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신사는 7번 쓰러져도 다시 일어난다 : 애스턴마틴 역사

[비즈]by 피카미디어

'영국 신사' 하면 떠오르는 차, 섹시한 그랜드 투어러 애스턴마틴입니다.

영국은 20세기 자동차 산업을 주도했던 나라 중 하나입니다. 오늘날에는 대다수의 영국 자동차 회사가 다른 나라 기업에 매각되고 그 존재감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그럼에도 영국차가 자동차 산업에 남긴 족적은 손꼽아 세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롤스로이스, 벤틀리, 재규어, 랜드로버 등 영국 브랜드마다 할 이야기가 많지만, 오늘 다룰 브랜드는 '본드카'로 유명한 애스턴마틴(Aston Martin)입니다. 100년 넘는 세월 동안 숱한 위기가 있었지만, 품위를 잃지 않고 다시 일어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애스턴마틴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레이스에서 탄생하고 전쟁으로 휘청이다​

라이오넬 마틴(왼쪽)은 자전거 동호회에서 만난 로버트 뱀포드(오른쪽)와 자동차 사업을 시작합니다.

애스턴마틴의 탄생은 19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부유한 도자기상 아버지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라이오넬 마틴은 이튼 칼리지와 옥스포드 대학교를 졸업한 전형적인 영국 상류층이었습니다. 속도광이었던 그는 자전거 동호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는데, 바로 엔지니어였던 로버트 뱀포드였습니다.


자동차에 많은 관심과 열정을 품고 있었던 두 사람은 1913년 런던 근교에 '뱀포드 & 마틴'이라는 회사를 세우고 자동차 판매와 정비 사업을 시작합니다. 이들은 싱어, GWK, 칼스롭 등 여러 회사 차를 고치거나 개조하곤 했는데요.​

초창기 뱀포드 & 마틴 자동차가 힐클라임 코스를 달리는 모습. 애스턴마틴은 모터스포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1914년 4월, 라이오넬 마틴은 튜닝된 싱어 자동차를 타고 인근 애스턴 힐(Aston Hill)에서 열린 힐클라임 레이스에 출전합니다. 그리고 5월에는 자동차 클럽 미팅에도 참가하죠. 이 두 행사에서 자신들의 개조된 자동차가 좋은 평가를 받자, 마틴과 뱀포드는 아예 직접 자동차를 만들어 보기로 합니다.

라이오넬 마틴은 자신이 처음 출전했던 '애스턴 힐클라임'과 자신의 이름을 더해 첫 차의 이름을 짓습니다.

이듬해 3월, 두 사람은 이탈리아 제 섀시에 코번트리-심플렉스 엔진을 얹은 최초의 차를 완성합니다. 첫 자동차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하던 차에 마틴의 아내가 "기업 명단의 맨 위에 오도록 'A'로 시작하는 이름을 짓자"며 지난해 출전했던 '애스턴 힐클라임'에서 따 올 것을 제안했죠. 이에 애스턴 힐과 라이오넬 마틴의 이름을 합쳐 '애스턴-마틴'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하지만 사업은 이내 좌초 위기를 맞이하는데, 1914년 시작된 제1차 세계 대전이 확전되면서 두 사람도 군에 입대한 것입니다. 라이오넬 마틴은 해군에, 로버트 뱀포드는 육군에 입대하면서 1918년 1차 대전 종전까지 뱀포드 & 마틴은 동면에 빠집니다.​

자신의 차를 점검하는 라이오넬 마틴. 뱀포드가 떠난 뒤에도 그는 회사를 지켰으나,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사업을 재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920년에는 로버트 뱀포드가 회사를 떠났고, 라이오넬 마틴은 투자를 유치해 가까스로 회사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값비싼 고성능 투어링 카를 개발해 팔면서 꾸준히 레이스에도 나섰지만, 1924년 파산을 피하진 못했습니다. 라이오넬 마틴이 자신의 이름이 붙은 회사를 떠난 건 2년 뒤인 1926년의 일입니다.

다재다능했던 경영자, 베르텔리. 그는 사명을 '애스턴마틴'으로 바꾸고 고성능 투어러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후 새로운 투자자와 함께 경영권을 쥔 건 이탈리아계 영국인이었던 아우구스투스 베르텔리였습니다. 그는 자동차 디자이너이자, 미케닉이자, 레이서이자, 사업가였는데, 동업자 빌 렌윅과 함께 사명을 '애스턴마틴'으로 바꾸고 회사 살려내기에 착수합니다.​

1934년형 애스턴마틴 1½리터 Mk.II SWB 스포츠. 베르텔리가 만든 '베르텔리 카' 중 하나입니다.

