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방황하지 않고 오페라를 관람하기 위한 몇 가지 도움말
11.18(수), 11.20(금), 11.22(일) 오페라극장
바그너의 네 번째 무대 작품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앞서 작곡된 <요정Die Feen>, <연애 금제Das Liebesverbot>, <마지막 호민관 리엔치Rienzi, der Letzte der Tribunen>로 이어지는 세 편의 습작 오페라의 뒤를 잇는 작품이다. 대본은 바그너가 직접 집필했으며,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의 이야기 묶음집인 「슈나벨레봅스키 경의 회상Memorien den Herrn von Schnabelewopski」(1834)과 빌헬름 하우프 저서 「유령선 전설Die Geschichte von Gespensterschiff」(1826) 등에 언급된 유령선 이야기와 구전되던 유령선 관련 민담들을 바탕으로 했다.
바다를 헤매던 유령선, 바그너의 펜 끝에서 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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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선에 관한 이야기는 18세기 무렵부터 영국의 뱃사람들 사이에서 구전되던 이야기를 그 원류로 보고 있다. 구전되는 이야기의 특성상 세부적인 내용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네덜란드인 선장이 바람과 신을 모욕하였다가 그 벌로 저주를 받게 되어 배는 가라앉지 않는 유령선이 되고, 선장은 최후의 심판 날까지 죽지 못하고 바다를 영원히 떠돌게 된다는 동일한 개요를 가진다. 유령선이 문헌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조지 배링턴이 저술한 1795년 작 「보타니 만으로의 항해Voyage to Botany Bay」이다. 여기에 실려 있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네덜란드인 선장이 이끄는 배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 근처에서 조난하여 배에 탑승하고 있던 승무원 전원은 사망했다. 동행했던 한 척의 배는 무사히 케이프 지방에 도착한 후 유럽으로 귀항한 뒤 다시 희망봉 근방의 해역으로 돌아왔는데, 다른 한 척이 조난 사고를 당했을 때와 같은 위도에 다다랐을 때, 사고를 당한 배의 형상이 망루를 보던 선원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케이프 지방의 항구에 도착해서 망루에 있던 선원이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고, 당시 목격된 유령선은 이후 ‘플라잉 더치맨 호’로 칭해졌다고 한다.”
1821년에 발간된 「블랙우드 매거진Blackwood's Magazine」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70년 전(1751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출항한 후 소식이 두절된 선박이 목격되었다는 소문이 있다. 당시 선장은 헨드릭 판 데어 데켄Hendrik van der Decken이라는 네덜란드 출신의 뱃사람이었다. 이 선박은 케이프타운 항으로 향하던 중 테이블 만에 진입하기 직전 심한 역풍이 불어 선장이 바람을 향해 욕설을 날렸다. 결국 선박은 만에 진입하지 못하고 날은 저물었다. 밤이 되어 바람이 선장에게 ‘오늘 밤 안으로 만에 들어갈 생각인가?’ 하고 물었더니 선장이 ‘최후의 심판이 있을 날까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들어가고 말테다’라고 답했다. 결국 선박은 지금도 테이블 만에 들어가지 못한 채 근해를 떠돌고 있으며, 악천후 때에만 목격된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유령선 이야기마다 선장은 네덜란드인으로 설정되어 있고 선박의 이름은 ‘플라잉 더치맨 호’로 불리고 있어, 영어권에서 ‘플라잉 더치맨Flying Dutchman’은 고유명사로 ‘유령선’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폭풍우 속 구사일생의 경험이 작품 안으로
바그너는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Riga의 극장에서 음악감독을 맡고 있던 시절에 하이네의 저서를 접하였고, 유령선에 관한 이야기에 영감을 얻어 오페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얼마 후 실직하고 채무에 시달리다가 야반도주를 감행하여 1839년 여름, 프랑스 파리로 이동한다. 프랑스로 향하던 항해 도중 심한 폭풍우를 두 번이나 만났다. 한 번은 표류하던 끝에 노르웨이 연안으로 피선했는데, 배를 멈춘 곳이 오슬로 근교에 있는 산비카Sandvika 앞바다였다. 바그너는 이때의 경험을 폭풍우의 음악과 1막의 장면에 그려내고 있다. 험난한 여정을 거쳐 파리에 도착한 바그너는 계속 일자리를 알아보았으나 제대로 된 자리를 구하기는 어려웠고, 번역 및 편곡 등의 일을 받아 간신히 입에 풀칠하면서 사는 수준이었다. 바그너는 그 와중에도 창작 활동을 이어나갔고, 1840년에 그랜드 오페라 <리엔치>를 완성한 후 바로 <방황하는 네덜란드>의 작곡에 착수했다. 1841년 11월 5일, 바그너는 막 탈고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자필 초고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어두운 밤, 곤궁한 가운데 가시밭길을 지나 영광의 세계로.
신이여, 은혜를 베푸소서.”
바그너는 곡을 완성한 직후 퇴고 수준의 개정 작업을 시행한다. 이후 그는 라이프치히와 베를린 등지에서 이 곡을 공연하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마침 전작인 <리엔치>를 성공적으로 마쳤던 드레스덴 궁정 오페라와 연결이 되어 1843년 1월 2일 첫 공연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성공작이었던 <리엔치>와는 달리 이 곡은 당대의 관객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초연 이후 20여 년간 잊힌 작품으로 남게 된다.
