오는 조명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최근에는 화려함을 더해주는 앰비언트 조명이 트림이나 송풍구, 발 밑에 들어오는 경우도 많은데요.


이처럼 다양한 조명들 중 비교적 최근에야 보편화된, 하지만 안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간주행등(Daytime Running Lamp, DRL)입니다. 주간주행등은 말 그대로 주간(낮)에 주행할 때 켜지는 등화류입니다. 요즘 신차의 헤드램프나 범퍼 주변에서 한낮에도 환하게 빛나는 것이 바로 주간주행등입니다.


왜 굳이 한낮에도 켜지는 조명을 달았을까 의아한 분들도 있을텐데요. 이 새삼스러운 조명은 사실 더 안전한 도로를 만들기 위해 탄생했습니다. 오늘은 안전을 위해 한낮에 켜지는 특이한 조명, 주간주행등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백야 시기의 북유럽 하늘은 이렇습니다. 자연스럽게 주간주행등의 필요성이 논의됐습니다.

헤드램프가 자동차의 기본 장착품이 된 건 1910년대의 일이지만, 주간주행등의 역사는 그보다 한참 뒤인 1970년대에서야 시작됐습니다. 처음으로 주간주행등 도입 논의가 이뤄진 건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등이 위치한 북유럽 지역이었습니다.


북유럽 지역은 여름철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이 일어납니다. 해가 종일 떠 있으니 헤드램프를 켤 필요가 없을 것 같지만, 고위도 지역의 특성 상 백야 기간에는 밝은 햇살이 내리쬐지 않고 어스름한 여명 내지는 노을 같은 빛이 듭니다. 반대로 겨울철에는 극야 현상이 발생해 한낮에도 어둑어둑한 경우가 많은데요. 이런 환경에 맞춰 운전자들은 한낮에도 전조등이나 차폭등을 켜고 다니곤 했습니다.


자동차 램프의 기본적인 역할은 어두운 밤 전방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지만, 시야 확보만큼이나 중요한 게 다른 운전자에게 내 위치를 알리는 것입니다. 북유럽 지역에서 이렇게 낮 시간에도 등을 켜고 다니니 차량의 인식률이 높아지고 사고 확률이 줄어든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앞을 비추기 위함이 아닌 내 위치를 알리기 위한 주간주행등의 법제화가 논의되기 시작합니다.​

스웨덴은 세계 최초로 주간주행등 장착을 의무화했습니다. 방향지시등 위의 하얀 부분이 주간주행등입니다.

최초로 주간주행등을 의무화한 나라는 북유럽의 자동차 강국인 스웨덴이었습니다. 1977년 주간에도 상시 점등되는 인식등(notice light)의 장착을 의무화 했는데요. 당시 스웨덴의 주간주행등 기준은 방향지시등과 후미등에 차폭등 형태로 밝은 조명이 켜지는 방식이었습니다.


핀란드는 도심 외 지역에서 1972년부터 주간주행등의 겨울철 점등을, 1982년부터 상시 점등을 의무화하며 이런 흐름에 동참했습니다. 1년 내내 도심이든 시골이든 주간주행등을 의무 점등하는 법규는 노르웨이(1986년), 아이슬란드(1988년), 덴마크(1990년), 핀란드(1997년) 순으로 제정됐습니다.

캐나다에서는 저조도 상향등을 주간주행등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미 대륙에서도 마찬가지로 고위도 지역인 캐나다가 주간주행등 도입을 선도햇습니다. 캐나다 정부는 1990년부터 캐나다에서 생산되거나 수입되는 모든 자동차에 주간주행등 장착을 의무화 했는데요. 이때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별도의 주간주행등을 설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북유럽과 마찬가지로 차폭등과 공용화 하거나 시동 시 상향등이 저조도로 점등되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국내에서도 간혹 캐나다에서 이삿짐 등으로 직수입된 차량들이 한낮에 상향등(주간주행등)이 켜진 상태로 달리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나라가 주간주행등의 안전성에 동의했던 건 아닙니다. GM은 1990년부터 캐나다 수출형 모델에 주간주행등이 의무화 되면서 생산 편의성을 위해 미국에서도 주간주행등 장착 차량의 판매를 허용해 달라고 도로교통안전국(NHTSA)에 요청했는데요. 오히려 NHTSA는 주간주행등이 마주오는 운전자에게 눈부심을 유발하거나 상향등·방향지시등과 혼동될 우려가 있다며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주간주행등의 안전성은 과학적 연구를 통해 입증됐습니다.

그럼에도 주간주행등의 효용성은 여러 과학적 연구를 통해 그 효용성이 입증됐습니다. 주간주행등 점등에 따른 교통사고 감소율은 북유럽 기준 최대 8%에 달했고, 특히 흐린 날씨나 안개가 낀 경우에는 훨씬 큰 효과를 지닌 것으로 확인된 바 있습니다. 자동차와 별개로 상시 전조등 점등이 오래 전부터 의무화된 오토바이 역시 전조등 점등 시 유의미한 사고율 감소를 보였습니다.


