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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

스무 살,
진짜 연주는 이제부터

by예술의전당

# 지난 5월 30일 뚜껑이 열리기 전까지 모두가 반신반의했다. 콩쿠르 결선 진출자 열두 명 중에 물경 세 명이 한국인이건만, 심사위원 중에는 이들의 스승도 있건만(물론 스승은 제자 연주에 점수를 매길 수 없다) 실력뿐 아니라 체력과 운까지 따라줘야 하는 지난한 여정의 끝, 행운의 여신은 언제나 한국인 연주자를 비켜갔으므로.


세 명의 한국인 결선 진출자 중에서도 다소 생경했던 임지영의 이름은 그래서 신선하게 들렸다. 러시아 차이콥스키 콩쿠르, 폴란드 쇼팽 콩쿠르와 함께 세계 3대 콩쿠르로 불리는 벨기에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우승자로 한국 바이올리니스트가 처음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 본 우직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는 ‘나이에 비해서도’ 앳된 얼굴과 대비 효과를 일으키며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그 승리의 밤, 그녀는 인파에 둘러싸여 축하 인사를 받았고 몇 통의 전화 인터뷰를 했으며 꿈에 그리던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과 기념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린 후 숙소로 돌아와 쓰러졌다. 겁 없이 무대를 장악했던 연주자는 스무 살 숙녀로 돌아왔다.


# 금의환향 무대는 다소 소박했다. 우승 한 달여 만인 7월 11일, 그녀는 국내 연주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이올리니스트 신아라, 웨인 린과 비올리스트 홍웨이 황, 첼리스트 박상민으로 구성된 실내악단 ‘서울 스트링 콰르텟’의 연주회였다. 신아라를 대신해 연주회에 참여한 임지영은 모차르트의 세레나데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베토벤 현악 4중주 ‘하프’, 드보르자크의 피아노 5중주를 ‘원래 멤버인 것처럼’ 연주해나갔다. 활의 강약 조절, 현의 떨림, 음의 속도가 적재적소에서 필요한 만큼 작동하는 경제적인 연주. “콩쿠르 우승보다 우승이후 다음 콩쿠르 우승자가 나올 때까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찍이 알았던 임지영은 소박한 무대를 감사히 여기는 영민함과 열 살 이상 많은 선배 연주자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배포를 보여줬다.


그리고 그녀는 레퍼토리를 하나씩 늘려갔다. 그달 말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피아니스트 김다솔과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a단조’를, 손열음과 비에니아프스키의 구노의 ‘파우스트 주제에 의한 화려한 환상곡’을 연주했다. 우승 후 벨기에, 룩셈부르크, 폴란드, 미국, 일본 등에서 수십 번의 연주회를 열면서 자신감도 더 늘었다. 지난 10월 28일 금호연세 개관 연주에서 임지영은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3번, 그리그 바이올린 소나타 3번, 예뇌 후바이의 ‘카르멘 판타지 브릴란테’를 차례로 연주했다. 전날 같은 곡들을 한 번씩 선보였던 두 사람은 확신에 찬 해석, 오차 없는 기교로 무대를 장악했다.

‘임지영다운’ 연주

스무 살, 진짜 연주는 이제부터 스무 살, 진짜 연주는 이제부터

2015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연주


11월 초 우승 특전으로 주어진 미국 워싱턴 D.C. 리사이틀을 끝낸 후 전화로 만난 임지영은 “콩쿠르 우승 후 가장 달라진 점은 연주 잘하는 학생에서 연주자로 봐준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쇄도하는 연주회 러브콜도 이전과 달라진 점이다. “이전까지는 레슨 할 때 김남윤 선생님이 큰 틀에서 방향을 제시해주셨다면, 이제는 토론하는 식이 됐죠. 원래 학생들의 연주 방식을 존중해주시는 편이었지만요.” 4년 전 임지영이 대학에 입학한 때부터 그녀를 가르친 김남윤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교수는 이번 콩쿠르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퀸엘리자베스 콩쿠르는 결선에 오른 열두 명을 브뤼셀 샤펠 음악원에 8박 9일간 머물게 하는 독특한 평가 방식으로 유명하다. 바이올린 부문을 심사한 올해는 5월 첫째 주에 1차 시험, 둘째 주에 2차 시험이 있었고 셋째 주 열두 명의 결선 진출자들이 차례로 샤펠 음악원에 입성했다. 휴대폰도 인터넷도 쓸 수 없는, 오로지 먹고 자고 연습하는 것만이 허용되는 이곳을 결선 진출자들은 ‘럭셔리 감옥’이라고 부른다.


8일간 결선 진출자들은 자유곡 한 개와 지정곡 한 개를 연습해 마지막 9일째 연주하는데, 지정곡은 출판되지 않은 협주곡이 과제로 나온다. 연주자들이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악보를 해석하고 표현하는지를 가늠해보기 위해서다. 올해 지정곡은 스위스 작곡가 마이클 자렐의 ‘구름만큼이나 적다’. 그녀는 “스스로 연주해낼 때까지 기다려주신 선생님의 가르침이 결선에서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제가 아는 모든 선생님들은 잔소리를 많이 하세요. 악보에 손가락 번호를 다 정해주고, 활을 얼마나 크게 켜야 하는지도 알려주시죠. 김남윤 선생님은 제방식대로 준비해 연주하면 크게 거슬리는 부분만 잡아주는 식으로 가르치시죠. ‘아, 내 음악을 존중해주시는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어요. 이런 가르침이 결선에서 혼자 초연할 때 엄청난 도움이 됐죠. 어떻게 해야 나다운 거라는 걸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요.”


