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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떠날 때도 돌아올 때도 즐겁고 당당하게

by예술의전당

서이숙 배우와 함께 읽는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안호성

「인형의 집(Et Dukkehjem)」은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ck Ibsen)의 대표작이다. 서이숙 배우와 「인형의 집」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돌아온 노라

연극 <인형의 집, Part 2> 포스터

140년 전 노라도 요즘 우리처럼 마카롱을 좋아했다. 하지만 노라는 마카롱을 남편 토르발트 몰래 숨어서 먹고, 먹었냐고 다그치는 남편의 질문에는 안 먹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관객은 의심한다. ‘남편에게 숨기는 게 있는 이 여자는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있군.’ 역시나 비밀이, 그것도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있다.


노라는 과거 토르발트가 위독했을 때 의사의 처방에 따라 남쪽 지방에서 요양할 비용을 마련하려고 돈을 빌렸다. 그런데 이 일을 토르발트 몰래 처리하려고 임종을 앞둔 친정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했다. 당시엔 여자가 남자 후견인 없이 금융 거래를 할 수 없었다. 노라는 몰래 부업을 하며 빌린 돈을 갚고 있었지만 결국 이 비밀은 들통나고 만다. 토르발트는 아내를 더러운 범죄자 취급하며 남의 눈에 자신이 연루된 것으로 비칠까 걱정한다. 그때 노라는 알게 된다. 자신이 그동안 헛살았다는 것을. 관객도 깨닫는다. 문제는 노라가 아닌 남편에게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노라는 떠난다. 남편과 세 아이를 인형의 집에 남겨둔 채 홀로 문을 나선다.


헨리크 입센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2018년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공연했던 유리 부투소프가 연출한 <인형의 집>도 그랬다. 그런데 집 떠난 노라는 그 뒤로 어떻게 살았을까. 많은 사람이 궁금해할 질문에 미국 작가 루카스 네이스가 답을 내놓았다. 15년 후, 노라가 그 집 문을 다시 열고 들어오는 것으로 <인형의 집, Part 2>(이하 )는 시작한다. 지난 4월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 에서 노라를 연기한 서이숙 배우는 노라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2019년 연극 <인형의 집, Part 2> 공연 장면 ⒸLG아트센터

“첫 블로킹(Blocking, 공연 연습 과정에서 무대 위 동선을 정하는 작업)을 하는데 ‘이건 첫 등장 싸움이다’라는 느낌이 딱 들었어요. 연출도 센스 있게 첫 등장에 힘을 줬어요. 첫 공연에서 첫 문을 여는데 객석에서 ‘와~’ 하는 거예요. ‘아, 이거 되겠다’ 싶었죠.”


무대에서 서이숙 배우의 걸크러시한 모습을 봐온 관객이라면 그가 노라를 연기한다는 것이 의아할 수 있다.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배우 자신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저를 <인형의 집>에 캐스팅한다는 게 의외였어요. 내가 원작의 노라 같은 이미지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물었죠. ‘내가 노라야? 이건 완전 다른 이야기겠네?’ 하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럼 대본을 보내보라고 했죠. 일단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데 끌렸어요. 워낙 드물잖아요. 흥분 상태로 대본을 읽었죠. 지금 시대에 이런 이야기가 통하는 게 신기했어요. 노라가 집을 떠난 지 15년 후를 상상한다는 시도가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2018년에 공연한 연극 <크리스천스>(민새롬 연출)를 보고 작가를 알게 되었다는 서이숙 배우는 논쟁을 붙일 줄 아는 네이스의 재능을 높이 샀다. 작품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분명히 담는 작가가 연극사에서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 노라를 주인공으로 뒷이야기를 썼다는 것이 무엇보다 배우의 호기심을 끌었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분명한 게 좋아요. 그 이야기를 관객에게 내 입을 통해서 전달해야 하니까요. 저는 전체 이야기가 무엇인지부터 파악해요. 그리고 이 이야기가 지금 우리 시대와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지 찾아보죠. 그게 되면 좀 쉽게 출발할 수 있어요.”


