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대사관에서 찾은 퇴사 해결책
직원 카드를 찍고 두 번의 철제 보안 문을 통과하자 보통의 직장과는 다른 풍경이 보인다. 팀별로 빽빽하게 놓인 책상 대신 개인 사무실이 보인다. 대표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이 비슷한 크기의 개인 사무실을 가졌다. 각 사무실에는 외부 일정으로 자리를 비운 사람도 있고, 서서 근무하는 사람이나 앉아서 근무하는 사람도 있다. 어라? 서서 근무하던 사람이 책상 한쪽 스위치를 누르더니 책상을 앉기 편하게 맞춘다.
안녕, 도희. (Hi, Dohee.)
직급에 상관없이 직원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꽤 낯선 이 풍경은 서울시 중구에 있는 스웨덴 대사관의 풍경이다. 8월 퇴사를 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기도 했지만 경직된 조직문화가 나에겐 힘들었다. 그리고 10월부터 주한 스웨덴 대사관에 1주일에 3–4번 출근한다. 대사관에서 주관하는 여러 행사를 도와드리기 위해서다.
비록 아르바이트지만 대사관에 출근하는 일이 즐겁다. 내게 주어진 자율성과 책임, 느껴지는 소속감, 근무시간 적절하게 주어지는 휴식, 직급에 상관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사람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스웨덴 대사관에는 스웨덴 사회가 중요시하는 평등, 신뢰, 워라밸의 가치가 곳곳에 녹아 있었다.
대사관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숨겨진 평등
스웨덴 사회에서 중요한 ‘평등’이라는 가치를 대사관의 물리적 공간에서 먼저 찾을 수 있었다. 직급에 상관없이 비슷한 크기의 개인 사무실과 스탠딩 책상을 가졌다. 대사라고 해서 궁궐만 한 사무실을 차지하지 않으며, 모든 직원은 개인의 업무 공간을 존중받는다. 주변의 소음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오롯이 본인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다.
한편 평등의 가치는 직원들의 의사소통에서도 잘 드러났다. 바로, 나이와 직급에 상관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문화다. ‘좋은 아침이야, 도희.’ ‘안녕, 야콥.’ 야콥은 주한 스웨덴 대사님의 성함이다. 스웨덴에서는 직급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스웨덴은 영국, 독일, 프랑스와 같은 서유럽 국가보다 더 수평적으로 알려져 있다.
나보다 나이도 많고 직급도 높은 상사를 이름으로 부르니 처음엔 너무나 어색했다. 하지만 호칭에서 위계가 사라지자 상대방과 더욱 편하고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나이나 직급에 주눅 들지 않고, 한 개인으로서 내 의사를 명확히 전달할 수 있었다. 상대방도 내가 어리거나 경험이 부족하다고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동등한 발언권을 가진 개인으로서 서로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생각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었다.
의사 결정이 솔직하고 빠르게 되다 보니 업무의 효율성도 자연스레 높아졌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위계가 없다 해서 상대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상호 존중이 강화된다 느꼈다. 위계가 사라진 곳에 평등이 스며들었고, 평등은 자연스레 상호 존중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갑을은 없었다.
휴식과 저녁이 있는 삶
피카 타임이야!
매주 금요일 11시는 스웨덴 대사관의 전체 피카 타임이다. 피카는 스웨덴식 커피브레이크로, 업무 시간 중 15~20분 정도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다. 스웨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잘 자리 잡은 문화다. 맛있는 커피와 간식은 덤이다. 피카의 핵심은 동료들이 모여, 주로 업무 외적인 이야기를 하며 쉬는 데 있다. 지난주 피카 타임의 화제는 스웨덴 직원의 한국식 사우나 체험기였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함께 웃고 떠들던 시간은 지친 뇌를 쉬게 해주고 업무를 이어가기 위한 활력을 주었다. 스웨덴 사람들은 피카 시간이 동료 간의 유대를 강화해주고, 업무의 효율성도 높여준다고 믿는다. 바쁜 업무 때문에 교류가 적은 동료들이 연결되고, 재충전할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나도 이 피카 덕분에 잘 모르던 직원분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친해질 수 있었다. 동료와의 관계가 좋아지자 조직 생활의 만족도도 올라갔다. 더욱이, 제대로 쉴 시간이 있다는 사실은 내가 주어진 시간에 최대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적절한 휴식은 독이 아닌 득이 되었다.
