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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영화 같은 삶, 음악 같은 인생

피아니스트 백건우·
영화배우 윤정희 인터뷰

by예술의전당

40, 70, 50. 따로 또 같이 걸어온 예술가의 오솔길

피아니스트 백건우· 영화배우 윤정희

스페인 내셔널 오케스트라와 협연 중인 피아니스트 백건우 © 빈체로

피아니스트 백건우· 영화배우 윤정희

1976년 3월 14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당시 톱스타 영화배우 윤정희의 결혼식 © 헤럴드경제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 1970년대 국내 일간지를 연일 장식하던 최대 스캔들의 당사자들이다. 사귀는 듯 마는듯, 이별한 듯 재회한 듯 숨바꼭질을 거듭하던 그들의 연애는 지금 연예인들의 비밀 연애처럼 기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아쉬운 이별로 끝나는 듯했던 그들의 이야기는 그러나 1976년 3월 파리에서 날아온 결혼식 소식에 느닷없는 해피엔딩으로 귀결됐다. 소박한 한복을 입고 이응로 화백의 자택에서 올린 그들의 결혼식에는 서른 명의 지인만이 초청되었다. 결혼식 분위기는 그동안 신문들이 요란 법석하게 떠들어대던 가십 기사가 무색하리만큼 정갈하고 또 엄숙했다.

 

이렇게 결합한 두 아티스트가 올해 겹경사를 맞았다. 두 사람의 결혼 40주년, 백건우의 고희, 그리고 윤정희의 데뷔 50주년이 한꺼번에 찾아온 것이다. 떠들썩한 이벤트를 벌일 만도 한데, 정작 부부는 이렇게 기념할 일이 겹친 것도 몰랐단다. 결혼기념일에 그들이 예전에 재회했던 레스토랑을 다시 찾아가서 식사한 것이 그들이 가진 유일한 이벤트다. 연주 여행이나 영화 촬영이 없을 때면 이들 부부는 손수 요리를 한다. 아침이면 백건우가 여느 프랑스 남자들처럼 빵집에 가서 빵을 사 오고 그사이 윤정희가 내린 커피와 함께 아침을 먹는다. 저녁에는 함께 요리를 한다.

 

“남편이 요리를 굉장히 잘해요. 저도 괜찮게 하는 편인데 말이에요. 한식은 아무래도 제가 더 낫겠지만 나머지 서양 요리는 남편이 월등해요.”

 

요리뿐이 아니다. 두 사람은 집안일을 남에게 맡기는 일 없이 같이 한다. 식사를 마치고 아내가 설거지를 하면 남편은 옆에서 접시를 닦고, 또 라디오를 켜놓고 음악을 들으며 함께 청소를 한다. 얼마 전 한 일간지 기사에 윤정희의 머리를 백건우가 직접 손질해준다는 소식이 훈훈한 화제를 불러왔다. 프랑스 파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이후, 이들 부부는 정말로 단 한 번도 미용실에서 머리를 손질한 적이 없다고 한다. 내성적이고 말수 적기로 소문난 백건우가 이 얘기에 “부부가 서로 돕고 사는 게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요?”라며 드물게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그럼 백 선생님 머리는 윤 선생님이 잘라 주시나요?”라는 물음에는 머뭇거리더니 “내 머리는 내가 잘라요”라며 호탕하게 웃음보를 터뜨렸다.

같은 듯 다른 운명과 인연

금슬 좋기로 유명한 이들 부부 관계의 비결이 무엇인지 은근슬쩍 두 사람 모두에게 물어봤지만 “둘이 많이 닮아서 싸울 일이 없다”고 할 뿐 신통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긴 하다. 사치를 싫어하는 점도 그렇고, 다른 가능성들을 포기하고 각자의 직업에 평생을 걸고 있는 점도 그렇다. 훗날 교수가 되어 후학을 양성할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 백건우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사는 한 불가능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저는 마지막까지 카메라 앞에 서다 죽을 거예요”라는 윤정희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그들은 또 많이 달랐다. 피아니스트가 되기까지 백건우는 오랜 고민을 거듭했다. 여덟 살 때 피아노를 처음 시작하고 재능을 인정받아 열다섯 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음에도 그는 스물한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영화나 그림 같은 시각예술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음악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쪽 길을 걸어가고 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당연한 듯 따라붙는 ‘피아니스트’라는 프로필을 선택하는 데 백건우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것 같다. 과거 인터뷰에서 피아노를 처음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요청했다가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글쎄요, 어린이보다 그 부모님께 여쭤보고 싶네요. 음악으로 인해 어린이가 다치지 않게 할 수 있는지.”

 

처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그가 가졌을 두려움과 고통을 짐작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화려한 명성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음악세계를 묵묵히 펼쳐나가는 그의 모습을 사람들은 ‘건반 위의 구도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오랜 고민 끝에 자신의 길을 선택한 남편과 달리, 영화인으로 살고 있는 윤정희의 삶은 마치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양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부모님이 두 분 다 영화를 무척 좋아하셨어요. 데뷔작인 '청춘극장'은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서로 돌려가며 보던 작품이었고 꼭 하고 싶은 영화였어요. 기회가 왔을 때 부모님도 두 말 없이 찬성해주셨고, 그렇게 배우가 되는 과정이 굉장히 자연스러웠지요.”

