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도 얼마든지 좋은 메시지를 담을 수 있습니다

"제가 여기 나온 건 음악인을 꿈꾸며 TV를 통해 이 시상식을 보고 있을 어린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입니다. 또 진심으로 순수하게 음악을 만들며 진실을 말하는 나의 모든 동료들에게도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우린 팩트가 아닌 의견에 기반한 스포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우승했다고 연말에 트로피를 들고 그러는 NBA가 아니란 말이죠.


당신의 노래를 하나하나 따라 부르는 팬들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승리자이고 고향의 영웅이에요. 봐요, 평범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열심히 번 돈을 투자해서 티켓을 사고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도 당신의 쇼를 보러 오잖아요. 그렇다면 당신은 이 상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이미 승자예요."


- 제61회 그래미 어워드 ‘Best Rap Song’ 부문의 Drake 수상 소감 중에서

철이 지나도 보통 지난 게 아니라 조금 민망하지만, 두 해 전 방영한 <쇼미더머니 6>의 인상적인 장면 두 가지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먼저 타이거 JK의 이야기다. 과거 학교 폭력 논란에 휩싸인 바 있는 한 인기 많은 어린 래퍼가 ’10대 사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인지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에 ‘모르겠다’라는 답변을 내놨을 때, 타이거 JK는 그에게 조언했다.

"말은 총알보다 무섭다. 원치 않더라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지며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때 나는 타이거 JK의 눈빛에서 영화 <그랜 토리노> 속 꼬장꼬장 할배이자 정의의 사도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보는 듯한 착각을 했다. 당장이라도 TV 속에 들어가 M1 개런드 소총을 건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타이거 JK의 말은 누군가에게는 분명 꼰대처럼 들렸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필요한 메시지였다.

헤이, 영비! 총알보다 무서운 건 MC의 철학이란다.

두 번째는 BIZZY의 이야기다. BIZZY는 <쇼미더머니 6> 프로듀서 싸이퍼에서 힙합에 대한 인식 전환을 위해 중요한 말씀을 몇 개 던졌다.

‘Hiphop is not all about dissin’ and cussin’, I do this for my parents and distant cousin.’

디스하고 욕하는 것만이 힙합은 아니야, 난 우리 부모님과 먼 친척을 위해 랩을 하지.

얼마 전 래퍼 스윙스가 유튜브를 시작했다. 영상 속에서 그는 모티베이션 스피커가 되어 책을 통해 배우고 삶을 통해 체득한 ‘인생 철학’을 진지하게 발사한다. 나는 그런 스윙스의 모습을 보며 겸손하고도 성실한 그의 인간적 매력을 훔쳐볼 수 있었다. 나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을 기본적으로 신뢰하는 입장이다. 가끔 던지는 허튼소리(술 먹어, 섹X해, X발 따위)를 제외한다면 그의 말속에는 속 깊은 사유와 사고의 결과물이 잔뜩 들어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가 자신만의 단단한 철학을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책과 강연을 보며 열심히 공부했는지를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진심으로 팔로워들이 성공적인 인생을 영위하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 지점에서 나는 힙합 팬의 하나로서 크게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브런치를 통해 여러 번 밝혔지만, 나는 힙합 음악을 굉장히 사랑하는 사람이다. 물론 미국 힙합을 주로 듣고 즐기지만, 한국인으로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한국 힙합 또한 즐기고 있다.


하지만 고등학생들이 랩 경연 프로그램에 나와 돈벌이만이 인생사 전부인 것처럼 거칠고 화끈하게 랩을 하거나, 래퍼들이 남을 짓밟기 위해 있지도 않은 분노를 끌어모아 쌍욕을 퍼붓도록 강제하는 디스전 씬이 튀어나오면, 나는 채널을 돌리곤 했다. 그것들이 보기 불편했기 때문이 아니라, ‘보기 민망’했기 때문에 채널을 돌린 것이다.

