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이 술시합 한 곳 ‘가무낙도’ 종주
지도 위를 걷다 화양구곡 도명산
도명산道明山 정상의 광활한 조망. 가무낙도의 산 중 풍광이 백미인 곳으로 ‘도사가 도를 깨달았다’는 곳이다. |
명승지 화양구곡華陽九曲이 빚은 도명산道明山(650.1m)은 ‘도사가 도를 깨달았다’는 곳이다. 가령산에서 도명산 가는 길은 산등성이의 수려한 암릉과 낙락장송이 풍광을 빛내고, 발길 닿는 데마다 시원스런 조망과 온갖 기암괴석이 눈을 호사롭게 해준다. 또한 상학봉, 묘봉, 문장대, 천왕봉에 이르는 속리산 조망이 한눈에 펼쳐진다. 게다가 석림石林을 이룬 도명산 대협곡에 들어서면 15m에 이르는 거대한 벽면에 새겨진 마애삼존불이 속세를 벗어난 것인지 의심케 한다. 진정 ‘가무낙도歌舞樂道’의 산이 아닐 수 없다.
“안빈낙도, 청빈낙도는 들어봤어도 가무낙도란 고사성어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산수에 파묻혀 노래와 춤을 추듯 산행을 하며 도를 즐긴다. 참으로 기막힌 산이죠.”
여름의 정열을 상징하는 나리꽃이 가령산 오름길에 화사하게 피었다. |
화양구곡을 품은 가무낙도의 산
옛 선현들은 이곳 화양구곡을 찾아 가무와 술로 풍류를 즐기고 도를 논했다. 공림사의 스님들 또한 화양구곡을 오가며 도명산 마애삼존불 앞에서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며 해탈을 추구했으리라. 깨달음의 방법은 제각각인 법. 산꾼들에게 가무낙도란 무엇일까. 두 발로 춤을 추듯 산수를 즐기며 정상에 서는 입산의 즐거움일 터다. 이 말에 딱 들어맞는 산이 바로 가령산~무영봉~낙영산~도명산 종주코스다.
“한여름에 가무낙도 종주라니요? 뜻풀이와는 정반대인데요? 고생 끝에 도명산에 이른다는 말이겠죠?”
햇볕이 쨍쨍한 아침 일찍 선현들의 발자취와 향기가 서려 있는 화양구곡의 상류에 들어선다. 자연학습원 삼거리에서 화양천에 내려설 무렵 관광버스 한 대가 멈추더니 40여 명의 등산객들이 우르르 내려서 산으로 계곡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그래도 3분의 1 정도는 산 쪽으로 향한다. 그들을 뒤쫓아 아내가 화양천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한쪽 발이 이끼에 미끄러져 물에 빠지고 만다. 설상가상 발목까지 삐끗해서 산행을 못 할까 안절부절 못하고 어쩔 줄을 모른다.
산 전체가 골계미를 이룬 낙영산落影山 너머로 첩첩산중이 너울진다. 당 고조의 세숫대야에 이 산의 그림자가 떨어져 비쳤다고 하여 낙영산이다. |
“오늘 같은 무더위에 잘 됐네요. 선현들처럼 화양구곡에 발 담그고 풍류나 즐기고 있어요. 하산 무렵 학소대에서 만납시다.”
가령산 초입에서 아내와 생이별하고 앞선 이들을 쫓아 가령산을 향한다. 산길은 초입부터 시종일관 오르막길이다. 다리가 금세 묵직해진다. 사면 길은 능선을 타면서 더 가팔라지고 거칠어진다. 앞선 사람들이 지쳤는지 뒤로 처지기 시작한다. 굽이진 숲길 옆의 커다란 바위 앞에 놓인 계단을 올라선 후에야 조망이 트인다. 멀리 연봉을 이룬 낙영산~도명산의 무수한 지릉이 겹겹이 펼쳐진다. 하나같이 하얀 암반과 암릉을 이룬 수려한 산세다. 그 아래로 화양천 물줄기가 흘러간다.
“이제야 살 만하네요. 바람도 시원하고요. 힘들게 오른 보람이 있네요.”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거침없이 펼쳐지는 조망에 환호성을 지른다. 화양구곡을 품은 화양천이 가령산 초입인 충청북도 자연학습원에서 들머리인 도명산 학소대 쪽으로 길게 뻗어나간다. 경관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은 구곡九曲이나 팔경八景이라는 이름이 으레 붙기 마련이지만 속리산 주변의 산들과 어우러진 계곡과 산세는 대부분 진짜배기다.
낙영산의 낙타바위. 마치 한 마리의 괴수가 낙락장송 옆에 웅크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낙타 등에 오르면 대야산, 뇌정산, 백화산뿐만 아니라 문장대, 천왕봉, 상왕봉 등 연봉을 이룬 속리산이 한눈에 보인다. |
우암 송시열이 이름 지은 화양구곡
2014년 명승 제110호로 지정된 화양구곡은 조선 중기에 우암 송시열이 은거하면서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화양동에 9곡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화양계곡을 따라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의 절경이 펼쳐진다. 수려한 자연 경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유교 관련 유적이 조화를 이룬 명승지로 유명하다.
