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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행화탕, 어부사(漁父詞), 그리고 낮에 죽은 그림자의 고양이의 노래

by예술의전당

아티스트가 직접 소개하는 ‘내 인생의 공연’

이번 연재는 무대에 서는 아티스트가 직접 소개하는 ‘내 인생의 공연’을 다룹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공연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요즘,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아티스트들의 목소리를 관객분들께 색다른 방식으로 전달하고자 기획했습니다. 예술가들의 인생에서 크게 힘이 되었던 공연이나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어준 공연을 소개함으로써 위기 극복에 대한 희망이 여러분께 전해지길 바랍니다.


이번 호에서는 해금 연주가 천지윤이 해금과 현대음악, 그리고 시의 만남을 시도한 <천지윤의 해금 : 관계항3 : 시(詩)> 공연을 돌아보았습니다.

기존의 전통음악 안에서 해금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1960~1970년대 해금 산조가 세상에 나오며 독주 악기로 막차를 탔다. 해금 독주곡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영희류 해금 산조’ 가락의 근원이 경기굿인데, 해금은 바로 그 경기굿판에서 거칠게 생존한 악기다. 그랬던 해금이 21세기 국악기 중 가장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여주는 독주 악기가 됐다. 지판 없이 허공에 메인 줄을 재주껏 운용하다 보니 어떤 조성의 음악이든 소화할 수 있게 됐고, 다종다기한 악기나 장르와의 자유로운 협주도 가능해졌다. 이렇게 활동의 영역이 넓어지니 사람들이 해금 소리가 참 매력적이란다. 여러 장르에서 러브콜을 받았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 이제는 서구의 현대음악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해금연주가 천지윤은 현대음악과 자기 정신세계의 교감을 음악과 공연으로 풀어냈다.

나는 묘하게 이 세계에 이끌렸다. 남이 잘 건드리지 않는, 청중도 많지 않은 ‘현대음악’. 이 장르와 내 정신세계가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현대음악계의 거목(巨木)인 백병동 작곡가를 2010년 처음 뵌 이후 일곱 개의 해금 작품을 모았다. 그리고 2016년 금호아트홀에서 <천지윤의 해금 : 관계항2 : 백병동> 이라는 공연을 올리기에 이른다. 나는 백병동의 음악 가운데 현대적 느낌이 물씬 나는 성악곡에 이끌렸다. 해금 곡으로 개작하는 도중에 가사는 탈락됐지만, 선율의 느낌을 끌어내기 위해 시어(가사)를 음표 아래 하나하나 적었다. 연습하는 동안 그 시어들이 내 몸을 통과해 마음을 움직였고, 마침내 소리의 결을 완전히 바꿔놓는 화학작용을 경험했다.


이 작업을 계기로 시를 기반으로 한 음악을 만들고자 했다. 이 마음은 후에 <천지윤의 해금 : 관계항3 : 시(詩)>라는 작품으로 결실을 맺었다. 인상 깊게 들었던 음반 『사운드 스케이프』를 작곡한 윤혜진 작곡가에게 1부 작품을 의뢰했고, 2부는 오랫동안 음악 그룹 ‘비빙’ 활동을 함께한 장영규 작곡가에게 맡겼다. 유니크함과 고상함을 잃지 않는 그의 음악세계를 신뢰하기에 선뜻 작품을 의뢰했다.

‘낮에 죽은 그림자의 고양이의 노래’는 해금을 중심으로 25현 가야금, 38현 양금, 거문고, 타악으로 구성된 5중주곡이다.

두 챕터의 음악은 시대적, 장르적으로 현대음악에 해당한다. 나는 왜, 해금과는 출생지가 멀고 먼 현대음악에 끌렸을까? 그것은 이 기괴하고 복잡한 선율이 내 무의식을 건드리고, 나를 잠자고 있는 내면의 이야기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현대음악은 평소 표출하기 힘들고 꺼내볼 기회가 없는 마음을 더듬어 소리로 표현하는 데에 적합하다. 이 음악을 낯설고 어려운 테크닉의 음악으로만 바라본다면 음악에 내재된 메시지나 이야기처럼 청중의 마음을 두드리는 결정적인 것을 놓칠 수 있다. 나에게 평소 표출하기 어려운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면 청중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러한 현대음악과의 공감을 이루려면 공연장의 분위기는 어때야 할까? 시어(詩語)에서 피어오르는 느낌은 다 타고 허물어져 재만 남은 폐허인데 공연장은 으리으리하기만 하다. 격식 있는 공연장은 오히려 이 음악을 경직시킨다. 형식주의에 갇혀 음악의 본색을 잃어버리는 격이다. 허물어진 공간이 어디 있을까. 아현동에 60년 된 목욕탕이 ‘행화탕’이라는 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공간의 인상은 그곳에 축적된 시간, 거기에 머문 사람이 일군 체취로 이루어진다. 허름하고 낡았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시간성인 만큼 행화탕은 독특하고 귀한 장소다. 목욕탕 공간이 남탕과 여탕으로 나뉘었던 흔적이나, 철문을 끌어당기면 허리를 숙여야 하는 보일러실이 눈길을 끌었다. 공간을 구석구석 재미나게 연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였다. 한여름, 대관계약서를 쓴 이후 몇 번의 답사를 더 다녀왔다.