이처럼 안전장치로서의 주간주행등의 가치가 인정되면서, 21세기 들어서는 많은 선진국에서 주간주행등이 의무화 됩니다. 우리나라는 여러 차례의 시범 운영을 거쳐 주간주행등이 최대 19%의 사고 감소 효과를 지닌 것으로 확인되면서 2015년 7월부터 국내에서 판매되는 모든 차량에 주간주행등 장착 의무가 부여됩니다.​

BMW의 헤일로 헤드램프는 주간주행등 디자인 혁신의 선구자입니다.

처음에는 안전을 위해 도입된 주간주행등이지만, 등화류의 설계와 디자인이 고도화되기 시작한 2000년을 전후해 주간주행등에도 독특한 디자인이 입혀지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BMW가 선보인, 이른바 '코로나 링'·'엔젤 아이'로 불리는 헤일로 헤드램프입니다.


전조등을 감싼 원형의 헤일로 헤드램프는 독립된 주간주행등이자, 동시에 BMW 고유의 2등식 헤드램프를 재해석한 디자인으로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헤일로 헤드램프는 5시리즈에 최초로 적용된 이래로 20년 넘게 BMW의 핵심 디자인 요소로 활용돼 왔습니다.​

아우디는 최초로 LED 주간주행등을 전 차종에 폭넓게 도입합니다.

또 2000년대 중반에는 기존의 할로겐 전구를 대체하는 차세대 광원, LED가 주간주행등에 활용되기 시작합니다. 아우디는 2004년 플래그십 세단 A8 W12 모델에 세계 최초의 LED 주간주행등을 채택합니다. A8은 헤드램프 내측에 원형으로 배치된 LED 주간주행등을 사용했는데요. 이후 출시된 스포츠카 R8을 통해 선형 LED 주간주행등을 선보입니다.


아우디를 시작으로 많은 자동차 회사들이 LED 주간주행등을 도입하기 시작했는데요. 광원이 작은 LED의 특성을 살려 주간주행등으로 브랜드 내지는 모델 고유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대세로 떠오릅니다. 오늘날의 많은 차들은 안전을 넘어 특이한 스타일을 과시하기 위해 다채로운 형태의 LED 주간주행등을 적용하는 추세입니다.


오늘날 미국을 제외한 세계 대부분의 주요 시장에서는 주간주행등이 의무화돼 있습니다(미국은 주 별 재량에 맡겨 둔 상태). 주간주행등은 자동차 인식률을 높여 자동차 간의 사고를 줄이는 효과 뿐 아니라 자전거, 보행자와의 사고를 줄이는 효과도 이미 과학적으로 검증됐는데요. 때문에 완전 자율주행 시대가 도래하더라도 주간주행등이 사라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여집니다.​

최신 모델에서 주간주행등은 다채로운 디자인 요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간주행등의 혁신은 계속됩니다. 최근에는 많은 제조사들이 항시 점등되는 주간주행등을 디자인 요소로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 중입니다. 앞서 소개한 BMW의 헤일로 헤드램프 외에도 LED 기술을 활용해 웰컴 세리머니를 선보인다든가, 현대차와 같이 라디에이터 그릴에 LED 소자를 숨겨 독특한 그래픽을 살리는 방식입니다.


또한 주간주행등의 환경 영향성에 대한 고찰도 이뤄지고 있는데요. LED 주간주행등이 제법 보급됐음에도 많은 대중차는 할로겐 전구 주간주행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할로겐 전구는 전력 소모량이 많다는 단점이 있는데, 전력을 많이 소모한다는 건 결과적으로 차량의 연비 저하와 탄소 배출량 증가를 의미합니다.​

탄소 중립을 위해 주간주행등의 저전력화도 이뤄지는 추세입니다.

개별 차량에서는 주간주행등에 의한 탄소 배출량 증가가 무시할 만한 수준이지만, 수십~수백만 대의 차가 주간주행등을 켜 발생하는 탄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인데요. 때문에 탄소 중립 정책을 강화 중인 유럽에서는 이미 2011년부터 전력 소모가 많은 전조등(하향등 또는 상향등) 기반의 주간주행등을 금지시켰고, 장기적으로는 LED를 비롯한 저전력 주간주행등 의무화를 추진 중입니다.


역사와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주간주행등과 주간에도 불이 들어오는 슈퍼 비전 클러스터 계기판이 보편화 되면서 한밤중에도 주간주행등만 켜고 전조등을 켜지 않는 차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요. 주간주행등은 한낮에도 차량을 인식시키기 위한 조명인 만큼 밝기가 매우 강해 야간에는 오히려 다른 운전자들의 시야를 방해할 수 있습니다. 또 많은 차량들이 주간주행등 점등 시에 후미등은 켜지지 않기 때문에, 후행 차량에게는 '스텔스 차량'이나 다름없는데요.​

주간주행등이 아무리 멋져도, 밤에는 꼭 전조등을 켜 주세요!

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장치라 하더라도, 사용자가 사용법을 숙지하고 꼼꼼히 챙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안전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저녁 퇴근길에는 혹시 내가 주간주행등만 켜고 달리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면 어떨까요?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

2023.02.1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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