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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스파-프랑코샹 : 오 루즈로 유명한 난공불락의 서킷

by피카미디어

벨기에를 대표하는 서킷, 스파-프랑코샹입니다.

매년 20여 개 나라를 돌며 개최되는 포뮬러원(F1)에서는 선수와 레이스카, 팀의 역량 외에도 경주가 치러지는 서킷이 승리를 결정짓는 큰 변수로 작용하기 마련입니다. 각각의 서킷마다 레이아웃, 고저차, 심지어 기후마저 상이하기 때문에, 각 서킷에 맞는 전술과 운전 방식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입니다.


그런 F1 서킷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곳을 하나만 꼽기는 쉽지 않습니다. 얼핏 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서킷이더라도 저마다 공략 포인트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어떤 드라이버에게나 결코 쉽지 않은 서킷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벨기에의 스파-프랑코샹 서킷(Circuit de Spa-Francorchamps)입니다.

스파-프랑코샹은 100년 넘는 역사의 유서깊은 서킷입니다.

흔히 줄여서 '스파'라고도 불리는 스파-프랑코샹은 벨기에 스타벨로(Stavelot)에 위치한 유서깊은 서킷입니다. 1921년 개장했으니 올해로 101년의 역사를 자랑하는데요. 몬차 서킷(1922년), 뉘르부르크링(1927년), 모나코 서킷(1929년)보다도 오래돼 F1 서킷 중에서도 최고참 격입니다.


길고 특이한 이름은 인근의 도시 스파(Spa, 오늘날 '온천'을 일컫는 단어 스파도 이 도시의 온천에서 유래했습니다)와 트랙이 위치한 마을 프랑코샹(Francorchamps)을 합쳐 지어졌습니다. 처음부터 전용 자동차 경주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 일대의 일반도로를 통제해 만든 가설 서킷이었기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죠.

스파-프랑코샹은 라 뫼즈 컵의 부활을 위해 처음 구상됐습니다.

스파 서킷의 첫 구상은 지역 신문사 사장이었던 쥘 드 떼르(Jules de Their)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중단된 벨기에의 자동차 경주 대회, 라 뫼즈 컵(La Meuse Cup)을 부활시키고 싶었습니다. 레이스를 주최함으로써 신문을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당시 많은 언론들이 모터스포츠를 홍보 무대로 삼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는 레이서 앙리 랑글로와 반 오펨( Henri Langlois van Ophem)과 스파 시장이었던 조제프 드 크루헤(Joseph de Crawhez) 남작에게 레이스를 개최할 만한 코스 설계를 요청합니다.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스타벨로, 프랑코샹, 말메디 등 세 마을을 잇는 도로를 이어 만든 것이 바로 스파-프랑코샹의 시작입니다.

초창기 스파의 레이아웃. 1랩의 길이는 15km가 넘었습니다.

사실 초창기 스파는 서킷이라기보단 랠리 코스에 가까웠습니다. 폐쇄된 전용 트랙도 아니었던 데다, 한 바퀴가 무려 15km나 됐으니까요. 그냥 시골길을 순환 구조로 막아두고 경기를 여는 수준이었습니다. 현재와는 레이아웃 차이도 컸는데, 스파의 뾰족한 헤어핀 코너 라 소스(La Source)만이 지금까지도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명성이 무색하게도, 첫 경기가 열린 1921년 8월의 스파는 그야말로 '찬밥신세'였습니다. 자동차 경주는 참가자가 한 명 뿐이라 아예 취소됐고, 23명이 출전한 모터사이클 경주만 겨우 개최됐죠. 하지만 이듬해부터 참가자가 늘면서 벨기에 그랑프리가 제대로 개최되게 됩니다. 또 1924년부터는 유명한 스파 24시간 내구레이스가 열리면서 스파-프랑코샹의 전성기가 찾아옵니다.


모터스포츠의 황금기였던 1930년대를 지나며 스파-프랑코샹은 몇 차례 개수를 거쳤습니다. 말메디 인근의 시케인이 사라지고, 스타벨로를 지나는 깊은 코너는 완만한 고속 코너로 개수됐죠. 1939년에는 라 소스 직후 언덕에 있었던 일명 '옛 세관(Ancienne Douane, 과거 독일 제국의 영토였을 때 세관 건물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코너가 삭제되고 단숨에 언덕을 오르는 '오 루즈(Eau Rouge)'와 '라디옹(Raidillon)'이 만들어집니다.

1930년대 몇 차례 개수를 거쳐 스파는 유럽에서 가장 빠른 고속 서킷으로 재탄생합니다.

이 시기 스파의 총연장은 14.120km로 줄어들었는데요. 몇 개의 코너가 삭제된 만큼 당시 유럽에서 가장 빠른 초고속 서킷으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14km를 주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3~4분 정도로, 환산해 보면 평균 속도가 200km/h를 훌쩍 넘은 셈이죠. 짜릿한 초고속 레이스를 볼 수 있다는 점은 스파-프랑코샹을 인기 서킷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레이서들에게는 가장 위험한 서킷으로 악명높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까지도 스파의 코스 대부분은 일반 도로였고, 당연히 포장 상태도 나빴습니다. 안전지대도, 가드레일도 없어 최고 290km/h로 질주하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는 일이 다반사였죠. 게다가 서킷이 위치한 아르덴 숲은 날씨가 변화무쌍해 코스 한 쪽은 햇빛이 내리쬐고 반대쪽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드라이버들은 "스파에서 이기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며 두려워 했습니다.

옛 스파와 현재의 레이아웃 비교. 현대적인 서킷으로 재탄생한 건 1980년대의 일입니다.

