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불어오는 봄바람 맞아 - 남파랑길 89코스
- 후반부의 임도구간은 걷기의 즐거움 가득한 멋진 길
- 후반부 이후 미황사까지 편의시설의 부족은 아쉬워
어느덧 봄이다. 이제는 '봄을 기다린다, 동장군의 늦은 시샘' 이런 말을 쓸 때가 아니다.
동장군은 완연하게 물러갔고 이미 남녘은 산수유꽃과 매화꽃이 한창이다. 그래서 남도의 끝, 해남과 완도를 향하는 발걸음은 즐겁다. 가장 먼저 봄을 맞이하는 장소 중 한 곳을 꼽아 걷는다면 완도와 해남을 잇는 남파랑길 89코스일 것이다.
이제는 완연한 봄맞이를 하러, 한반도의 끝으로 내려가본다.
남파랑길 89코스의 시작지점, 완도 원동버스터미널 |
완도군과 해남군이 마주보는 곳, 완도대교의 아래에 위치한 완도 원동버스터미널이 남파랑길 89코스의 시작지점이다. 인근에 위치한 기사식당에서 완도 미역국과 함께 푸짐한 백반으로 배를 채운 후 기분좋게 걷기로 한다.
남파랑길 89코스는 완도 원동버스터미널에서 달마고도의 시종착지로도 유명한 해남 미황사까지 이어지는 구간으로 총 13.5km에 약 4~5시간이 걸리는 코스이다. 중반부부터 오르막이 이어지는 코스인지라 든든히 배를 채워두는 것이 좋다. 아울러 해남 북평면 남창리를 지나면 편의시설이 전무하다는 것도 참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원동버스터미널 부근으로는 식당과 숙박시설, 편의점, 화장실 등이 잘 갖춰져 있으므로 길을 떠나기에 앞서 준비를 충분히 마칠 수 있다.
완도대교. 밑으로 어선이 만선의 꿈을 안고 지나가고 있다. |
식사를 마친 기사식당 옆으로 완도대교를 오른다. 화살표 스티커가 잘 붙여져 있어 길을 찾는데에는 어렵지 않다. 완도대교는 완도군 군외면 원동리와 작은 섬 달도를 잇는 다리이다. 대교 양 쪽으로 보행할 수 있는 다리로 안전하게 대교를 건널 수 있다.
대교의 끄트머리에서는 달도로 내려가는 표식이 있다. 작은 섬 달도는 바다와 농촌, 해조류 가공 공장 등이 들어서 있는 한적한 섬이다.
만조의 바다, 달도는 이 바다를 품은 작은 섬이다. |
작은 섬 달도. 마침 바다는 만조이다. 해안길의 바로 옆, 찰랑이는 바다는 맑디맑다. 동해의 푸른 바다가 깊은 낭만이 주는 힐링을, 서해의 갯벌 섞인 바다가 삶의 진득함을 닮았다면 남해의 청자색 바다는 풍요로움과 넉넉함을 닮았다.
이 작은 섬도 그 바다의 넉넉함에 기대어 살아간다. 다시마, 미역 등 다양한 해조류의 천국인 완도군 답게 달도에도 해조류를 가공하는 공장이 몇 위치해 있다. 그 짭쪼름한 내음이 가득한 해안길은 걷는 재미가 있다. 길에도 '개미(맛의 전라도 방언)'가 있다.
해안길을 따라 섬의 곶을 한 바퀴 돌 줄 알았으나 공장 옆으로 올라서게 되어있다. 바로 건너편 바다로 내려가 달도테마공원까지 걷는다.
달도를 한 바퀴 두른다. |
달도테마공원 |
달도테마공원은 작은 섬 달도에 조성된 공원이다.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은 물론 수영장, 개매기 체험시설 등 다양한 복합시설이 어우러진 공원으로 가족단위라면 휴가를 맞아 방문해 즐기기에 너무 좋은 공간이다. 잠시 앉아 쉬면서 바쁜 일상, 언젠가 간다고 꿈만 꿔 온 가족여행을 떠올려 본다.