는 네이스의 여느 작품처럼 돌아온 노라가 집에 남아 있던 세 사람 남편 토르발트, 유모 앤 마리, 딸 에미와 차례로 논쟁을 벌이는 것으로 극이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세 인물은 노라의 무책임함을 성토한다. 서이숙 배우는 노라의 입장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를 자세히 보면 노라의 얘기가 아니에요. 노라는 남아있는 세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더라고요. 속상했어요. 아니 노라가 나가서 어떻게 살았는지 이 인간들은 듣지도 않고 자기들 얘기만 하죠. 네가 없어서 힘들었다, 시집도 가기 힘들다, 내 체면을 구겼다. 작가가 노라 얘기도 좀 해줬어야죠. 그냥 집을 나가 책 써서 성공했다는 것밖에 없어요. 물론 이 책이 왜 성공했을까라는 게 이면에 깔려 있겠죠. 그런 이야기가 당시 그 사회에서 먹힌다는 거잖아요. 배우로서 이걸 조금 더 겉으로 드러나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서이숙 배우의 말처럼 노라 본인의 이야기가 더 많았어도 좋았을 것이다. 집을 나가 있는 15년 동안 노라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았는지 거기엔 분명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을 터다. 그렇지만 세 사람의 이야기를 주로 듣고만 있는 노라의 존재감이 약해지지는 않았다. 1 대 3으로 싸우고 다시 힘차게 문을 열고 떠나는 노라에게서 관객은 어떤 통쾌한 기분을 맛봤을 것이다.

이야기와 배우가 딱 맞았을 때

2019년 연극 <인형의 집, Part 2> 공연 장면 ⒸLG아트센터

서이숙 배우는 배우의 가장 중요한 역할로 관객에게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것을 꼽았다.


“배우는 일단 작품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전달하고 다음에 상대와 균형을 잘 맞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배우가 무대에서 자기감정을 막 쏟아내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관객은 그걸 열연이라고 믿고 박수를 치기도 하죠. 그런데 보통 그런 의미의 열연은 연극의 힘이 안 생겨 배우가 어떻게든 끌고 가려고 할 때 많이 나와요. 그건 잘못된 거예요. 연습이 잘 안 됐거나 배우 사이의 균형이 안 맞았거나. 감정을 마구 쏟아내는 게 아니라 이야기와 배우가 딱 맞았을 때, 난 그게 연극이라고 생각해요. 연기를 감정에 푹 젖어 하는 스타일이 있고 객관적으로 감정을 빼고 하는 스타일이 있는데, 나는 후자에 가까워요. 내 입을 통해 어떤 이야기가 전달되는 게 내 체질에 맞아요. 타고난 성향 같아요.”


감정보다는 객관적 거리를 두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성향에 잘 맞아서일까? 서이숙 배우는 2012년 손턴 와일더의 연극 <아워 타운>(한태숙 연출)에서 아주 인상적인 무대감독 역할을 연기했다. 본래 이 작품에서 무대감독은 남성 배우의 몫이지만, 연출가는 이 역할을 서이숙 배우에게 맡겼다. 당시로서는 아직 낯선 ‘젠더 프리캐스팅’이었다.


“한태숙 선생님은 연극 <강철>(2006)이란 작품에서도 저를 여성교도관으로 캐스팅하고는 머리를 다 자르라고 하셨죠. 선생님은 저에게서 중성적인 느낌을 보시고 제가 양쪽을 넘나들 수 있게 해주셔서 좋았어요. 저조차 모르던 걸 선생님이 찾아주신 거죠. <아워 타운>을 하는 동안 인생 공부도 많이 했어요. 정말 인간은 한낱 우주의 작은 점이구나, 위에서 내려다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었어요.”

2019년 연극 <인형의 집, Part 2> 공연 장면 ⒸLG아트센터

작품을 통해 인생을 성찰하고 배운다는 이야기는 자연스레 지난 여름의 화제작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로 이어졌다. 서이숙 배우는 한 인터뷰에서 이 드라마가 ‘죽음’을 다루고 있어 참여했다고 밝혔다.


“우리가 보통 망자한테 ‘편히 쉬십시오’라고 하잖아요. 난 그 말이 궁금했어요. 죽었는데 뭘 편히 쉬라는 거지? 그냥 의미 없는 인사 정도로 생각했죠. 그런데 죽어가는 영혼이 쉬어가는 호텔이 있다면, 그래서 거기서 쉬었다 갈 수 있다면? 나 역시 영혼을 힐링하고 가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이 작품은 주인공뿐 아니라 주변 인물의 이야기도 좋았어요. 극 중 교통사고로 죽은 부자(父子)의 사연이 나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가해자에게 사과를 해요. ‘우리가 뛰어들어서 죽은 거지 당신 때문이 아니다. 당신이 겪은 고통에 대해 너무 미안하다’라는 말이 감동적이었어요. 생전에 소설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이 호텔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계속 글을 쓰기도 하죠. 작가의 그런 아이디어가 너무 좋았어요.”