‘낮에 죽은 그림자의 고양이의 노래’는 과거·현재·미래가 뒤섞이는 듯 오묘하게 직조된다.

가을이 되어 윤혜진 작곡가의 작품이 악보로 완성되었다. 총 8악장, 35분에 이르는 곡이다. 제목은 ‘낮에 죽은 그림자의 고양이의 노래’. 해금을 중심으로 25현 가야금, 38현 양금, 거문고, 타악으로 구성된 5중주곡이다. 허수경 시인의 산문집 『너 없이 걸었다』를 읽다가 오스트리아 시인 게오르그 트라클의 시 ‘아름다운 도시’에 마음이 멎었다. 아이와 피치 못하게 헤어졌던 시간 때문에 시의 한 구절이 특별하게 와닿았던 것 같다. 시를 윤 작곡가에게 전달하니 그는 게오르그 트라클의 ‘밤의 시’를 불러왔고, 그와 같은 시대를 산 한국 시인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와 ‘고양이의 꿈’, 한국의 전통 시조 ‘바람아’까지 소환했다. 장영규 작곡가에게 전달한 시는 ‘어부사(漁父詞)’다. 가객 홍원기가 부른 ‘어부사’는 광활하고 고요한 물 위에 홀로 떠 있는 느낌을 준다. 속기(俗氣) 없이 신선의 경지를 그리는 노래. 목욕탕 공간과 물의 이미지를 간직한 어부사는 서로 호응하는 관계가 되어주었다.

<관계항3 : 시(詩)> 공연에서 천지윤은 해금을 타고 소리의 세계를 넓게 탐험했다.

‘낮에 죽은 그림자의 고양이의 노래’는 칭칭 대는 향발 소리로 시작한다. 향발은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올 만큼 작은 심벌이다. 이 소리로 공간감을 만들고, 오래 묵은 듯한 징 소리와 녹슨 듯한 운라 소리가 시간성을 만든다. 연주가들은 이 안에 시어를 뱉는 것으로 연주를 시작한다. 읊조려지는 시어는 의미 없는 소리로, 때로는 움켜쥐고 싶은 소중한 단어로 모습을 바꿔가며 부유한다. 해금과 거문고는 시조 ‘바람아’를 모티프로 한 선율을 연주한다. 연결되는 악장에서 게오르그 트라클의 ‘아름다운 도시’와 중첩되며 유럽의 어느 광장으로 소리를 이끌어 간다. 해금·가야금·양금은 서로 다른 시간에 치열하게 존재하고, 저마다 다른 속도감으로 제 생(生)을 밀고 나간다.


각 악장에서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내던 시어와 선율은 곡의 후반부에 이르러 얽히고 설키며 만난다. 악기마다, 악장마다 서로 다른 시간의 축을 이루고, 다양한 공간으로 이끈다.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 속 11차원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듯 과거·현재·미래가 뒤섞이는 듯 오묘하게 직조된 음악이 ‘낮에 죽은 그림자의 고양이의 노래’다.


‘어부사’는 장영규가 만든 엠비언트 사운드에 어부사의 원가락을 얹어 연주했다. 공간을 채운 이 사운드는 고요한 물소리로 시작한다. “푸른 줄 잎사귀 위에 시원한 바람이 인다. 붉은 여뀌꽃 핀 옆에 백로는 한가하다.” 시어는 한가롭기만 한데 사운드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역류하기도 하고, 큰 파도를 이루기도 한다. 물은 더 큰 물을 향해 나아가며 스스로 물의 지도를 그린다. 전통 가사의 선율 구조는 단순하지만 시어에 따라 그 소리를 확장하거나 오므리거나 호방하거나 겸손해질 수 있다. 서너 개의 음정만으로 다양한 음색과 셈여림, 선율의 도약을 시도해본다. 해금을 붙들고 물소리에 의지해 나아간다. 고요한 물빛부터 바다 한가운데의 광활함까지 음악적 전경을 그리며 소리의 경계를 확장해본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나를 잉태하셨을 적에 물고기 태몽을 꿨다고 한다. 내 사주의 형상은 ‘범람할 정도의 큰 강’이라는 풀이를 들었을 때 태몽을 떠올렸다. 물의 기억을 간직한 행화탕을 소리로 물들이는 행위를 하며 나는 태어난 모양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해금이라는 악기를 가지고 태곳적 굿판의 선율을 몸에 새기고, 서구 현대음악에서 요구하는 ‘새로운 테크닉’을 손끝으로 단련한다. <관계항3 : 시>는 오스트리아 어느 아름다운 광장에서 출발해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조선의 바다를 향해 유영한다. 언어로 시작된 이 음악 안에서 소리의 세계를 넓게 탐험할 수 있었다. 언어는 몸의 상태를 변화시키고, 변화된 몸의 상태는 전혀 다른 소리를 생성한다. ‘소리를 그리기 위한 내 몸과 정신의 지도는 어떠해야 할까.’ 이것은 내 오랜 화두가 될 것 같다.

천지윤 해금 연주가

국립국악중고등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공부했다. 이화여자대학교 음악 박사로 논문 <지영희류 해금산조 변천 과정 연구>를 썼다. 독집 음반 『관계항1 : 경기굿』, 『관계항2 : 백병동』, 『여름은 오래 남아』, 『산조와 무악』을 발매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추계예술대학교 외래교수이며 ‘천지윤의 서재 콘서트’를 기획·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