주릉의 헬기장에 도착하니 조망이 활짝 열린다. 동쪽으로 대야산과 조항산, 청화산이 솟구쳐 병풍을 이룬다. 헬기장에서 가령산(645.8m) 정상은 코앞이다. 정상석과 이정표(낙영산 4.2km, 자연학습원 1.8km)가 없다면 그냥 지나칠 법한 평이한 봉우리다. 뛰 따라 오른 산악회 사람들이 정상 인증 사진을 찍은 후 지도를 내밀며 길을 묻는다.
“화양구곡 파천으로 하산하는 코스가 어디인가요?”
“지도상의 등산로는 다음 능선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쭉 내려가면 됩니다.”
괴산 도명산 마애삼존불상. 석림石林을 이룬 협곡 안에 세 개의 불상이 선각되어 있다. 눈앞에 보이는 불상은 높이가 무려 14m에 이른다. |
그들과 도명산까지 당연히 동행할 줄 알았던 터라 곧장 하산한다고 생각하니 내심 서운해진다. 어찌 보면 땡볕 더위에 화양구곡에서 풍류를 즐기는 게 백번 생각해도 현명한 판단이다. 다만 풍광이 수려한 도명산 대신 볼품없고 힘들기만 한 가령산을 오른 게 이해가 안 됐다.
“도명산이 그렇게 멋진 줄 몰랐네요. 다음 산행에 꼭 반영하겠습니다.”
가령산에서 낙영산을 향해 주릉을 타고 남서쪽으로 내달린다. 조망이 트이지 않는 거친 능선의 작은 오르내림이 수없이 반복된다. 아무도 없는 호젓한 산길은 내 안을 들여다보게 하고 나름 입산의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거대한 기암이 자리한 도명산 정상. 조물주가 빚어놓은 듯한 수려한 암봉에 올라서면 360도 파노라마가 거침없이 펼쳐진다. |
무영봉(751m)에 도착한다. 공터에 돌탑이 쌓여 있고 그 위에 ‘무영봉’이란 정상석이 소박하게 놓여 있다. ‘무명봉’을 잘못 읽어 ‘무영봉’이 됐을 법한 봉우리다. 그래도 명색이 가무낙도 중 제일 높은 산이다. 가무낙도의 산들이 도명산을 제외하곤 희한하게도 능선은 수려한데 산정은 볼품없다.
무영봉에서 주릉은 서쪽으로 방향을 틀며 털썩 내려앉는다. 난간이 설치된 가파른 나무계단을 내려서는데, 화강암이 산정을 수놓은 낙영산의 거대한 암산이 눈앞을 가린다. 이내 안부에 내려서자 집채만 한 바위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옆에서 보면 큰바위얼굴, 앞에서 보면 맘모스를 닮은 듯한 바위다.
기암괴석이 즐비한 낙영산 암릉길
낙영산 오름길은 내리 바위투성이다. 슬랩을 이룬 마당바위를 거쳐 헬기장을 지나자 능선 숲 한가운데 코뿔소와 낙타 등을 닮은 거대한 괴수 바위가 서 있다. 낙영산 최고의 뷰포인트인 낙타바위다. 낙타 등에 올라서니 조망이 거침없다. 무영봉 너머로 대야산, 그 너머로 뇌정산과 백화산이 높디높게 솟아 있다. 묘봉, 문장대, 천왕봉, 상왕봉 등 연봉을 이룬 속리산도 한눈에 보인다.
기암괴석과 낙락장송이 어우러진 능선길을 따라 낙영산落影山(746m) 정상에 이른다. 산 전체가 골계미를 이룬 수려한 산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은 숲이 우거져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 낙영산이란 이름은 신라 진평왕 때 당 고조가 세숫대야에 비친 아름다운 산의 모습을 찾은 데서 유래한다. 신하를 불러 세숫대야에 비친 산 그림을 그리게 한 후 이 산을 찾도록 했다고 한다. 하지만 찾지 못해 걱정하던 중 어느 날 한 도승이 나타나 이 산의 위치를 알려주니 산 이름을 ‘산의 그림자가 떨어지다’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화양구곡 제9곡인 파천. 물 위로 뻗어나간 암반이 마치 꿈틀대는 외계생명체를 보는 듯 기이하다. |
도명산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가령산 초입에서 발목을 접질린 아내가 학소대에 왔다가 햇빛 피할 데가 마땅치 않아 파천에서 쉬고 있다는 연락이 온 터다.
도명산과 공림사를 잇는 옛길인 암부사거리에 내려선다. 괴산 미륵산성(사적 제401호) 터다. 허물어진 산성의 흔적으로 보이는 돌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다. 이 산성은 고려시대에 낙영산과 도명산 정상을 남북으로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는데, 전체 둘레가 5.1km에 이른다. 성 안에는 여러 개의 건물터가 있고, 화양계곡과 사담계곡, 도명골 계곡 쪽으로 문을 내었다. 전설에 의하면 홀어머니를 서로 모시려던 남매가 아들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고 누이는 성을 쌓아, 먼저 끝내는 사람이 어머니를 모시는 내기를 하였다 하여 ‘남매성’이라고도 불린다.
