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를 바라보는 선량한 상상력, '위키드'
약함과 악함; 당신은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싫음(嫌)과 미움(惡)
오랜만에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폭풍 수다’를 떠는 중에 집 전화로 중요한 전화가 왔다. 등돌리고 앉아 통화를 하고 있는데 친구가 자꾸 어깨를 두드렸다. 통화 중인데 얘가 왜 이러나 싶어 돌아봤더니 바퀴벌레 한 마리가 나를 향해 질주해 오고 있는 거다. 으악. 피하라고 신호를 준 셈인데, 전화를 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놈을 도망가게 놔둘 수도 없는 이 상 황에 손에 잡을 것이라곤 과일 먹고 손 닦았던 휴지 두 칸밖에 없는 거다. 이걸로 잡을 수 있을까. 손에 닿는 느낌을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리는데. 하지만 저놈을 살려 보낼 수는 없다. 망설인 끝에 두 칸 휴지로 그놈을 때려잡을 수 있었던 힘은 오로지 하나다. 진짜, 정말, 너무너무 싫다! 병균을 옮긴다는 이성적 이유보다 발등을 기어오르는 감각적 느낌이 더 끔찍하다. 보기도 싫고 가까이 오는 건 더 싫고 몸에 닿는 건 더더욱 싫다.
무언가가 너무 싫을 때 보통은 그것을 피하게 마련이다. 전화선만 아니었다면 나도 얼른 피해버렸을 거다. 감각적 차원에서의 싫음은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피하고 싶은 게 어디 벌레뿐이겠나. 싫은 사람은 안만나고 싶고, 싫은 음식은 안먹고 싶고, 싫은 영화는 안보고 싶다. 경험적인 차원에서도 사람은 뭔가가 싫으면 의도적으로 자기를 격리시킨다. 싫음은 이래저래 자기 기준에 초점을 맞춘, 거리 두기의 에너지인 셈이다. 그런데 이 거리 두기가 왜곡될 때 싫음의 감각은 미움의 감정으로 번진다. 미움이란 싫음의 감각에 구체적인 대상이 생기는 것을 가리킨다. 본능적인 거부의 대상이 ‘너’가 되어버 리는 것이다. 싫음의 에너지는 자기를 격리시키지만 미움의 에너지는 상대를 향해 돌진하는바, ‘나는 싫다’의 개인적 감각은 어느새 ‘네가 싫다’의 대상을 향한 적대적 감정으로 바뀌어버린다. 원래 미움이란 여러 맥락이 깔린 복잡한 감정이다. 사랑하기에 미워하기도 하고, 뜻이 어긋나 미워할 수도 있다. 이런 미움에는 이유가 있다. 그래서 때로 극복되기도 하고 때로 생산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본능적인 거부감과 연결된 적대감에는 그런 게 없다. 그냥 싫고(嫌) 그저 미울 뿐이다(惡).
이렇게 보자면 사람을 향한 혐오는 감정이라기보다는 태도에 가깝다. 감정이란 상대와 내가 연결되어 있을 때 생겨나는 상호적인 에너지이지만 혐오는 상대방이라는 존재를 자기불쾌의 이유로 삼는 일방적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방적인 태도에는 싫음에서 나타나는 자기보호의 기제가 크게 작동한다. 자기불쾌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불쾌함의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전가하는 식이다. 사람을 향한 혐오가 위험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차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 이러한 태도는 결국 상대방의 인격성을 훼손하고야 만다. 타자에 대한 공격성은 혐오의 또 다른 본질인 것이다. 따라서 혐오는 언제나 사회적 문제일 수밖에 없다. 지금 혐오가 횡행한다면 지금 사회를 살펴봐야 한다.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가. 사회적 불안정, 경제적 불평등, 기회의 박탈, 불확실한 미래 등등. 모든 게 불안할 뿐이다. 혐오는 이런 불안을 다른 집단에 투사시키며 공고해진다. 본능적 거부감과 섞인 불안의식 속에서 서로의 존재는 끔찍해지고, 끔찍한 대상을 향한 적대의식은 폭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사람에게 바퀴벌레가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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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가 악惡인 이유
길고 긴 혐오의 역사 속에서 ‘바퀴벌레’가 되어 버린 사람들은 누구일까. 시대를 초월하는 공통점이 있다면 혐오는 언제나 약한 자들을 향했다는 사실이다. 힘으로나 숫자로나 위치로나 중심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더랬다. 강자를 향한 폭력은 종종 혁명이 되었지만 약자를 향한 혐오는 예외 없이 잔혹했다. 마녀재판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여성혐오의 전형을 꼽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례가 바로 마녀재판이다. 요즘 여성혐오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지만 사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고대사회에서부터 임신하고 출산하는 여성의 몸은 오염의 원천으로 취급받아 왔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오염된 여성과 접촉하도록 남자를 유혹하는 동물적 본성으로 비난받아 왔으니 말이다.