![]() 바그너가 직접 쓴 메모와 함께 출판사에 보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악보 |
이후 1860년 파리에서 다음 작품인 <탄호이저>를 상연하기 위해 발레를 추가하는 등의 작업을 하면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개정도 같이 하게 되는데, 1843년 초연 판본에 없었던 젠타의 투신 및 네덜란드인의 구원 장면을 추가하는 등 몇 군데를 고친 후 현재의 모습을 갖추어 재차 무대에 올리게 된다. 1860년의 개정판에 의한 1865년 드레스덴 공연은 초연 때와는 달리 성공을 거두었고, 1870년에는 비록 이탈리아어 번안 공연이기는 했지만 런던에서 첫 해외 공연도 열었다. 바그너 사후인 1884년에는 모두 100회 공연을 기록했다.
마침내 바그너의 색채가 드러나다
![]() 리하르트 바그너 「Instauration magazine」, November 1976 |
바그너는 앞서 이야기한 세 편의 초기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독일 낭만 오페라,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 프랑스의 그랑 오페라 등의 어법을 연습한 후 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작곡함으로써 비로소 자신만의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작품의 부제는 ‘3막으로 구성된 낭만 오페라’로, ‘유령선’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베버, E. T.A. 호프만, 마르슈너 등으로 이어져 온 인간 세계와 초현실 세계의 접촉을 통해 사건이 진행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어, 독일 낭만 오페라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기본 어법을 따르고 있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장면마다 번호가 붙어 있는 전통적인 오페라의 형식이지만, 인물이나 사물, 사건 등을 암시하는 시도동기示導動機, Leitmotiv가 적극적으로 도입되었고 음악과 드라마를 통합하기 위한 기법인 무한선율도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구분이 이전 작품들에 비해 희미해지고, 아리오소 형식의 낭창朗唱, Sprechgesang이 많이 도입되어 무한선율이 효과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도드라지기 시작한다.
바그너가 곡을 기획할 때부터 단막극 형식으로 마무리하려고 생각했다는 것 또한 이 곡이 오페라에서 악극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전술한 대로 바그너는 작곡 당시부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단막극 형식으로 기획하고 있었으나 19세기 중반의 무대 기술로는 장면 전환 음악이 연주되는 도중 무대를 빠르게 전환할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이유에다가 3막의 오페라가 주류를 이루던 당시의 관례도 있어, 바그너 생전에는 부득이하게 3막이 분리된 판본으로 연주되었다. 다만 바그너는 언젠가 이 곡을 단막극의 형식으로 공연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여, 단막극 형식으로 각 막을 연결하여 연주할 수 있도록 미리 막 사이사이의 경과구를 작곡해 두었다. 그리고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지 18년이 지난 1901년,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리스트의 딸이자 바그너의 미망인이었던 코지마의 주도로 바그너가 의도했던 바에 따라 단막극 형태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전동기로 구동되는 기계식 장치가 도입되는 등 19세기 중반에 비해 진일보한 무대 장치에 힘입은 결과였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톺아보기
하나. 바그너의 초기 오페라 작품들은 과거에 한국에서도 선을 보인 바가 있으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해방 후 지금까지 단두 번 공연되었던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을 바그너의 의도대로 단막극 형식으로 공연할 경우 막간 휴식 없이 약 2시간 20분 정도의 연주 시간이 소요되는데, 그동안 출연하는 가수들은 긴장을 풀지 못하고 지속해서 무대 출입을 해야 한다. 이 상황에서 가수들에게 가해지는 부담이 보통 막간 15분에서 30분의 휴식 시간이 발생하는 다른 오페라 작품에 비해 큰 편이다. 상대적으로 막간 구분이 확실한 작품이 국내에 많이 소개되는 데에는 이러한 점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상대적으로 독일어 대본으로 된 오페라의 공연 비중이 비교적 낮은 한국 공연계의 성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둘. 일반적으로 이 작품은 ‘여성의 사랑과 희생을 통한 구원’이라는 바그너의 인생을 관통하는 주제가 처음으로 무대에 구현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곡이 처음 작곡되었을 때, 바그너는 네덜란드인이 실망하여 떠나가는 장면으로만 마무리했으며 젠타의 투신 장면은 존재하지 않았다. 파리에서의 상연을 위해 개정을 할 때 젠타의 투신 장면과 네덜란드인의 승천 장면이 추가되었고, 이로 인하여 작품의 결말에 동화적인 요소가 부각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이 작품은 ‘여성의 사랑과 희생을 통한 구원’이라는 주제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작품으로 인식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선 이후 이러한 동화적인 분위기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대두하기 시작했고, 현재의 연출 사조에서는 구원 자체가 허상이라는 관점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근래에 무대에 올라가는 이 작품의 연출 성향은 이러한 주제에 대한 냉소가 기저에 깔린, 심지어는 구원 자체가 부정되기에 이르는 경우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글 곽태웅 (의사, 한국바그너협회 회원)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5년 11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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