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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일상의 모든 것이 춤이 되는 Her Stage

제6회 대한민국발레축제
안무가 허용순

by예술의전당

춤이 뭔지도 모를 때였다. 세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엄마의 미용실 옆 무용학원에 매일 ‘맡겨진’ 꼬마에게 무대는 그저 신나는 놀이터였고, 눈앞에 펼쳐진 한국무용의 우아한 몸짓은 신기한 볼거리였다. 자연스레 빠져든 춤과 무대는 그렇게 서서히 삶에 녹아들었다. 실력 있는 발레리나에서 안무가로의 성공적인 변신까지. 황홀한 몸의 언어로 세계를 누비는 재독 안무가 허용순에게 50년이 지난 지금도 무대는 여전히 즐거운 놀이터다.

제6회 대한민국발레축제 안무가 허용순

독한 춤꾼들이 뭉친 ‘무용 어벤저스’

“용순, 너 미친 거 아니야OMG….You Crazy Woman!” 허용순은 요즘 지인들의 우려 섞인 질타를 한몸에 받고 있다. 오는 5월 13일부터 29일까지 열리는 <대한민국발레축제>의 해외 안무가 초청 기획공연을 맡아 한국을 찾은 그는 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12시간씩 이어지는 강행군 연습을 지휘하고 있다. 하루 세 시간밖에 못 자는 독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지만, 오랜만의 고국 무대라는 설렘을 보약 삼아 버텨내고 있다. 아끼는 후배들과의 작업이라는 점도 허용순에게 큰 힘이 된다. 사실 이 ‘미친’ 일정에 동참한 이들도 독하기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주원, 이원철,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황혜민, 엄재용, TV 춤 경연 프로그램 <댄싱9>으로 유명한 윤전일, 이선태, 임샛별과 한류리, 조현상, 김다애까지. 세계적인 안무가와 국내 클래식·모던 발레 분야의 최고 스타들이 뭉친 이 어벤저스 군단은 5월 24일과 25일 <엣지 오브 서클The Edge of the Circle>과 <콘트라스트Contrast> 두 편의 작품으로 관객과 만난다.

무용수의 장점을 끌어내는 철두철미한 준비

“그 상태에서 몸을 좀더 위로 올릴 수 있겠어?”, “네 말대로 이렇게 끝내도 괜찮겠다. 훨씬 좋아.” 지난 4월 1일 예술의전당 발레연습실. 허용순은 이선태, 한류리와 함께 <엣지 오브 서클>에 추가할 6분짜리 새 안무를 한창 손보고 있었다. ‘깐깐한 예술가’의 모습을 기대(?)했건만 웬걸, 연습실에선 수시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선태가 즉흥으로 펼쳐 보인 연결동작을 보곤 “그래, 그거 한번 해봐”라며 안무에 반영하는가 하면 춤을 춘 뒤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는 두 사람을 향해 “(힘들게 만들어) 미안하다”고 귀여운 사과도 건넨다. ‘무용수에 대한 존경’은 허용순이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이다. 허용순은 “연습 분위기가 엄하고 무거우면 작품이 잘되지 않는다”며 “안무가의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춤출 사람과 타협점을 찾아 함께 작품을 만드는 게 모두가 발전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허용순과 이미 두 차례 작품을 함께한 경험이 있는 한류리는 “선생님은 시간을 절대 허투루 쓰지 않도록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는 분”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는 “늘 무용수의 공연 자료를 일일이 찾아보며 꼼꼼하게 준비를 한다고 들었다”며 “놀라울 정도로 무용수 개개인의 몸과 장점을 잘 파악하고 그것을 작품 안에 녹여내 준다”고 말했다.

 

한류리의 말처럼 허용순은 무용수의 장점을 잘 끌어내기로 유명한 안무가다.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과 김인희 서울발레시어터 단장, 강수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등과 함께 한국인 유럽 발레 유학 1세대인 그는 1980년 모나코 왕립학교로 유학을 간 뒤 독일 프랑크푸르트발레단, 스위스 취리히발레단과 바젤발레단을 거쳐 뒤셀도르프발레단 수석무용수와 발레 마스터로 활동한 바 있다. 수십 년 춤추며 최고의 안무가도, 최악의 안무가도 만나본 그이기에 자기 생각을 몸으로 대신 무대에 펼쳐내 주는 이들에 대한 마음가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제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모든 작품은 제가 아닌 무용수에 의해 표현되잖아요. 제가 구상한 춤과 그것을 추는 사람이 잘 맞지 않을 땐 타협점을 찾아서 안무를 바꿉니다. 저는 무용수를 행복하게 만드는 안무를 하고 싶은 사람이거든요.” 자연스레 믿고 따르는 후배들도 많다. 이번 공연에 참여하는 열 명의 무용수는 저마다 공연 일정으로 바쁜 와중에도 허용순의 섭외 요청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제6회 대한민국발레축제 안무가 허용순

