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세계일주] 민심 무시했던 왕 200m 바위산에 스스로를 가뒀다

[여행]by 월간산
스리랑카 시기리아

불가사의한 하늘 궁전… 의지할 건 낡은 철제 계단뿐

온 사방이 초록으로 무성한 열대 밀림지대에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우뚝 솟은 시기리아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순박한 사람들의 미소가 아름다운 섬, 인도의 최남단 끝에 있으며 진주처럼 생겨서 ‘인도양의 진주’로도 부른다. 론리플래닛도 마르코폴로도 예찬한 섬나라, 스리랑카는 싱할라어로 ‘크고 밝게 빛난다’는 뜻이다. 홍차와 불교의 나라인 스리랑카를 한 달간 여행하면서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광활하게 펼쳐진 차밭도 고대의 불교문화를 간직한 사원도 아니었다. 그곳은 바로 시기리아Sigiria였다.


담불라 지역 중앙 마탈레, 온 사방이 초록으로 무성한 열대 밀림지대에 적갈색의 바위산이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우뚝 서 있다. 높이 약 200m, 홀로 우뚝 서 있는 일명 ‘사자바위’라고 불리는 시기리아다. 놀라운 사실은 이 바위산 위에 요새왕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요새왕궁은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5세기 신할로 왕조의 카샤파Kashyapa 왕이 건설했다.


카샤파 왕자는 아버지를 생매장해서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후 민심과 동생 목갈라나Moggallana의 보복이 두려워 왕도였던 아누라다푸라에서 80km 떨어진 시기리아의 바위산 꼭대기에 왕궁을 건설하고 천도했다. 그러나 그 영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인도로 망명했던 목갈라나가 군대를 이끌고 쳐 들어왔고 요새왕궁이 함락되면서 카샤파 왕은 자결했다. 왕궁은 16세기까지 불교수도원으로 사용되다가 버려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밀림에 갇혀서 역사 속에 숨겨져 있던 시기리야를 발견한 것은 스리랑카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기, 영국군 장교 포브스에 의해서이다. 포브스는 망원경으로 주변을 관찰하던 중에 벽에 그려진 벽화를 발견했고 이를 계기로 시기리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흙을 파헤쳐 보니 1,200개의 계단 위에 만들어진 왕궁은 빨간 진흙 벽돌을 기초로 건축되었고, 벽면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생생한 그림으로 남겨져 있었다. 3,000여 평의 왕궁 터에서 궁전, 회의장, 정원, 목욕탕, 수영장 등을 발굴했다.

불교의 왕국 스리랑카에서 신성하게 여겨지는 코끼리들을 강가에서 목욕시키고 있다.

시기리아 조망 포인트, 피두랑갈라

담블라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시기리아였지만 이곳에선 전체를 바라볼 수 없다. 시기리아 전체를 조망하기 가장 좋은 장소는 마주보고 있는 또 다른 바위산, 피두랑갈라Pidurangala이다. 피두랑갈라는 시기리아에서 북쪽으로 직선거리가 1km가 채 되지 않을 만큼 가깝다. 피두랑갈라 정상에 서면 절벽 위의 시기리아뿐 아니라 마탈레의 비현실적인 시골풍경을 360도로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일출시간에 방문한다면 낮은 안개가 발 아래 펼쳐진 계곡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극적이고 아름다운 광경을 만날 수 있다.


피두랑갈라 정상까지는 체력 수준과 선택한 길에 따라서 차이는 있지만 50분 정도 소요된다. 경사도가 거의 80도에 달하고 일부 구간은 바위를 타고 올라야 한다. 어떤 구간은 길이 상당히 좁아서 방문객들이 많을 땐 정체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특별한 안내판은 없고 단지 바위에 그려진 화살표만이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안내해 준다.


새벽 4시 기상, 숙소의 호스트는 특별히 아침 도시락을 준비해 주었다. ‘툭툭’을 타고 하늘을 바라보니 별의 축제가 한창이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히말라야에서나 볼 법한 선명하고 밝은 별들의 반짝거림에 넋이 나갔다.