갈수록 많은 선수들이 사고로 유명을 달리 하면서, 결국 1969년 F1을 시작으로 많은 레이스들이 스파-프랑코샹을 보이콧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서킷은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거쳤고, 일반도로 구간을 배제한 현대적인 레이아웃으로 1979년 재개장합니다. 우리가 아는 스파의 형태도 이 시기 윤곽이 잡혔습니다.


스파-프랑코샹은 1983년 F1 벨기에 그랑프리를 다시 유치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수정을 통해 2007년에 지금과 같은 코스가 완성됩니다. 오늘날에는 F1을 비롯해 F2, F3 등 오픈휠 레이스, 각종 투어링카 레이스와 4~24시간 내구레이스, 랠리크로스, 히스토릭 레이스 등 다양한 모터스포츠 이벤트가 1년 내내 개최되는 벨기에의 대표 서킷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스파-프랑코샹은 여전히 F1에서 가장 긴 서킷이고, 고저차는 100m가 넘습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스파-프랑코샹의 레이아웃은 총연장 7.001km로, 초창기에 비하면 절반 이하로 줄었음에도 F1 캘린더 중 가장 긴 서킷입니다. 총 20개의 코너로 구성돼 있어 얼핏 보기에는 그리 복잡한 레이아웃이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무려 104m나 되는 고저차 때문에 공략 난이도가 매우 높습니다.


특히 레이아웃 변경 뒤에도 스파는 F1 기준 평균 속도가 250km/h에 달하는 초고속 서킷으로 아주 유명한데요. 전체 구간 중 약 70%를 풀 스로틀로 통과하고, 오 루즈-라디옹 구간 외에도 12번(푸옹), 17-18번(블랑시몽) 코너와 같이 200km/h 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고속 코너가 많습니다. 여기에 앞서 말한 큰 고저차 때문에 마치 롤러코스터 같은 코스 구성이 특징입니다.

스타트라인 직후의 라 소스 코너. 오 루즈 못지않게 사고가 많은 곳입니다.

스타트 라인을 통과하자마자 만나는 건 옛 스파부터 존재했던 뾰족한 라 소스 헤어핀입니다. 헤어핀을 지나면 긴 가속 구간이 나오는데, 내리막을 지나 높은 언덕을 3개의 연속 코너로 오르는 오 루즈-라디옹에서부터 초고속 주행이 시작됩니다. 7~9번 연속 코너로 이뤄진 레 꽁브 이전 켐멜 스트레이트까지의 길이는 1.8km에 달해 F1에서도 가장 긴 가속 구간입니다.


레 꽁브 시케인을 지나면 짧은 직진로가 나오고, 그 끝에는 커다란 브뤼셀 헤어핀이 등장합니다. 그 뒤에는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고속 코너 푸옹, 연속 S자 코너 캄퓌스-스타벨로를 통과해 블랑시몽의 완만한 오르막 고속 코너에 다다릅니다. 고속 구간이 끝난 뒤 '버스 스톱'이라고도 불리는 19-20번 연속 시케인에서 속도를 줄이고, 다시 스타트라인으로 돌아옵니다.

스파에서 가장 유명한 오 루즈-라디옹 구간. 단숨에 30m의 언덕을 오르는 난코너입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건 단연 오 루즈입니다. 프랑스어로 '붉은 강'이라는 뜻의 오 루즈는 R값이 작은 3번 코너와 완만한 4번 코너로 이뤄져 있는데, 얼핏 보기에는 브레이킹 없이 단숨에 오를 수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30m 고저차의 가파른 오르막인 데다 보기보다 코너가 깊어 상당한 난코스입니다.


이 코너를 브레이킹 없이 통과할 수 있는 차량은 F1과 내구레이스용 프로토타입, 일부 최상급 GT카 정도인데, 오 루즈를 오르는 순간 F1 드라이버는 최대 6G의 압력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 구간을 빠르게 통과해야만 이어지는 가속 구간에서 빠른 속도를 낼 수 있기 때문에, 공략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레이스에서는 중요한 승부처가 되기도 합니다.

잦은 대형 사고에 스파-프랑코샹은 최근까지도 안전을 위한 개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워낙 난구간인 만큼 아찔한 사고도 자주 일어나는데요. 2019년에는 F2 대회 도중 앙투안 위베르(Anthoine Hubert)가 오 루즈 코너의 끝자락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기량을 보인 유망주였던 만큼 안타까움을 더했습니다. 2021년에도 스파 24시간 내구레이스, W시리즈 벨기에 GP, F1 벨기에 GP 등 불과 한 달 새 3번의 사고가 오 루즈에서 일어났고, 결국 2021년 오 루즈의 안전지대가 대폭 확장됐습니다.

스파는 높은 난이도 만큼이나 흥미진진한 레이스와 아름다운 경관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여전히 위험하고 어려운 난공불락의 서킷으로 악명높지만, 그럼에도 스파-프랑코샹은 유럽에서 가장 인기 높은 서킷입니다. 고도의 드라이빙 스킬이 요구되는 레이아웃에 다른 서킷에서 보기 어려운 초고속 경합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변덕스러운 기후로 경기 도중 다양한 변수도 발생하죠. 이처럼 흥미 요소가 많아 모터스포츠 이벤트가 연중 유치되기도 하고요.

다가오는 8월, 스파에서 치러질 F1을 랜선으로라도 관람해 보면 어떨까요?

특히 이 지역의 날씨가 가장 좋은 7~8월에는 정상급 대회가 많은데요. 올해는 7월 28일부터 31일까지 스파 24시간 내구레이스가, 8월 26일부터 28일까지 F1 벨기에 GP가 예정돼 있습니다. 아름다운 아르덴 숲을 가로지르는 스파-프랑코샹의 화끈한 모터스포츠 현장, 잊지 말고 관람해 보면 어떨까요?​


글 이재욱 에디터 <피카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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