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라이온 킹' 인터내셔널 투어 - 공연이 돌아가야 할 제자리

[컬처]by 예술의전당

뮤지컬 <라이온 킹 인터내셔널 투어> 1 . 9 ( 수 ) - 3 . 2 8(목) 오페라극장

 

소문으로 먼저 회자하는 작품들이 있다. 주로 관객들의 입소문을 통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갈수록 커지는 경우인데, 요즘의 <라이온 킹>이 딱 그렇다. 초연된 지 20년이 넘은 작품이고, 해외에서든 2006년의 국내 초연에서든 이미 관극한 관객들이 적잖을 텐데도 이번 인터내셔널 공연을 향한 관객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열풍’ 수준이다.

 

2018년 말에 대구 공연이 끝났을 때 공연을 본 친구에게 소감을 물었지만 제대로 된 문장으로 대답을 듣지 못했다. 두 배로 커진 눈동자에 엄지손가락을 곧추세우며 감탄사를 반복하는 관객이 비 단 친구뿐이었을까. <라이온 킹>은 ‘스펙터클이 공연과 원래 동의어’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가장 앞자리에 선 작품이다. 스펙터클의 밀도로 꽉꽉 채웠을 때 2시간 남짓한 공연 시간이 경험의 시간으로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지, 관객들은 처음이거나 오랜만에 느꼈을 게 분명하다.

‘본다는 것’의 즐거움

뮤지컬 '라이온 킹' 인터내셔널 투어

Mufasa and Scar - THE LION KING - Photo by Joan Marcus ⓒDisney

<라이온 킹>이 지금의 관객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단지 이 작품의 유명세 때문만이 아니라, 지금껏 봐왔던 뮤지컬이 관극의 자산으로 쌓였기 때문일 것이다. 라이선스 뮤지컬의 전성시대를 지나 이제는 크고 작은 창작 뮤지컬을 만들어 내는 역량이 조금씩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 지금, 관객은 그 발전의 과정을 함께해 오며 저변을 확장했을 뿐 아니라 ‘좋은 뮤지컬’의 기준을 스스로 높여 왔다. 관객의 발전된 취향과 완성도 높은 작품이 만났을 때 시너지 효과는 극대화된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보는 맛’은 이미 아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원작 애니메이션의 놀라운 표현력을 공연예술의 문법으로 얼마나 똑같이 재현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관객은 압도되기 시작한다.

 

확인하는 재미란 결국 반복의 재미이지만, 매체를 달리할 때 반복은 똑같으면 똑같을수록 오히려 새로워지는 역설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 역설은 경이로움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사바나 초원에 태양이 떠오르며 초원의 모든 동물이 모이는 첫 장면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무대 위에서 재현되는 애니메이션의 모든 장면은 마술과도 같은 순간을 만들어 내고, 일상 의 예측을 뛰어넘는 공연의 상상력은 상식적인 극장 공간을 마술적인 공간으로 순식간에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공연예술이 가질 수 있는 상상력의 극대치가 이 작품에 농축된 셈이다. 20년이 넘는 시간을 통과하며 전 세계를 아우를 수 있는 ‘글로벌한’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뮤지컬 <라이온 킹>은 명쾌하게 보여준다.