피두랑갈라 입구를 지나면 석굴사원을 통과해야 정상으로 오를 수 있다. 피두랑갈라 초입의 계단길은 가로등이 켜 있지만 사원을 지나면 길의 경사도가 심해지면서 가로등이 사라져서 상당히 어둡다. 일출을 보려고 피두랑갈라를 오를 때에는 반드시 헤드랜턴을 준비해야 한다. 사방이 어두우니 헤드랜턴의 불빛에 의지해서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는 것은 쉽지 않다. 정상이 가까워지니 그 계단조차 사라졌다. 거친 바위 사이를 암벽등산하듯 힘겹게 기어올랐다.


피두랑갈라 정상에 오르니 벌써 여명이 시작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일출을 기다리고 있다. 바위는 마치 거대한 축구장처럼 넓고 평평하게 펼쳐져 있다. 맞은편에는 어둠속 너무나 또렷이 넓고 넓은 정글 속에 시기리아가 보였다. 앗!!! 저 바위산. 바로 시기리아 요새왕궁이었다. 저 바위 위에 왕궁이 있었다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피두랑갈라에서 바라보는 시기리아의 모습에 시선이 박히더니 눈을 뗄 수 없다. 갑자기 가슴이 콩콩 뛴다.

바위산 주변은 기하학적으로 설계된 물의 정원이 넓게 펼쳐져 있다.

어둠이 걷히니 길은 더 험해 보였다

구름을 뚫고 나올 해님을 기다리는데 피두랑갈라를 에워싸고 있는 숲에 운해가 넘실댄다.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수줍은 태양이 고개를 살짝 비추다가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덕분에 운해가 깔린 숲에 내리는 빛 내림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었다. 해가 어느 정도 올라온 후 가장 멋지게 조망할 수 있는 커다란 바위 근처로 이동해서 시기리아를 눈에 가득 담았다. 사람들 모두 시기리아를 배경으로 인생사진을 찍기 위해 바위 근처로 모여들었다. 바위를 지나서 조금 더 직진하니 장대한 열대림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 마치 수묵화처럼 멋진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멋진 일출도 보았으니 여유롭게 장엄한 열대림을 배경삼아 멋진 아침식사를 즐겼다. 이젠 피두랑갈라를 내려간다. 올라올 때는 주변이 어두워서 몰랐었는데 길은 생각보다 무척 험했다. 바위 구간엔 적당하게 손을 잡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한발 한발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새벽에는 어두워서 보지 못했던 와불상 토굴에 들렀다. 절벽 아래에 움푹 파인 공간에 누워 있는 부처님이 계셨다. 길이가 13.7m에 달하는 벽돌 와불상이다. 돌베개 위에서 평화롭게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참으로 행복해 보인다.


이제부터는 길이 조금 편해졌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니 새벽에 지나쳤던 피두랑갈라 석굴사원이다. 카샤파 왕은 시기리아에 왕궁을 건설하면서 그곳에서 수행하던 승려들을 피두랑갈라에 이동시키고 이들을 위해 피두랑갈라 사원을 새로이 건립했다고 한다. 이 사원에도 중앙에는 와불상이 계셨다. 피두랑갈라에서 내려오니 정상에서 보았던 시기리아의 모습이 빨리 보고 싶어진다.

거대한 사자발톱이 버티고 있는 궁전 입구. 이곳을 통해서 요새왕궁으로 들어갈 수 있다.

평생 볼 코끼리를 한꺼번에 만나다

피두랑갈라에서는 일출, 시기리아에서는 일몰 그러면 낮시간은? 그래서 선택한 것이 코끼리 사파리투어였다. 운이 좋아야 코끼리를 만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하늘에 맡기고 오룰루 에코 파크Hurulu Eco Park로 향했다. 엄청 뜨거운 햇살 아래 오픈 지프를 타고 서서 매의 눈으로 이곳저곳을 훑으며 숲속을 돌고 돌아서 만난 코끼리가족. 가족끼리 아침 산책을 나왔는지 구경하는 우리들은 안중에도 없이 완전 무시하고 아이들을 챙기면서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먹을 것을 찾는다.