아직 숙박시설이나 캠핑 공간은 조성되어 있지 않지만 여기서 아이들은 수영장, 혹은 개매기 체험으로 즐거이 놀게끔 하고 나는 해풍을 맞으며 멀찌감치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는 상상을 해 본다.
길을 걸으며 이렇게 하나하나 '다음에 올 곳'을 정리하는 것도 즐거운 상상이다. 발걸음을 옮겨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의 진형 등을 소개해 놓은 진전도첩, 사당을 본다. 인근으로 바다를 직진하면 망뫼산 아래 약샘이 있다고 하나 간조에만 드러난다고 한다. 행사담당 박도영님과 함께 주변을 배회하였으나 만조로 인해 약샘의 위치는 찾지 못했다.
진전도첩과 사당을 지나 마을길로 들어서면 도로구간을 따라 걷게 된다. 달도마을을 지나 남창교까지 그렇게 도로를 따라 걷는 구간은 조금은 아쉬운 구간이다. 오가는 차는 많지 않지만 인근의 망뫼산이나 마을길을 좀 더 조사해 다른 대안을 찾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좌측, 도보통행용의 옛 남창교와 우측, 차량전용의 새 남창교 |
남창오일장터를 지나다 |
달도의 도로를 지나 남창교에 도달한다. 차량으로는 신 남창교를 통해 완도와 해남을 오가지만 걷는이는 옛 남창교를 통해 두 다리로 바다를 건너 해남 땅에 닿는다.
해남의 북평면 남창리에서는 남창오일장터 뒤쪽으로 읍내가 조성되어 있어 식당과 편의점, 기타 편의시설 등이 잘 조성되어 있다. 출발지에서 식사나 필요한 것을 구비하지 못했다면 이 남창에서 구비하면 된다.
남창공원을 지나 남창교차로 사거리 쪽으로 나아가면 도로를 따라 아슬아슬하게 걸어야 할 구간이 나온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주변을 잘 둘러보며 오가는 차량에 유의하여 걷는 것이 좋다. 도로를 지나 비옥한 논과 밭이 펼쳐진 솔미들을 만난다.
솔미들을 따라 밭과 논을 가로지른다. |
마을로 굽어지는 길. 길의 좌측엔 달마산이, 우측엔 두륜산이 자리하고 있다. |
벌써 마늘대는 푸른 기운을 자랑하며 쑥쑥 자라고 있다. 남도의 땅을 밟을때마다 느끼는 것이 바로 이 끝 없는 '비옥함'이다. 완도도 그렇지만 해남의 흙은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명품중의 명품 흙이다. 이 흙의 기운과 영양을 받아 자라나는 농산물은 말 그대로 남도의 보물이며 한반도의 자랑이다.
솔미들을 지나 한적한 농촌마을로 길이 굽어진다. 그 길을 따라 밭을 지나고 언덕을 지난다.
이미 봄이 한 가득, 농촌의 어르신들은 밭을 일구고 농사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래서 텅 빈 마을에는 하리가 굽은 할머니 한 분이 툇마루에 앉아 볕을 쬘 뿐이다. 낯선 이의 등장에 마을 개들은 더러는 짖어대고 더러는 불이 날 정도로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한다.
달마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
홍매화가 봄을 알리고 있다. |
남창리를 지나 이진리 마을로 향한다. 완도대교를 건널때부터 좌측으로 달마산, 우측으로 두륜산을 두었지만 이제는 오로지 달마산만을 바라보며 나아간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달마산, 암릉의 멋진 풍경이 걷는이를 유혹한다.
이래나저래나 결국 저 달마산 너머 기슭에 있는 미황사에 도착해야 이 남파랑길 89코스의 여정이 끝이 난다. 나보다 며칠을 더 앞서 해남군에 들어와 두륜산과 달마산 능선, 금강산 둘레길 등을 답사한 박도영님과 함께 템포를 조절해가며 봄날의 햇볕을 만끽하며 걷는다.