‘보여주는 것’의 본질

뮤지컬 '라이온 킹' 인터내셔널 투어

Nala and Simba - THE LION KING - Photo by Joan Marcus ⓒDisney

그런데 이 작품의 상상력은 여러 면에서 흥미롭다. 애니메이션을 무대화하기 위해서는 혁신적인 기술력이 필수겠지만, 정작 그 기술을 통해 완성하는 공연의 만듦새는 지극히 원형적인 원리를 지향하니 말이다. 일단 재료부터가 고전적이다. 가면이나 인형을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그림자극을 재현하는 방식이나 바퀴를 활용한 수레 무대를 사용하는 모양새 역시 그렇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전통극에서 사용하는 오래된 낯선 재료들은 현대적인 장르의 옷을 덧입으며 세련된 상상력의 도구로 탈바꿈하는바, ‘오래된 미래’라는 말은 공연에도 적용되는 금언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면모는 무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의 무대는 의외로 간결해서 최소화된 장치에 공간은 자주 비어 있다. 물론 상황에 맞게 장면의 스펙터클이 구현되기도 하는데, 일례로 소 떼가 질주 하는 장면이 그렇다. 여기서는 르네상스 방식의 원근법이 멋지게 적용되는데, 전방과 후방의 인형의 크기를 달리해서 입체감을 살리는 방법은 아시아의 전통 인형극에서 주로 사용하던 고전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굉장한 장면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색조다. 채색하듯 공간을 감싼 아프리카의 원색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해서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순간에도 아름답기만 하다. 무대의 색감과 음영을 보는 것만으로도 보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그래도 가장 도드라지는 원형의 요소는 단연 배우다. 가면이나 인형을 덧입은 채 동물의 몸짓에 인간의 신체를 맞춘 배우들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스펙터클이다. 예로부터 동물을 흉내 내는 것은 아 무나 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니었다. 동물 연기는 배우의 역량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원형적인 연기술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고대 그리스의 희극배우인 파르메논이 돼지를 흉내 낼 때 그를 질투하던 한 사람이 무대에 진짜 돼지를 던져 넣어 그를 망신 주고자 했지만, 오히려 파르메논의 연기가 더 돼지 같다는 사실을 보고 관객들이 열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동물을 흉내 내는 연기를 중요시한 것은 인간이 다른 존재가 되는 과정을 보여줄 때야말로 배우가 관객에게 가장 완벽해지는 순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다움을 만들어 내기 위해 비사실적인 움직임을 무한히 훈련한 배우를 관객으로 하여금 알아보게 하는 전략이라고나 할까. 연출가 줄리 테이머가 말한 ‘더블 이벤트’가 바로 이것이다. 더블 이벤트란 ‘무대에서 표현되는 동물과 그것을 표현하는 배우의 기술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인데, 이 작품의 배우들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더블’의 역할을 너끈히 해낸다. 연기자이자 동시에 조종사이고, 노래 부르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마임이스트이며, 동물임과 동시에 사람을 연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배우들은 주연에서부터 앙상블에 이르기까지 연기의 영역에서 평등하다. 공연 팸플릿에 배우의 이름을 알파벳 순서로 소개하는 것은 기계적인 관례가 아닌 셈이다. 배우로서의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는 완벽하게 동물이 돼야 하는바, 동물은 개별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어우러지는 자연의 모습으로 드러날 때 가장 돋보이게 마련이다. 세계적 뮤지컬 중에 스타 배우라는 개념에서 이만큼 자유로운 작품도 없을 터다. 관객은 배우의 매력이 아니라 배우의 연기를 그 역량에 감탄하며 보고 또 본다.

‘보아야 할 것’의 깊이

뮤지컬 '라이온 킹' 인터내셔널 투어

Lionesses - THE LION KING - Photo by Joan Marcus ⓒ Disney

그런 배우가 연기하는 동물·인간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인간화된 동물이다. 주인공들을 비롯해서 자주, 티몬, 품바 등의 캐릭터가 이 부류다. 이 캐릭터들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특성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다. 인간의 표정과 행동을 분절하는 디테일은 캐릭터들의 만화다움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희극적인 인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원작 만화와 똑같은 캐릭터를 재현할 때 이 작품은 손색없는 가족 뮤지컬의 모범이 된다. 착하고 귀엽게 인간화된 동물은 이 작품에 재미를 부여하는 가장 큰 동력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또 다른 동물·인간의 유형이 있다. 바로 동물화된 인간이다. 사바나의 초원에서 살아가는 표범과 가젤과 기린을 표현할 때 배우의 몸과 동물의 몸은 자연스레 섞여 연결된다. 그들은 인간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동물의 몸이 돼 동물의 몸짓으로 부드럽게 공간을 오갈 뿐이다. 그런데 이 장면이 엄청나게 뭉클하다. 인간과 동물은 본질적으로 몸의 원리가 같기 때문에 같 은 종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했던 게 테오프라스토스이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그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동물을 향한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더랬다.

 

동물이 돼 있는 배우의 몸은 철학자의 말을 장면으로 보여준다. 인간과 동물이 하나로 연결된 생명이며 운명공동체임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그야말로 ‘생명의 순환(Circle of Life)’이 눈앞에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을 본 관객들, 특히 어린이들이 동물은 인간만큼 존중 받아야 할 생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면, 이 작품을 가족 뮤지컬이 아닌 생태 뮤지컬로 불러도 무방하리라.

 

<라이온 킹>에서 서사의 ‘무엇’과 연출의 ‘어떻게’는 ‘공연의 순환’으로 연결돼 있다. 기술의 상상력이 분명할 때 쉬운 서사는 생각의 깊이로 이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혁신적인 기술과 막대한 자본을 상상의 비용으로 지불하는 투자의 상상력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상력이 만들어 낸 공연의 진보는 원형의 회복과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 역시 ‘공연의 순환’을 증명한다. <라이온 킹>은 공연이 돌아가야 할 제자리가 어디인지 잘 알고 있다.

 

글 : 정수연 뮤지컬 평론가

사진 : 클립서비스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9년 2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

2019.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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