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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20세기 여성 작가의 정체성 찾기

프리다 칼로에서
주디 시카고까지

by예술의전당

프리다 칼로에서 주디 시카고까지

프리다 칼로 '버스' © 2016 Banco de México, Frida Kahlo & Diego Rivera Museums Trust Av. Cinco de Mayo No.2, Col. Centro, Del. Cuauhtémoc 06059, México D.F

프리다 칼로가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오래전 아픈 식민지 역사를 가진 멕시코에서 태어난 한 여성 작가의 반향치고는 그 울림이 큰 편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여성으로서 힘든 삶과 씨름하면서 강인하게, 때로는 한없이 연약하게 현실에 맞선  굴곡진 족적 때문일 것이다. 칼로는 많은 여성이 결혼과 출산을 통해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던 시절, 자신의 재능을 지키면서 사랑과 욕망을 쫓아 용기 있게 자신의 길을 갔다. 어린 시절 사고를 겪은 후 수술로 얻은 고통을 평생 안고 살아가면서도 그에 굴복하지 않은 용감한 삶이었다. 자신의 신체 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당대 멕시코 유명작가였던 40대의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와 20년이라는 나이 차이 그리고 세 번째 부인이라는 불명예를 극복하고 나눈 치열한 사랑은 그 어떤 것도 그녀의 삶에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녀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정열적으로 삶을 살다가 수많은 그림을 남기고 결국 고통과 병으로 요절했다.


칼로의 예술과 신화를 제대로 보려면 칼로가 한시도 포기하지 않았던 자아 찾기, 즉 ‘여성’의 정체성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칼로의 예술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그녀가 여성으로서 산 시간, 즉 ‘여성’의 경험을 제외하고 논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칼로가 그린 무수한 자화상이 그 증거이다. 그녀가 남긴 50여 점이 자화상은 그녀에게 그림은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그리는 차원을 넘어서 마치 일상의 주인인 자신을 기록하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테후아나Tehuana 원주민 하녀가 입는 옷을 입고 처연히 앉은 모습, 정성 들여 아름답게 치장한 모습, 원숭이나 가시 목걸이처럼 자신을 대변할 만한 장치를 사용한 모습, 고통을 참지 못하고 피 흘리는 모습까지…. 다양한 자화상은 가혹한 현실과 꿈꾸는 환상 사이에 놓인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실제로 실패와 고난을  겪으며, 여성에 대한 편견에 맞서면서 그녀는 거칠게 말하고 거침없이 술을 마시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그림은 그런 현실에 대한 좌절뿐만 아니라 완벽한 삶과 사랑을 꿈꾸는 한 여성의 이상을 담고 있으며,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여성의 주체성을 보여준다.


칼로의 예술을 높이 샀던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은 그녀를 “폭탄에 두른 리본”과 같다고 평가했다. 자기애가 강하면서도 원시적인 강렬함과 솔직한 상상력을 보유한 여성 작가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표면은 아름답고 매력적이면서도 내부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폭탄에 두른 리본” 같은 여성 작가는 칼로 외에도 20세기 미술사에서 종종 찾을 수 있다. 남성에 비해 교육의 기회가 많지 않았으며, 당연히 수적으로도 남성 작가에 비해 현저히 적었고 미술계의 주목을 받을 기회도 적었기에 폭탄처럼 자신을 태워 살아남으려는 여성 작가들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내내 여성의 사회적인 지위는 남성보다 낮았다. 투표를 할 수 있는 참정권이 20세기 초반에야 주어졌고 그 이후에도 여성에 대한 사회의 대접은 교육기회의 제한, 협소한 직업선택의 폭, 남성보다 낮은 임금으로 이어졌다. 미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이 미술을 취미 이상으로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대부분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해야 했고, 그림을 그려도 여성 작가의 작품을 사는 이는 드물었다. 작품을 파는 경로도 한정되었으며 무관심과 경제난에 작가로서의 길을 포기한 여성이 대부분인 시절이었다. 그래서 고난 속에 피는 꽃처럼 예술을 포기하지 않은 여성 작가들은 오늘날 여성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만든 시대의 선구자들이다.