마녀재판의 명분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마녀를 규정하는 기준은 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신학의 시대였던 중세에 악마론이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 벌써 이상하지 않나? 신학자들이라면 신에 집중할 것이지 악마에게 집착하다니. 마녀라는 개념 자체가 ‘만들어진 악’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 악의 개념이 우습다. 여성의 본성 자체가 악마와 통한 다는 것이다. 예를 드는 악마의 본성이란 게 이렇다. 사람이건 신이건 잘 믿고, 감정이 풍부해 마음이 오락가락하고, 말하는 걸 좋아해 입이 가볍고, 신체적 힘이 약한 것 등등. 여성(femina)이라는 단어 자체가 신앙(fe)의 결핍(minus)을 가리키는 말인바, 여성성 자체가 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주경철, 「마녀」, 192쪽). 여성의 약함은 그대로 악함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약함은 단순히 생물학적 특성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신분이 높은 유력한 집안의 여성이 마녀로 몰린 경우는 아주 드물었고, 가난하고 많이 배우지 못한 채 늙어 성격이 거칠거나 결혼 안 했는데 성욕이 강해 보이는 여자들이 주로 마녀로 희생되었음을 떠 올려보자. 사회적 약자는 누구든 악마로 왜곡되었던 거다. 마녀의 범주는 어린아이, 임산 부를 비롯해 심지어 남자들로까지 확장되었다. 마녀재판에 담긴 여성혐오는 약자를 향한 사회적 폭력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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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녀재판의 진짜 악마성은 서로가 서로를 악마로 몰게끔 했다는 데 있다. 어떤 사람이 마녀임을 확증하려면 가장 가까운 이웃의 증언이 필수적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 온 사람들은 잔뜩 겁에 질린 채 이웃의 마녀 행각을 재판장이 불러주는 대로 증언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마녀로 몰리는 상황에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 다. 마녀라는 누명을 벗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모르는 사람이건 아는 사람이건 아무라도 마녀집단의 일행이라고 고발해야만 했다. 일단 마녀로 몰린 이상 누군가를 악마로 만들지 않으면 스스로 살아날 방법은 없었던 거다. 이웃이 이웃을, 친구가 친구를, 남편이 아내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자기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마녀로 고발하고, 그 죄책감을 은폐하기 위해 또 마녀를 만들어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 의해, 친밀했던 사람에 의해, 또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마녀의 이름표를 달고 죽어갔다. 마녀재판이 없애버린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였으니,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공포가 되어 버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협이 되는 사회. 그 어떤 관계도 따뜻하거나 안전할 수 없는 곳에서 함께 살아감의 가치는 무너지고 만다. 모두가 잠재적 마녀인 세상에서 일상의 터전은 지옥이 되어 버린다.
이 ‘사람’을 보라
단테는 지옥 앞에서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희망을 버리는 것이 희망을 붙잡기보다 훨씬 더 쉽다. 가치와 의미는 어려운 쪽에 있는 법. 희망을 붙잡기 위해서는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 그 어려운 일은 약함을 악함으로 치부하는 이곳에서 내가 약한 자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모두 강자가 되고 싶은 이곳에서 여성으로, 박봉의 비정규직으로, 일자리 없는 청년으로, 장애인으로, 외국인 노동자로, 성소수자로 살면서 몸과 마음에 패인 상처를 숨기지 않는 것이다. 서로가 자기의 약함을 드러내고 그 연약함을 서로 감쌀 때 희망은 관념이 아니라 행동이 된다. 강남역에 자발적으로 모여 희생자의 참변을 자기가 당했을 일로 받아들이는 수많은 여성의 추모와 구의역에서 사고를 당한 어린 노동자의 사연이 남의 일이 아님을 고백하는 시민들의 눈물은 절망이 빚어낸 희망일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 희망은 연극적 상상력에 진작부터 스며 있었다. 불길한 마법으로 다른 이를 죽이고 자기 자식까지 살해하는 메데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마녀이다. 하지만 에우리피데스가 그를 보는 시선은 신화와 다르다. 에우리피데스는 메데이아에게서 검은 피부의 이방인이 당하는 소외를 보았다. 메데이아는 여성을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그리스에서 여성으로서의 권리를 외쳤기에, 그리스인들에게는 ‘위험한 야만인’으로 터부시 됐던, 배신당하고 추방당한 가련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리스 비극 「메데이아」의 주인공은 무서운 마녀가 아니라 약한 소수자였다.
독립전쟁 이전 세일럼에서 실제 있었던 마녀재판을 소재 삼은 아서 밀러의 「시련」의 상상력도 이와 비슷하다. 마녀재판에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주인공은 존 프락터이다. 그는 결혼서약을 어기고 부정을 저지른, 도덕적 결함을 지닌 남자이다. 하지만 그가 자기의 수치를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며 자기가 죄인임을 자처할 때 도덕의 위선에 사로잡힌 이들이 누구인지는 자명해진다. 악의 실체를 밝히는 이는 도덕적 흠결이 있는 이 사람이다.
뮤지컬 <위키드>의 주인공도 마녀이다. 선량한 동화의 상상력은 초록마녀를 외롭게 두지 않는다. 그의 곁에는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믿어주는 친구도 있다. 끝내 함께 살지 못하고 떠나야 하지만 초록마녀의 미래는 절망이 아니다. 이 애틋한 연대가 곧 희망일테니 말이다.
뮤지컬 <위키드> 7.12(화) - 8.28(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글 정수연 (연극학 연구자)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6년 7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