조물주가 빚은 산정, 도명산
암부사거리에서 도명산을 향해 북쪽으로 계곡을 내려선다. 물이 흐르지 않는 너른 숲길이다. 집채만 한 바위들이 완만한 계곡 곳곳에 서 있다. 길은 낙영산 주계곡을 지나 안부로 이어진다. 거대한 바위 슬랩을 이룬 암릉이 도명산 정상으로 뻗어 있는데, 비법정탐방로 푯말이 있다. 암릉을 우회해서 올라선다.
도명산 정상에는 조물주가 바위를 반죽해서 만들어놨을 커다란 기암괴석이 놓여 있다. 도인들이 사는 선계를 보는 듯하다. ‘도사가 도를 깨달았다’는 데서 유래한 도명산이란 이름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암봉 정상에 올라서니 360도 거침없는 풍광이 펼쳐진다. 지나온 산들을 비롯해서 속리산까지 한눈에 보인다. 일명 두류봉이라 불리는 묘봉, 언제 봐도 신령스런 문장대, 학이 모여 산다는 상학봉이 첩첩산중 맨 끝에서 산너울 지고, 그 앞쪽에 덕가산, 금단산 등의 산줄기가 겹겹이 펼쳐진다. 맨 앞에는 지나온 낙영산 능선이 마치 산세가 새의 부리를 닮았다는 조봉산으로 이어진다.
정상을 내려서자 네댓 개의 집채만 한 바위들이 석림石林을 이룬 협곡이 나온다. 괴산 도명산 마애삼존불상(충북 유형문화재 제140호)이 새겨진 대협곡이다. 삼존불이 새겨진 거대한 바위 모습에 입이 쩍 벌어진다. 장관이다. 본존불은 높이 9.1m이고, 얼굴 길이만 2m에 이른다. 깨어진 부분을 감안하면 무려 15m에 이르는 대불이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거대한 석문을 빠져나온다. 급경사지 위험지역을 벗어나자 완만한 숲이 나오는데 때때로 집채만 한 바위들이 나타나 놀라게 한다.
도명산을 빠져나오니 화양구곡 제8곡인 학소대鶴巢臺다. ‘청학이 바위 위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는 바위벽이 화양천 앞에 수려하게 서 있다. 이처럼 도명산은 풍류와 도와 해탈에 관한 삼박자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산이다. 하지만 깨달음을 정의하는 순간 미혹이 시작될 터. 마냥 산을 걸으면서 마음을 비우고 자연에 눈을 호강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의 길이 아닐까 싶다.
자연학습원까지는 2km. 초록빛 가득한 화양계곡 옆 숲길이다. 화양구곡 제9곡인 파천에 이르니 티 하나 없는 하얗고 너른 암반이 펼쳐진다. 그 위에 흐르는 물결이 마치 ‘용의 비늘을 꿰어 놓은 것’ 같다 하여 파천이라 부른다. 신선들이 이곳에서 술잔을 나누었다고 한다. 파천에서 아내가 건네주는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들이켜니 이 또한 마치 선계에 들어선 듯하다.
산행길잡이
속리산국립공원의 가령산~무영봉~낙영산~ 도명산 종주코스는 일명 가무낙도라 부른다. 화양천 상류의 충청북도 자연학습원이 원점회귀 코스 들머리다. 2014년 명승 제110호로 지정된 화양천의 화양구곡은 조선 중기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은거하면서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이름을 지었다. 화양계곡을 따라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 등의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가령산은 자연학습원 삼거리에서 화양천을 건너 오른다. 가무낙도 종주 능선은 기암괴석과 수려한 소나무가 어우러져 가는 곳마다 절경이다. 봉우리가 600~700m대에 불과하지만 능선길이 하나같이 거칠고 굴곡이 심하다. 암봉과 암릉이 연이어지고 굽이지기를 수십 번 반복한다. 무더운 여름에 4개산을 얕보고 종주에 나섰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다. 특히 산세가 가파르니 샛길로 빠지지 않도록 한다. 하산은 도명산에서 마애삼존불을 거쳐 학소대로 하면 원점회귀가 편안하다. 초보자를 동행할 때는 학소대를 들머리 삼아 경관이 제일 수려한 도명산만 산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숙식(지역번호 043)
들머리인 충북자연학습원(833-8005)이 자리한 화양천 주변에 자연식당(833-8406, 올갱이국), 숲속의 쉼터식당(833-0029, 닭백숙), 물레방아식당(833-6653, 된장찌개), 화송식당(010-6430-8301, 닭백숙) 등이 있다.
교통
자가용 이용 시 서울-중부고속도로-평택제천고속도로-음성IC-37번국도-괴산-49번 지방도-충북자연학습원. 주차는 충청북도 자연학습원 인근의 공터나 도로 갓길에 한다.
등산지도 특별부록 지도 참조
월간산 8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