힙합 씬의 누군가는 ‘돈보다 더욱 소중한 가치’를 역설하고

물론 돈은 중요하다. 내가 지식인으로서 존경하는 한 자산운용사의 대표님은 강연에서 말씀하신 바 있다.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딸에게 생일선물로 괜찮은 주식을 한 주씩 사주는 부모님이 되라고. 자식들이 어릴 때부터 돈의 중요성과 주식, 자산의 매력을 알려주는 부모님이 되라고 힘주어 강조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돈의 맛’을 아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부정의 여지 없이 타당하며, 심지어 꽤 괜찮기까지 한 이야기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돈 많이 벌고 싶다는 가사를 연신 뱉어내며 멋지게 랩하는 고등학생은 칭찬받아야 마땅할 모범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찜찜한 구석을 지울 수가 없다.


"저런 것만이 힙합은 아닌데."


또한 누군가는 기본적으로 경쟁적인 기질을 가진 힙합 씬에서 재미를 위해 서로를 깎아내리며 래퍼의 순발력과 센스를 확인하는 ‘디스전’은 두 팔 벌러 환영받아야 마땅한 흥미로운 콘텐츠라고 주장할 것이다. 구태여 그 입장을 반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생각에 잠기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저런 것만이 힙합의 정신은 아닌데."


이런 말을 하는 내게 돌아올 답도 예측 가능하다. 힙합도 이제 변했다는 이야기, 혹은 꼰대 같은 말이나 하고 앉았다는 이야기. 하지만 힙합이 정말로 ‘그런’ 것인가?


힙합과 관련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미지를 꼽아 보자. 폭력, 분노, 현실 개혁, 경쟁, 욕설, 여자, 돈 정도가 아닐까. 물론 다 맞는 말이다. 힙합의 원류를 굳이 파헤쳐 들어가지 않더라도, 힙합과 래퍼를 다루는 대중문화에게 영향받은 대부분의 경험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힙합은 폭력과 분노, 경쟁의 이미지만큼이나 ‘사랑, 존경, 감사, 평화’, 그리고 ‘성공을 향한 건강한 집념’의 이미지가 깊숙이 박혀 있다. 현재 미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래퍼들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몇 개만 팔로잉해도 그들의 포스팅 메시지 속에 깃든 긍정과 사랑, 감사의 기운을 손쉽게 읽어낼 수 있다.


"원래 이런 사람들이었어?"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얼마 전 발매된 미국 힙합 씬의 간판스타 제이콜(J.Cole)의 곡 'middle child'의 가사에 취해 버리고 말았다.

NBA 올스타 게임에서 퍼포먼스 중인 J.Cole의 모습 / 출처: The Source

내 멋대로 의역한 곡 'middle child'의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I roll with some fiends, I love ’em to death

난 죽을 만큼 사랑하는 내 친구들이랑 어울려


I got a few mil’ but not all of them rich

난 몇십억쯤 가지고 있지만 걔들이 다 그런 건 아냐


What good is the bread if my niggas is broke?

친구들이 어려운데 돈이 다 뭔 의미가 있어?


What good is first class if my niggas can’t sit?

친구들이 못 누리는데 퍼스트 클래스는 또 뭔 의미가 있냐고?


That’s my next mission, that’s why I can’t quit

그게 내 다음 미션이야, 그래서 못 관두는 거야


Just like LeBron, get my niggas more chips

난 르브론처럼 내 친구들 좀 띄울 생각이야


Just put the Rollie right back on my wrist

손목엔 로렉스를 다시 찼어


This watch came from Drizzy, he gave me a gift

드레이크가 선물로 준 거야


Back when the rap game was prayin’ I’d diss

이 랩 씬은 내가 드레이크를 디스 하길 바랐지


They act like two legends cannot coexist

레전드가 두 명일 수는 없다면서


But I’d never beef with a nigga for nothin’