성별이 아닌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찾다

프리다 칼로에서 주디 시카고까지

로메인 브룩스 '자화상' 1923

로메인 브룩스Romaine Brooks(1874~1970)는 칼로보다 앞선 시대를 산 여성 작가로 칼로만큼이나 자신의 정체성과 씨름했다. 로마, 뉴욕, 파리를 떠돌며 젊은 날을 보냈고, 파리 몽파르나스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독특한 ‘신여성’으로 회자되었던 인물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가 이혼한 후 신경질적인 어머니 밑에서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운좋게도 외조부로부터 어머니 몫의 유산을 받게 되는데, 당시의 기준으로도 상당한 규모였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진  그녀는 피아니스트와 결혼을 하지만, 곧 남장을 하고 다니기 시작한다. 1910~20년대 파리의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양성애자로 사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브룩스는 생전에 화가로서 유명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1920년대 이후 전시를 한 적도 없다. 여느 여성 작가들처럼 더 이상 예술을 추구할 동력을 상실하고 만것이다. 그러나 사후에 발견된 그림 중에서도 그녀의 자화상들은 단연 독보적이다. 브룩스가 단순히 남장여자라는 사실을 넘어 시대를 앞서 산 ‘신여성’으로서 겪었던 정체성의 위기를 강한 자의식을 통해 그림으로 승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칼로나 브룩스처럼 자기애가 강한 여성 작가들은 이후에도 계속 등장했다. 백남준의 부인 구보다 시게코Kubota Shigeko, 비틀스 멤버 존 레넌의 부인 오노 요코Ono Yoko 등 자기실현을 통해 존재감을 얻고자 했던 여성 예술가들은 서양과 동양이라는 문화권에 상관없이 나타났다. 이런 여성 작가들의 역사가 1970년대 페미니즘의 부상으로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페미니즘은 1960년대 미주와 유럽 등 세계적으로 반제도권 운동, 반전 운동 확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여성들이 동료라고 여겼던 남성에 비해 자신들의 열등한 위치를 확인하면서 촉발되었다. 그들은 남성의 억압과 제도의 편파성에 저항하면서 동료 여성의 참여를 촉구했다. 미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미국 미술계에서 ‘여성 작가로서 나는 어떤 예술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조직적인 의식고양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성의 누드를 남성의 누드보다 미화하고, 미술관에 소장된 여성 작가의 작품이 남성 작가의 작품 수보다 적은 현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미술사에서 소외된 여성 작가를 발굴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브룩스를 비롯한 다수의 여성 작가의 발견은 바로 페미니즘 미술사 덕분이기도 하다.


칼로가 살았던 시대의 여성들이 열등한 처지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생존의 길을 찾았다면, 대학교육을 받은 1970년대 여성들은 현실 파악의 실마리를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는 슬로건에서 찾았다. 임신, 출산, 결혼, 육아, 가사노동 등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개인적으로 경험해야 했던 여성의 문제가 사실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와 이데올로기라는 정치적인 문제임을 자각한 것이다.

여성의 정체성으로 예술을 하다

프리다 칼로에서 주디 시카고까지

주디 시카고

주디 시카고Judy Chicago(1939~)는 칼로처럼 여성의 경험을 전면에 내세우며 창작했던 대표적인 페미니즘 예술가이다. 페미니즘이 미술계에 불어닥친 1970년대,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주디 코헨Judy Cohen에서 주디 시카고로 바꾼다. 자신의 성을 태어난 도시 ‘시카고’라는 지명으로 변경한 것이다. 이혼할 때마다 남편의 성으로 바꿔야 하는 불편함, 즉 가부장제의 관습을 피하려는 조치였다. 이름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전략적으로 보여줄 만큼 과감했던 시카고의 작품 중에서도 여성의 억압 역사를 집약한 작품 <디너 파티The Dinner Party>는 단연 압권이다. 삼각형으로 차린 대형 테이블 설치작업으로, 테이블에는 초대받은 여성들의 이름이 자수로 새겨져 있고 차린 접시에는 여성 성기 모양에서 영감을 얻은 다양한 그림이 그려 져 있다. 전시 바닥에도 수많은 여성의 이름이 적혀 있다. 초대 받은 여성과 바닥에 새겨진 여성의 이름은 모두 인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여성들의 것이다. 이집트 여왕 하트셉수트, 그리스 시인 사포, 문인 버지니아 울프에 이르기까지 시카고가 선별한 여성 999명의 이름이 <디너 파티>에 올라 있다.

프리다 칼로에서 주디 시카고까지 프리다 칼로에서 주디 시카고까지

2007년 브루클린 박물관에 전시된 '디너 파티'


칼로는 리베라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그림으로 그린 적이 있다. 그 첫 번째 그림인 <나의 탄생My Birth>(1932)은 얼굴과 상체를 침대보로 덮은 한 여성이 누워서 다리를 벌리고 있고, 그 다리 사이로 어린 칼로의 머리가 나 오는 장면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노골적으로 묘사한 성기와 피가 낭자한 그곳에서 나온 머리는 출산의 고통과 잔혹함을 보여준다. 이는 자신의 삶이 출산이라는 여성의 고통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실의 표현이었다. 시카고가 <디너 파티>에 배열한 여성 성기의 만찬 역시 여성의 신체가 곧 여성의 삶과 정체성의 토대라는 점을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다른 시대와 문화권에 살았던 두 사람이 여성 성기라는 파격적인 이미지를 사용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여성의 성기는 단순히 생물학적 도구가 아니라 여성성을 결정하는 정체성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여성 작가로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결국 여성의 신체 경험을 통해 답을 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글 양은희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6년 5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