발레리나 명성 뒤로하고 안무가로 도전

안무가라는 직업은 원래 허용순의 계획엔 없던 일이었다. 발레리나로 이름을 떨치던 허용순은 2001년 <그녀는 노래한다>를 선보이며 무용수에서 안무가로 변신에 성공했다. 사실 1988년에 선보인 2인무 <허 기타로>가 허용순의 첫 안무작이다. 당시 호평에도 불구하고 13년간 허용순은 발레리나로 공연 활동에만 매진했다. 허용순은 “그 시절엔 그저 춤추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며 “13년이 지나서야 공식적으로 안무가로 데뷔한 만큼, 당시는 진로를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막연한 부담도 있었다. 무용수와 관객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안무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걱정이 앞선 게 사실이다. “뒤셀도르프발레단에서 활동하며 <그녀는 노래한다> 안무를 꾸미던 저의 고민을 들은 한 동료가 이렇게 받아치더군요. ‘그럼 힘들어도 해봐야 하는 것 아냐?’” 그녀가 롤 모델로 삼는 마츠 에크를 비롯해 윌리엄 포사이드, 우베 숄츠, 닐스 크리스트, 유리 바모스 등 세계적인 안무가들이 보여준 존경스러운 모습도 용기를 줬다. 그렇게 <그녀는 노래한다>라는 작품, 그리고 안무가 허용순이 탄생했다.

일상의 모든 것이 춤이 된다

허용순은 일상에서 춤의 영감을 얻는다. 신호를 기다리는 차 안에서 본 바깥 풍경, 언젠가 본 적 있는 영화, 어린 시절 아빠와 바닷가를 바라보며 나눈 대화….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소재나 공감 가는 스토리를 다루기 때문에 허용순의 작품은 난해한 여타 모던 발레들과 달리 관객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편이다. 평소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즐겨 듣는 것도 안무에 큰 도움이 된다고. 음악을 들을 때 떠오른 감상을 메모해두었다가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에 삽입하는 식이다.

 

이번 기획공연에서 선보일 두 개 작품 역시 일상의 경험을 녹여낸 케이스다. <콘트라스트>는 허용순이 공연을 위해 자주 들르는 공항에서 느낀 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공항 대합실에 앉아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스쳐 지나가는 이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저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그렇게 치장으로 감춘 내면의 세계, 물질적인 것이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을 풀어내는 것이죠.” 존 애덤스의 음악 ‘The Chairman Dances’와 류이치 사카모토의 ‘Uoon 1’가 빚어내는 조화도 주목할 만하다.

 

<엣지 오브 서클>은 ‘동그란 원은 수억 개의 각이 연결되어 완성됐다’는 사색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잘 굴러가는 원 안에 개개인의 희로애락과 인생이 담겨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올라프 아르날즈의 서정적인 음악(‘Another happy day’, ‘Variations of static’)과 비발디의 ‘사계’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토슈즈를 신고 등장했던 발레리나들이 맨발로 춤을 추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두 작품 모두 클래식 발레와 모던 발레의 매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허용순은 “클래식 발레와 현대무용을 섞는 작업을 좋아한다. 전혀 다른 색으로 표현되는 둘 간의 조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국 1세대 발레리나로서 후배들의 성장을 볼 때면 뿌듯하다. 해외 유수 무용단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무용수가 늘어날 때마다 마음이 뭉클하다. 허용순은 “이제 어느 무용단을 가도 한국인 친구들이 한 명 이상 활동하고 있다”며 “단순히 인원이 늘어난 것에 그치지 않고 현지 관계자들로부터 ‘한국 무용수들 정말 최고’라는 찬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다”고 웃어 보였다. “그럴 때마다 저는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자신 있게 받아칩니다. 항상 열심히 하고 겸손하기까지 한 후배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이 들어요.”

 

허용순이 자랑스럽고 고맙게 생각하는 후배들과 함께 만든 무대는 5월 24일과 25일, CJ 토월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글 송주희 (서울경제신문 문화부 공연 담당 기자)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6년 5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