근데 난 아무 이유 없이 디스 하진 않아


If I smoke a rapper, it’s gon’ be legit

내가 래퍼들을 깐다면, 정직하게 갈 거야


It won’t be for clout, it won’t be for fame

이건 뭐 영향력을 위한 것도, 내 명성을 위한 것도 아니야


It won’t be ’cause my shit ain’t sellin’ the same

앨범 팔아먹으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고


It won’t be to sell you my latest lil’ sneakers

(누구처럼) 신발 팔아먹으려는 것도 아니야


It won’t be ’cause some nigga slid in my lane

어떤 놈들이 내 곁을 떠나서도 아니지


Everything grows, it’s destined to change

모든 건 진화해, 변화는 숙명적이지


I love you lil’ niggas, I’m glad that you came

Lil 래퍼들 난 좋아해, 너희들 노는 거 반갑다고


I hope that you scrape every dollar you can

너네 벌 수 있는 만큼 다 벌어


I hope you know money won’t erase the pain

근데 돈이 상처를 치유하진 못한다는 것만은 알아두라고


To the OGs, I’m thankin’ you now

난 윗세대 형님들께 감사해


Was watchin’ you when you was pavin’ the ground

이 길을 만들어 터 줄 때부터 지켜봤어


I copied your cadence, I mirrored your style

당신들의 억양을 베끼고 스타일도 따라 했지


I studied the greats, I’m the greatest right now

나는 최고를 배웠어, 그리고 지금 난 최고가 됐지


Money in your palm don’t make you real

네가 쥔 지폐가 널 진짜로 만들어주는 건 아니야


Pistol in your hand don’t make you real

네가 쥔 총이 널 진짜로 만들어주는 건 아니라고


- J.Cole 'middle child'

이 곡에서 제이콜은 기성세대와 신세대 래퍼들 사이에 낀 샌드위치의 입장에 서서 힙합 씬과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하나하나 돌아본다. 현재 미국 힙합 씬의 콘텍스트를 감안해 노래에 담긴 메시지를 추려 보면 이 정도의 느낌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나만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게 뭔 의미가 있겠어? 난 내 친구들이랑 같이 잘 살 거야. 어린 래퍼들, 난 너희들 존중해. 열심히 돈 벌라구. 대신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은 하지 마. 선배 래퍼들, 난 당신들을 존경해요. 나는 당신들의 좋은 면을 보고 배워서 지금 최고의 위치에 올랐으니까. 모든 래퍼들에게 고하노니, 너네가 번 돈과 너희들이 쥔 권력이 너희를 진짜 래퍼로 만들어주는 건 아니란 걸 알아둬."

'middle child'는 힙합의 어떤 이상적인 아이덴티티나 코어 밸류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는 좋은 레퍼런스가 된다고 생각한다. 힙합 안에서도 경쟁과 존중, 사랑과 성공의 개념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동료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친구를 지극히 아끼며, 명분 없는 싸움에 힘을 빼기보다는 발전적인 방향으로의 씬의 변모를 도모하려는 제이콜의 노력은 힙합이 어떤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노출해야 하는 가에 대한 힌트를 내놓는다.


과하거나 지나치면 보기 좋지 않은 건 장르불문이다. 음악이든 책이든 운동이든 공부든,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걸 구태여 본질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노이즈를 만들어 제대로 한번 떠보겠다는 한탕주의적인 심사나 새로운 포지셔닝에 성공하겠다는 일념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문제는 늘 본질적 균형에 있다.

착한 척하는 힙합도 괜찮잖아?

열심히 글을 적어 내려가다 보니 미국 힙합 씬의 극히 일부를 지나치게 추켜세우고 한국 힙합씬의 꿈나무와 랩 경연 프로그램을 까는 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한국 힙합씬의 루키들과 랩 경연 프로그램 두 가지 모두를 대단히 흥미롭게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비난의 의도를 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밝힌다(변명한다). 사실 미국 힙합 씬에서는 한국 힙합 씬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더러운 꼴들이 무지하게 많이 일어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음, 다만 그런 말이 하고 싶었다. 시작부터 힙합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깊숙이 뿌리 박혀 버려서 자신의 상황과 어울리지도 않는 돈 얘기나 여자 얘기만을 지나치게 늘어놓거나, 자극적인 콘텐츠를 만들고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쌈박질을 붙이는 경연 프로그램을 이제는 덜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상황 파악 못 하며 혼자 실실대는 친구를 보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그냥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좋은 메시지를 담은 힙합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것, 힙합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극적인 모습만은 아니라는 것.

필자 스눕피 (블로그)

일단 씁니다. 되도록 잘!

2020.05.1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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