베르텔리는 주로 오픈탑 2인승 스포츠카를 많이 만들었는데, 르망 내구레이스를 비롯해 여러 대회에 출전하며 홍보 효과를 노렸습니다. '강력한 성능의 고급스러운 투어러'라는 애스턴마틴의 이미지를 착실히 쌓아 나간 것도 이 때부터 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또 다시 경영 위기가 찾아왔고, 설상가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애스턴마틴 공장은 전투기 부품 공장으로 사용됐습니다.

구원자 데이비드 브라운과 굴곡의 30년​

데이비드 브라운은 오늘날까지도 '애스턴마틴의 구원자'로 불립니다.

두 번이나 전쟁을 겪었으니 회사가 만신창이가 된 건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 애스턴마틴을 구원해 낸 건 1947년 새 주인이 된 데이비드 브라운입니다. 이미 트랙터, 공작기계 등으로 성공한 사업가였던 그는 신문에서 애스턴마틴의 매각 공고를 보고 회사를 방문합니다.

데이비드 브라운이 시승했던 아톰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DB1. 'DB'는 그의 이니셜에서 따 왔습니다.

펠트햄의 애스턴마틴 본사에서 전쟁으로 양산되지 못했던 프로토타입 '아톰'을 타 본 그는 "엔진 성능은 부족하지만 승차감과 핸들링이 뛰어나 잠재력이 있다"고 판단, 2만 500파운드에 애스턴마틴을 사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탔던 아톰을 컨버터블로 개조해 양산하도록 지시하는데, 그 차가 바로 '2-리터 스포츠', 오늘날 데이비드 브라운의 이름을 따 'DB1'이라 불리는 찹니다.


데이비드 브라운은 2.6L 엔진을 생산하던 라곤다를 사들여 애스턴마틴과 합병, 더 강력한 엔진을 얻습니다. 그리고 1950년부터 모터스포츠 프로그램을 재개, DB2를 개발해 르망에 출전시켰고, 이후에도 르망을 비롯한 여러 레이스에 출전해 화려한 전적을 남겼습니다.

DB5는 '007 골드핑거'에 처음 등장해 지금까지도 제임스 본드를 상징하는 차로 기억됩니다.

1963년에는 애스턴마틴의 세계적 인지도를 크게 올려준 일이 있었는데요. 영화 '007 골드핑거'에서 DB5가 제임스 본드의 전용차로 캐스팅(?)된 것입니다. 원작 소설에서는 DB3를 탔었는데, 당시 최신 모델이었던 DB5가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죠.​

애스턴마틴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007 시리즈에 단골 출연 중입니다.

'007 골드핑거'가 엄청난 흥행 대박을 치면서 애스턴마틴도 덩달아 인기를 끌었고, 경영난에 시달리던 회사의 반짝 재기에도 큰 도움을 줍니다. 애스턴마틴 하면 떠오르는 '영국 신사' 이미지 역시 007 시리즈의 덕이 크다고 할 수 있죠. 그 인연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애스턴마틴은 여러 세대에 걸쳐 본드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데이비드 브라운의 노력과 별개로, 애스턴마틴은 수익을 잘 내는 회사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1972년 데이비드 브라운은 본업에 충실하기 위해 무려 500만 파운드에 달했던 애스턴마틴의 부채를 청산하고, 단돈 101파운드에 윌리엄 윌슨의 투자회사에 매각합니다.

70~80년대 애스턴마틴의 상황은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사진은 1977년 출시된 V8 밴티지.

만성적자에 시달리던 회사를 살려내는 건 어느 투자자가 와도 쉬운 일이 아니었죠. 1973년 오일쇼크가 터져 자동차 판매가 급감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대 시장 중 하나였던 캘리포니아의 배출가스 기준이 대폭 강화돼 수출길까지 막히자 애스턴마틴은 1974년 다시 법정관리에 돌입합니다.


이후 애스턴마틴은 그야말로 온갖 풍파를 겪습니다. 1975년부터 1981년까지는 미국인 사업과 피터 스프래그와 영국 투자자 앨런 커티스가, 1981년부터 1987년까지는 영국 석유재벌 빅터 건틀렛이 애스턴마틴의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그럼에도 애스턴마틴을 완전히 소생시키기는 역부족이었죠.

'자동차 공룡' 포드 산하로 들어가면서 애스턴마틴은 비로소 숨을 돌렸습니다. 사진은 1989년 출시된 비라지.

1987년에는 미국의 포드가 지분 75%를 인수하며 애스턴마틴의 경영권을 잡습니다. 다른 자동차 회사, 그것도 미국 회사가 애스턴마틴의 주인이 된 건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이때부터 2007년까지 무려 20년 간 포드는 애스턴마틴을 경영합니다.