잠깐을 출연해도 매번 신 스틸러로 활약하는 서이숙 배우가 TV에 출연하게 된 것은 배우 개인으로서는 새옹지마 같은 일이었다. 오랜 단역과 조연 생활을 거쳐 연극계에서 주연으로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상샘암 진단을 받았다. 성대가 상할 수있기에 배우로서는 치명적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수술이 잘되어 목소리가 상하지는 않았지만, 준비하고 있던 예닐곱 작품의 재공연을 모두 포기해야 했다. 그때 TV 드라마 출연을 제안받았고 목을 덜 써도 된다는 점에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자괴감도 들었다. 연극판에서 잘나가던 배우가 1분, 3분 분량을 위해 무한정 촬영장에서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TV라는 매체에 대해, 카메라 작동 원리에 대해 새로 공부해가면서 우울감을 떨쳐냈다. 대기 시간을 배우는 시간으로 바꾸자 즐거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서이숙 배우는 촬영 현장에도 자신의 관객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 연기를 가장 처음 보는 사람이 마이크, 조명을 들고 있는 스태프더군요. 관객이 바로 코앞에 있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니 연기가 너무 재미있고, 스태프가 너무 고마운 거예요. 그래서 나는 가자마자 스태프에게 눈인사부터 했어요. 연극할 때도 조명에 관심이 많았지만, TV 조명을 보니 이건 너무 중노동인 거예요. 그분들의 수고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인사했어요. 그러니까 관계도 편해지고 저도 연기가 편해지더라고요.”

시간의 공력을 믿는 것

Ⓒ안호성

서이숙 배우가 지금처럼 연극 무대와 안방극장을 자유롭게 누비기까지는 20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 대기만성의 시간을 배우 스스로 준비하고 견뎌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연극 시작할 때 선생님들이 그러셨어요. 마흔은 돼야 발이 무대에 붙는다. 공연을 보니 그 말이 너무 와닿는 거예요. 그래서 시간을 길게 잡았어요. 나는 배우를 할 건데 이게 단숨에 되는 게 아니구나 생각했죠. 시간을 길게 잡으니까 힘들 게 없더라고요. 30대 후반부터 한태숙 선생님이 불러주기 시작했죠. <허삼관매혈기>(2003)라는 작품으로 기회가 찾아왔고, <고양이 늪>(2005)에서는 주인공도 했어요. 그 순간을 위해 20년 가까이 준비했으니 정말 좋았죠. 관객들도 빵빵 터지고 기립박수도 나오고 하니 하루하루 공연이 끝나는 게 아쉬웠어요. 그렇게 하나씩 하다가 큰 역할을 맡으니 책임감이 생겨 준비가 더 철저해지는 거예요. <엄마를 부탁해>를 공연할 때는 신경숙 작가의 모든 작품을 섭렵했어요. 그러고 나니 무대에서 두려운 게 없어지더라고요. 공부하는 법을 배운 거죠. <리어왕> 때는 스터디도 만들었어요. 무명 시절엔 작은 역할에도 열심히 했죠. 대사가 한마디밖에 없어도 연습 시간은 똑같이 채웠어요. 극단 미추는 그랬어요. 시간의 공력이 채워지면 전체 공연이 좋아진다는 믿음도 그때 배웠어요. 그렇게 견뎌서 어쨌든 무명에서 조금 벗어나 자기 몫을 하는 배우가 됐네요. 그래서 후배들한테 항상 얘기해요. ‘배우, 만만한 일이 아니다. 긴 시간을 투자해야 배우가 되는 거다.’ 물론 다른 일도 다 그럴 거예요. 제가 견뎌온 힘은 시간의 공력을 믿은 거예요.”


서이숙 배우는 1년에 두 편의 연극을 하겠다는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요즘도 부단히 노력 중이다. 연말에는 2020년 초 한태숙 연출의 창작산실 신작을 위한 연습에 들어간다. 그는 젊은 후배 연극인들의 패기 있는 도전에도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대화 내내 서이숙 배우의 유쾌하고 건강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더 단단해진 노라가 굳게 닫혀 있는 문을 힘차게 열고 돌아오듯, 서이숙 배우가 힘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관객에게 돌아올 그날을 기대한다.

필자 소개

서울대학교 졸업 뒤 동 대학 공연예술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수원대학교에서 문학 및 공연예술 이론을 강의하고 있으며, 월간 「한국 연극」과 웹진 「연극인」 등에서 연극 평론을 기고하고 있다. 연극 <비평가>(극단 신작로), <햄릿, 죽은 자는 말이 없다>(극단 난희) 등 작품에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했다 .

글 임승태 평론가 사진 LG아트센터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9년 11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