 

영화계를 경시하던 당시 보수적인 풍조를 생각할 때 배우가 되겠다는 딸내미를 분명 말렸을 법한데, 그녀의 집안 분위기는 또 남달랐다. 아버지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신문기자를 거쳐 대학 교수가 된 지식인이었고, 그녀의 동생들은 모두 명문학교 출신의 유학파다. 윤정희 또한 젊은 시절 지식인 장준하가 발행하던 「사상계」란 잡지를 촬영장에 들고 다녔다. 배우들의 학력이 그리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던 시절, 소르본 대학에 유학해 한국 여배우 최초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것도 이런 집안 분위기 때문이다.

 

영화 촬영을 하다가도 당시 최고의 피아니스트 한동일 연주회에 빠짐없이 쫓아다닐 만큼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던 윤정희와 한때나마 영화감독을 꿈꾸던 백건우의 만남은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보인다. 윤정희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서로 끌렸다고 말하지만 사실 이들의 인연은 백건우의 용기 덕분이었다. 1972년 뮌헨올림픽 당시 윤정희는 백건우를 비롯한 얼마 안 되는 유학생들과 만나 호프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여배우의 아우라에 압도된 다른 남자 유학생들이 수줍어서 말도 못 붙이는 동안, 백건우는 마침 지나가던 꽃장수에게서 꽃다발을 사 윤정희에게 안겼다. 이 꽃다발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함께 되돌아보는 시간

피아니스트 백건우· 영화배우 윤정희

콘서트홀 백스테이지에서 월간지 표지 촬영 중인 백건우. 이 촬영에서 최고의 감독은 배우 윤정희다.

함께 살아온 40여 년 동안 이들 부부는 각자 예술의 길을 걸어가는 틈틈이 배우자의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백건우가 연주회를 할 때면 그곳이 어디든 공연장 제일 뒷줄에는 언제나 윤정희가 앉아 있다. 그곳은 그녀가 늘 청중들의 반응을 지켜보고 또 연주회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는 자리이다. 연주회가 없을 때면 백건우가 윤정희의 영화 촬영에 동행한다. 아내를 격려하는 마음도 있지만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도 크다. “스크린으로 보는 아내가 낯설게 느껴진 적이 전혀 없었는데, 최근 딱 한 번 그런 경험을 했어요. 칸 영화제 레드카펫 행사 때 카메라맨이 우리를 따라왔죠. 클로즈업된 아내 얼굴이 큰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데, 내가 알던 사람과 참 다르게 느껴지더군요.”

피아니스트 백건우· 영화배우 윤정희

지난 2월 <예술의전당 예술대상>에 연주일정으로 불참한 백건우를 대신해 시상식 에 참석한 윤정희. 백건우의 대상 수상 소감이 담긴 손편지를 읽고 있다. “저를 대신해 이 자리에 여러분과 함께한 저의 아내를 사랑해주시고”라는 문구는 쑥스러워 읽지 않았다는 후문.

오는 9월 이들은 다시 함께 한국을 찾는다. 늘 새로운 길을 추구하던 이들 부부지만, 이번 귀국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위해서 마련되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9월 22일부터 10월 3일까지 데뷔 50주년을 맞이한 윤정희의 회고전을 기획했다. 3백 편이 넘는 출연작 가운데 그녀가 직접 선정한 대표작 20편이 이 기간 중 상영된다. 한편 백건우는 9월 29일 콘서트홀에서 70세 기념 독주회를 가진다. '선물'이란 제목으로 펼쳐지는 이번 공연은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 5번으로 시작해 브람스의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 그리고 리스트의 ‘바흐 이름에 따른 음계명 환상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공연의 의미를 백건우는 ‘복기復碁’를 위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모르는 세계에 뛰어드는 것을 좋아했어요. 여행을 가더라도 미리 공부를 하고 가는 것보다 백지 상태에서 직접 뛰어들어 새로운 발견을 하는 것을 즐겼죠. 음악도 늘 그런 마음으로 만들어왔고, 그런 식으로 음악 세계를 넓히는 것이 저의 야심이었습니다. 다행히 운이 좋아 그때마다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요. 예술의전당에서 일주일 동안 진행했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프로젝트는 그중에서도 제 인생의 가장 의미있는 도전이었어요. 기획사와 공연장의 도움은 물론 찾아와주신 청중의 응원이 무엇보다 저를 지탱해주던 힘이었지요. 그럼에도 아직 가보지 못한 세계가 무궁무진한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제게 시간이 한없이 허락된 것도 아니고, 이제는 성취한 것을 돌아보고 정리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시기가 온 것 같아요. 하나하나 되짚어봐야죠.”

 

이번 공연에는 제목처럼 특별한 ‘선물’이 준비되어 있다. 2부 순서에서 그가 팬들의 신청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수많은 신청곡들이 그들만의 다양한 사연과 함께 접수되었다. 선택받은 팬들은 백건우, 윤정희 부부의 저녁식사에 초대될 예정이다.

 

글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6년 9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