또 하나의 변화는 바이올린이 바뀌었다는 것.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에서 지원받은 이탈리아 고악기, 주세페 과다니니의 1794년산 크레모나를 들고 콩쿠르에 출전한 임지영은 우승 부상으로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의 1708년산 허긴스를 4년간 임대했다. 우승 당일 호기롭게 “시상식에서 악기 받으면 연주해보고 어떤 바이올린을 쓸지 결정하겠다”고 대답했던 임지영은 8월 ‘금호악기시리즈’ 연주회를 끝으로 크레모나를 반납하고 허긴스로 연주하고 있다. 그녀는 “과다니니는 음이 동글동글하면서 반짝거리고 스트라디바리우스는 굉장히 묵직한, 비올라 같은 소리가 난다. 두 바이올린 성격이 워낙 달라 뭐가 더 좋다고 말하긴 어렵다”고 했다.


“과다니니 후원받은 게 작년 5월이었는데, 굉장히 관리가 잘 된 상태였어요. 명기도 연주자와 궁합이 맞아야 해서 길들이는 데 적어도 1년은 걸리죠. 작년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3위)부터 차례로 콩쿠르에 출전하면서 소리가 ‘임지영스럽게’ 변했고 퀸엘리자베스 때, 그 악기에서 뽑아낼 수 있는 최적의 소리를 낼 수 있는 타이밍이었어요.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음악가 낯가리는 걸로 유명한데(웃음), 다행히 악기 소리 틔우는 데 고생하진 않았어요. 워낙 연주가 많이 잡힌 탓인지 잡은 지 한 달 즈음부터 소리가 안정됐는데, 최상의 소리를 내고 있는지는 아직 잘 몰라요. 1년은 연주해봐야 알 것 같네요.”

스무 살이니까요

스무 살, 진짜 연주는 이제부터

© Rami Hyun

물론 우승 후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한국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순수 토종’이란 수식어를 달게 된 그녀는, 몇 년간 한국에 더 머물며 김남윤 선생을 사사할 것임을 수차례 밝힌 바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 “(예비학교 생활까지 합해) 10년 만에 한예종을 졸업한다”는 임지영은 얼마 전 다시 한예종 음악원 전문사 과정에 원서를 넣었다고 말했다. “레퍼토리를 늘리려고 할 때는 (김남윤) 선생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란다. “콩쿠르 이전에는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작품을 많이 연주했는데, 이후에는 색채가 뚜렷한 음악을 연주하고 싶어졌어요. 요즘에는 러시아 프로코피예프 소나타를 자주 듣고 연습하죠. 프랑스 드뷔시, 라벨 소나타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요. 10대에서 20대로 성숙하면서 새로운 음악에 눈도 뜨이는 거 같아요. 최근에 유럽에 자주 가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그 나라 문화를 경험하게 되는 면도 있고요.”


지독한 연습도 변하지 않았다. 농담 반 진담 반 “제 취미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임지영은 열네 살에 예원학교에 들어간 후 콩쿠르 우승 전까지 하루 10시간씩 바이올린만 켜는 혹독한 연습을 반복했다. 우승 후 밀려드는 연주회로 연습 시간은 하루 네다섯 시간으로 줄었지만, 연주 레퍼토리는 이전보다 확연히 늘었다.


임지영은 “연습은 너무너무 정직해서 한 만큼 결과가 나온다”며 “시차 적응 못 해 해외 공연 가서 밤 12시, 1시에 호텔에서 잠을 깨면 억지로 더 자려고 하지 않고 약음기를 달고 연습한다”고 말했다. “연습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고 무대에 올라가면 떨리더라고요. 제가 저를 못 믿는 거죠. 그걸 알게 된 이후로 연습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발전하는 제 모습이 좋았어요. 연습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소 음악에 대해 얼마나 연구하느냐가 정말 중요한 거 같아요. 고민 없는 연주는 ‘육체적 반복행위’거든요. 감각을 몸으로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작곡가의 작품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전환해서 해석해보려고 하고, 그 해석이 완결되지 않으면 활을 잡지 않으려고 해요. 발상의 전환이 매번 오진 않지만요(웃음).”


우승 후 가장 많이 연주한 곡은 결선에서 선보인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77 “무대에서만 스물다섯 번은 연주한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떤 임지영은 “그래도 공연 전 만족할 만큼 연습이 덜 돼 있으면 불안하다. 무대 오르기 5초 전 ‘악보 까먹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라며 웃었다.

“브람스 협주곡은 남성적이고 힘이 필요한 곡이에요. 바이올린 협주곡 중에서도 긴 편이라 집중력도 필요하고요. 다른 협주곡은 대개 집중할 부분이 정해져 있어서 완급조절이 가능한데, 브람스는 그런 지점이 없어 끝까지 집중해야 하죠. 연주가 까다롭고 정석대로 연주하지 않으면 잘못을 잡아내기도 쉬운 곡이죠.”


12월 13일 콘서트홀에서 임지영은 지휘자 샤오치아 뤼, 서울시향과 함께 자신의 출세작,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다. 예술의전당이 올해 처음으로 기획한 스페셜 스테이지로, 해외 콩쿠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젊은 음악가를 선정해 국제적 명성의 지휘자와 협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마련됐다.


“대중매체가 바뀌면서 클래식 음악도 많이 영향을 받아요. 앨범이나 영상으로 예전 거장의 연주를 기억하는 관객들에게 제 연주가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고민하죠.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제 자신을 지키는 연주, 그러면서도 많은 팬들이 납득할 만한 연주를 하는 게 목표예요.”

 

글 이윤주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5년 12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