계속된 강행군에 지칠법도 하건만 내색 앉고 묵묵히 걷는 그 발걸음에 겨우내 둔중해진 내 미련한 발걸음이 더해진다. 누가 누구의 걸음을 배려한다는게 무슨 의미랴. 그렇게 천천히, 누구는 촬영을 하고 누구는 기록을 하며 나아간다.
어느 이름모를 마을 초입의 매화나무 그늘 밑에서 앉아 땀을 식힌다. 시원하게 마시는 음료수 한 모금 위로 파란 봄 하늘과 화사한 홍매화의 꽃망울이 대비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오르막 구간이 시작된다. |
멋진 임도를 걷는 것은 그 자체로 힐링이다. |
논길을 지나 어느순간 골짜기 사이로 난 임도를 따라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남파랑길 89코스를 전체를 절반으로 나눈다면 완도대교, 즉 완도 원동버스터미널에서 이 임도 입구까지를 절반으로 치고 임도 입구에서 미황사 까지를 나머지 절반으로 칠 수 있겠다. 즉 89코스의 후반부는 완만한 임도를 구불구불 오르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오르막이라고 크게 걱정할 일은 없다. 숨은 조금씩 가파오고 땀이 봄볕에 스며나오지만 잘 조성된 임도, 굽이마다 보이는 남도의 산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풍경, 시원하게 땀을 식히는 바람과 새의 지저귐은 정말로 이 89코스의 최고의 힐링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예전에 해남군이 임도를 너무나 잘 관리하고 있고 그 임도만으로도 엄청난 트레킹 자산임을 알리는 기사를 쓴 일이 있다. 바로 그 기사가 이런 임도를 걷고, 보고 난 후 쓴 기사이다.
전국 어느 지자체나 이렇게 많은 임도가 있겠지만 이렇게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안내 표식을 설치하여 걷는 이에게 안전과 편의를 제공하는 곳은 드물다. 해남군의 임도, 산악 자전거나 걷기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일부러라도 구간들을 조사해서 걸어봄직하다.
이렇게 구불구불 인도를 따라 달마산까지 나아간다. |
맞은편(우측)의 두륜산의 자태를 바라보며 걷는 길 |
뒤 돌아서면 내가 걸어온 길과 다도해의 풍경이 선명하다. |
걸을때마다 탄성이 나오는 길... 이 남파랑길 89구간의 임도구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깎아지른 절벽과 기암괴석이 반겨주지는 앉지만 호젓하고 넉넉한 임도의 오르막은 부드럽기 그지없다. 어디 오르막만 부드러우랴, 그 굽이돌고 휘어나가는 길의 모습또한 유순하게 휘어진다.
그 사이에서 배움을 얻는 다면 '내려놓음'과 '순함'이다. 순함이 날섬을 이긴다. 이 길은 그것을 가르쳐준다. 헉헉대고 무리하게 도전을 해서 성취하지 않더라도, 그 발걸음이 가는 만큼, 내가 걸을 수 있는 만큼 묵묵히 걸으며 내려놓으면 결국은 그 길의 종착지가 다가온다.
욕심을 내려놓으니 굽이마다 탄성이 나온다. 그 순박하고 부드러운 산세가, 뒤 돌아서면 펼쳐지는 다도해의 풍경이, 이제 막 돋아난 새순으로 푸른 빛을 더해가는 나뭇가지가 나와 함께 걷는다. 그리고 나를 응원하며 멀어진다.
달마산의 기슭으로 들어선다. |
잠시 쉬어가기 좋은 쉼터 |
달마산을 바라보며 오르던 임도. 한참을 걷노라니 어느덧 내가 달마산에 들어오긴 한 건가, 여기가 달마산 기슭이려나?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앱을 키고 지도를 통해 확인해도 되겠지만, 사실 이렇게나 두 발로 걸으면서 미리 전자기기를 통해 확인하고픈 마음은 없다. 그저 주욱 걷다가 나오는 갈림길에서 미황사, 달마산 정상 방면의 거리를 나타내는 표지판이 나오면 그만치를 감안할 뿐이다.