다행히도 포드 산하의 애스턴마틴은 서서히 판매량을 늘리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80년대 말부터 세계적으로 호경기가 이어지면서 럭셔리 GT카의 수요가 늘어난 것도 애스턴마틴의 회생에 기여했죠.

현대적 애스턴마틴의 시작을 알린 DB7은 7,000대 넘게 팔리며 애스턴마틴 부활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특히 1994년 출시된 DB7은 무려 7,000대 넘게 팔리는(80년대 말까지 애스턴마틴의 연 평균 생산대수는 300대도 되지 않았습니다) 상업적 성공으로 애스턴마틴 부활의 주역이 됐습니다. 같은 포드 산하의 재규어 XJS 플랫폼을 활용했고, 여기에 이안 칼럼의 세련된 디자인이 더해졌죠. 현대적인 애스턴마틴 디자인은 모두 DB7에서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공도 잠시, 21세기가 되면서 애스턴마틴의 인기는 점차 식어 갑니다. 미국식 원가절감으로 품질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신차도 없었습니다. 포드 내부에서도 수익성이 악화된 해외 브랜드-애스턴마틴, 재규어, 랜드로버, 볼보-의 매각을 검토하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 세기를 맞이하며

포드로부터 다시 독립한 애스턴마틴은 4도어 쿠페 라피드를 출시하는 등 공격적인 행보에 나섭니다.

2007년, 포드가 매물로 내놓은 애스턴마틴은 영국의 사업가 데이비드 리처드가 주도하는 컨소시엄에게 4억 7,500만 파운드에 매각됩니다. 다시 독립한 애스턴마틴은 아시아 시장 딜러십을 늘리고 4도어 쿠페 라피드 출시, 메르세데스-AMG와의 제휴를 통한 엔진 공급선 확보 등 공격적인 행보를 펼치는데요.​

앤디 팔머 CEO는 두 번 다시 애스턴마틴이 휘청이지 않도록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2014년 CEO로 취임한 앤디 팔머는 2016년, 애스턴마틴의 만성적인 적자 청산과 자립 능력 확보를 골자로 한 경영 전략을 발표합니다. "애스턴마틴의 첫 세기(20세기)에는 7번의 파산이 있었지만, 두 번째 세기(21세기)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흔히 '두 번째 세기 계획(Second Century Plan)'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요.​

애스턴마틴 벌칸(위), DBX(왼쪽), DB11. 애스턴마틴은 과거 어느 때보다 공격적으로 라인업 확장 중입니다.

이에 따라 애스턴마틴은 7년 간 차세대 스포츠카를 비롯해 매년 1종의 신차를 출시하고, 공장 증설과 판매량 확대를 계획합니다. 트랙 전용 스포츠카 벌칸, 브랜드 최초의 SUV DBX, 세대 교체된 스포츠카 DB11도 이 계획의 일환으로 탄생했죠.​

억만장자의 아들 사랑(?) 덕에, 애스턴마틴은 61년 만에 F1 무대로 복귀했습니다.

2017년 흑자 전환에 성공한 애스턴마틴은 이듬해 런던 증권거래소에 상장하고, 2019년부터 새 공장에서 DBX의 양산에 돌입하는 등 성공적인 부활가도를 걷고 있습니다. 또 2020년에는 캐나다 억만장자 로렌스 스트롤이 회장에 취임, 수천억 원을 투자하면서 61년 만에 애스턴마틴 팀을 포뮬러원(F1) 무대에 복귀시키기도 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감성과 퍼포먼스, 헤리티지와 진보가 공존하는 회사가 바로 애스턴마틴입니다.

2021년 현재, 애스턴마틴은 여러 유서 깊은 고성능차 브랜드들이 거대 자동차 그룹의 자회사가 된 가운데 독립된 경영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회사 중 하나입니다. 무려 7번이나 파산에 내몰렸음에도 꿋꿋이 이겨내며 영국 럭셔리 카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살아남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애스턴마틴은 앞으로 얼마나 더 멋진 차들을 선보일까요? 사진은 출시를 앞둔 하이퍼카 발키리 AMR Pro.

우아한 그랜드 투어러이자 제임스 본드의 영원한 애마, 눈부신 모터스포츠 업적과 헤리티지를 모두 품은 회사, 애스턴마틴. F1 기술이 담긴 하이퍼카 발키리, 2025년께 출시 예정인 첫 전기차 등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되는데요. 여러분은 애스턴마틴에서 어떤 차를 가장 좋아하시나요? 제 '최애' 모델인 DB4 GT 자가토의 사진을 끝으로 오늘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Aston Martin DB4 GT Zagato Continuation(2019).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

2023.03.0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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