한편, 스웨덴 대사관에는 ‘저녁이 있는 회식 문화’도 있다. 한 달에 한 번, 전 직원은 대사관에서 회식한다. 와인과 치킨, 피자, 과일 등 다양한 음식을 차려 놓고 직원들이 교류하는 시간이다. 일터에서 회식을 하는 것도 특이했지만, 회식이 오후 4시 반에 시작하는 것도 인상 깊었다.
더욱이 참석 여부도, 떠나는 시간도, 음주 여부도 모두 자유다. 대사관의 공식 업무 마감 시간은 5시 30분이지만, 회식 날은 한 시간 일찍이 업무가 마감된다. 공기관에 비교적 작은 조직이라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이 시간에 맞춰 모든 직원이 업무에 차질이 없게 일하는 모습은 인상 깊었다. 또한 직원들은 개인의 일정에 맞춰 늦게 오거나 일찍 떠난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마시지 않거나, 음료를 마시면 된다. 각자의 식습관과 스케줄에 맞게 그저 즐기면 되는 것이다. 나는 회식이 팀워크를 기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에서는 회식이 과도한 음주를 동반하고, 늦게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있어 이에 거부감이 많다고 들었다.
일반적으로 스웨덴에는 회식 문화가 없다. 하지만 주한 스웨덴 대사관의 회식 문화는 한국과 스웨덴 직원이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단체 활동이지만 개인 생활을 굉장히 존중해줬다. 그 결과 자발적으로 모든 직원이 기쁘게 참석했다. 6시쯤 되자 가정이 있는 직원은 일찍이 집으로 향했고, 나는 7시쯤 먼저 집으로 향했다.
회식 후에도 저녁이 있는 하루였다. 단체와 개인 생활은 대립하기보다 양립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 핵심에는 개개인의 자발적 의사를 존중해주는 문화가 존재했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문화
얼마 전 사운즈한남에서 열린 스웨덴 라이프 스타일 페어의 오프닝 토크를 맡았다. 피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토크 후 한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하시는 한 청중분께서 질문하셨다.
이런 문화는 작은 조직이라 가능하지 않냐?
작은 조직이라 좀 더 쉬울지도 모르겠지만 큰 조직이라 해서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야콥 대사님 말씀처럼 적절한 휴식과 개인의 삶을 존중해주는 리더가 이 문화를 이끌어야 할 것이고, 팔로워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을 때 비로소 문화가 잘 자리 잡을 것이다. 팀 단위, 아니면 함께 일하는 동료, 또는 혼자서라도 의도된 휴식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회사 생활에서 개인을 존중할 때 비로소 그 개인도 조직을 존중하게 된다.
요즘 신문, 블로그, 서점가에 퇴사 이야기가 판을 친다. 1년도 못 버티고 나오는 신입 사원들, 상사, 동료 또는 부하직원과의 관계를 어려워하는 사람들, 비효율적인 업무를 답답해하는 사람들. 밀레니얼 세대인 신입사원들을 이해하고, 관계 개선 해결책을 제시하는 수많은 책과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피로감이 몰려왔다. 우리 사회가 겪는 잦은 퇴사와 직장 인간관계 문제는 생각보다 단순한 데 해결책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 해결의 실마리를 한국 안의 작은 스웨덴, 대사관에서 찾았다. 상호 존중과 신뢰, 적절한 휴식. 그 중심에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문화가 있었다.
퇴사하기 전, 사회생활 경험도 없는 내가 섣불리 회사 생활을 단정 짓는 게 아닌지 많이 고민했다. 퇴사하려는 내게 대표님은 ‘우리 회사는 작기 때문에 자유롭고,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셨다. 내가 그런 조직 문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리자 대표님은 작은 곳에서는 조직 문화라는 게 필요 없다고 하셨다.
내가 문화를 만들 수도 있지만 어찌 됐든 나는 떠나기로 했다. 경직된 조직 문화, 직원 간의 소통 부재,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존중받지 못하는 동료들의 아이디어 때문에 올해만 많은 동료가 퇴사했다.
사회 초년생인 우리는 경험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 부족한 경험을 비난하기보다, 채우도록 도와주고 이끌어 주는 게 리더의 역할이자, 실수해도 보듬어 주는 게 좋은 조직 문화가 아닐까.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갑을 관계가 아닌, 평등하고 소중한 개인이 있어야 한다.
필자 김도희 (블로그)
한국이 싫어 복지국가 스웨덴으로 탈출했지만, 그곳에서 깨달은 행복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국행을 택했다. 지속가능성, 다문화, 평등을 삶의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브런치에 지속가능한 삶, 다문화, 여행을 주제로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