아름다운 임도를 따라 걸으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길은 혼자 걸어도 옳고 같이 걸어도 옳다. 다만 여러명이서 같은 길을 동시에 걷는 것은 그 사이에 일어나는 일종의 경쟁심이나 다른 여러 것들이 방해하기에 개인적으로는 자중하는 편이다.
물론 업무로, 직업으로 걷는 구간이지만 그 걸음 속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또 들어 볼 이가 하나 있다는 것은 그 길에 재미와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는 것도 길이 내려주는 호사이다.
해남군의 임도에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멋진 구간에 잠시 앉아갈 의자 같은 시설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임도 그 자체가 온전히 편의시설이 보장되어야 할 관광자원이나 명소는 아니고 숲을 관리하고 일구는데에 필요한 도로시설이라는 태생적, 법적 한계가 있긴 하지만 이 임도를 더욱 즐거이 걸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시설이 구비되었다면 더욱 좋았을 법 하다.
멋진 나무 밑에 자리한 의자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기나긴 구간의 임도 (약 2시간 가량) 코스 내에서 쉴 수 있는 의자를 딱 한 번 발견했다. 이 부분은 지자체에서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그리 크지 않은 예산으로도 아주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너덜겅을 만난다. 달마산에 왔음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
한 참을 걸어 드디어 달마고도 표식을 만난다. 이제 미황사까지 금방이다. |
임도는 이어지고 이어진다. 어느 순간 길의 위 아래로 돌이 강처럼 흘러내린 '너덜겅'이 나타난다. 이 정도 규모의 너덜겅은 달마산에 도달했다는 증거이다. 드디어 달마산 기슭에 닿았구나, 이제 곧 달마고도를 만나겠구나! 하고 서로 말을 주고 받는다.
아니나 다를까, 약간의 경사있는 오르막을 따라 임도를 걷다가 달마산 기슭을 한 바퀴 두르는 17.74km의 달마고도 표지판을 만난다!
사전조사로는 미황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달마고도의 꽤 초입부분에서 남파랑길이 달마고도와 맞닿는 것으로 알고 있다. 즉, 이제 도착지인 미황사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떨어진 동백꽃이 꽃길을 선사한다. |
마지막까지 구도의 길을 이어가보자. |
미황사에 도착하다. |
1.5km... 미황사까지 남은 거리이다.
길고도 길게 올라온 임도가 달마고도를 만나면서부터는 내리막과 평지가 이어진 길이 된다. 그렇게 기분좋게 걷다보면 달마고도 특유의 조릿대와 높은 나무가 우거진 오솔길이 걷는 이를 반겨준다.
벌써 세 번을 완주한 달마고도이건만 이렇게 역방향으로 걷는 것은 또 처음이다. 그래서일까, "이렇게나 내려가나? 전에 이렇게나 올라왔었던가?"싶은 낯선 구간도 나온다. 그래도 곳곳이 익숙하고 편하다. 또한 남파랑길 89코스를 걷는동안 처음으로 걷는 여행자(아마도 달마고도를 걷는 것이리라.)를 만나 인사도 나누어본다.
그렇게 발걸음은 끝내 도착지인 미황사에 닿았다. 그 대웅전과 사천왕문... 처음 미황사를 찾았을 때엔 사천왕상을 봉안하기위해 덩그러니 비워져 있고 가려져 있던 사천왕문도 언제부터인가 멋드러지게 사천왕상이 자리하고 있더랬다.
미황사로만 친다면 약 4개월만에 다시 찾은 셈이다. 그 사이 해를 넘겨서도 아름답게 맞이해주는 그 입구에 서서 가만히 인사드린다.
"또한 잘 걸었습니다. 다시 또 찾아오겠습니다."
그렇게 봄날이 나에게, 걷는 이들에게 온전히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