이때부터 숲 곳곳에서 코끼리들을 만났다. 혼자 돌아다니는 코끼리는 없었다. 항상 가족끼리 함께하는 코끼리를 바라보니 갑자기 가족이 그리워진다. 평생 봐야 할 코끼리를 모두 한 번에 본 하루였다.


늦은 오후시간인데도 시기리야 입장객이 무척 많았다. 외국인 입장료는 30달러로 꽤 큰 금액이다. 비싼 입장료 때문에 시기리아를 방문하지 않는 여행객들도 있지만 여기까지 오는 것도 쉽지 않고, 내가 스리랑카에 온 가장 큰 이유가 시기리아이니 당연히 들어가야 하지만 스리랑카 물가에 비하면 너무 비싸다.


주차장에서 시기리아 바위 직전까지는 연못, 수로, 해자 등으로 이루어진 정원 터가 남아 있다. 카샤파 왕은 바위요새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는지 적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서 호수를 만들고 해자를 조성해 악어를 풀어놓았다. 이 정원에는 지하 유압 시스템을 포함한 수유지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중 일부는 오늘날도 작동하고 있다.


시기리아 해자에서 바위산 입구까지 이르는 직선으로 뻗은 길에 서면 눈앞에는 사진과 동영상으로 수없이 보았던 거대한 바위산이 마주한다. 그 규모에 놀라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거의 수직으로 서있는 바위산에 만들어진 철제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도 쉽지 않다. 철제로 만들어진 계단은 발을 내딛을 때마다 삐걱 소리가 난다. 바위산 아래를 바라보면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져서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은 올라가서는 안 될 것 같다. 철제로 만들어진 계단을 맨몸으로 올라가기도 어려운데 약 1500년 전에 왕궁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재료들을 어떻게 운반했을까?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을까?


아슬아슬한 철제계단을 힘겹게 오르니 원통 속에 나선형의 계단이 있다. 하나는 올라갈 때, 또 하나는 내려갈 때 이용한다. 이 계단을 올라야만 약 1,500년 전 프레스코 페인팅으로 그린 미인도 벽화를 볼 수 있다. 프레스코 페인팅은 석고가 마르기 전에 재빨리 그림을 그려서 그림물감이 표면으로 배어들면서 벽이 마르면 그림이 벽의 일부가 되는 페인팅 기법이다. 그림의 수명도 벽의 수명만큼 지속된다. 올라가는 길도 위험하기 짝이 없다. 처음에 만들어진 길의 일부분은 이미 폐쇄한 곳도 있었다.

인간의 두려움이 만든 난공불락 공중도시인 시기리아를 하늘에서 본 모습.

1,500년 전의 미인을 만나다

절벽에 시기리아 최고의 보물인 ‘미인도가’ 있다. 거의 원형 그대로 간직한 선명한 색채의 미인도는 5세기에 그린 그림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미인도는 왕의 시녀들이 시중드는 압살라라는 요정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한데 그 여인들의 모습은 뛰어난 고대 벽화기술 덕분에 지금까지 남아 있다. 원래는 500여 명의 여인이 길이 140m, 높이 40m에 달하는 바위에 그려져 있었으나 대부분 지워지거나 훼손되어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10여 명뿐이다. 1831년 영국군 포브스 대령이 발견한 벽화가 바로 미인도이다. 이젠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예술로 자리매김했다.


미인도를 보고 다시 빙글빙글 나선형의 계단을 내려오면 높이 3m의 ‘거울벽mirror wall’을 만난다. 회반죽을 칠하고 그 위에 달걀흰자와 꿀, 석회를 섞은 것을 칠한 후에 표면을 열심히 닦아서 거울처럼 반짝거린다. 미인도에 해가 비추면 그대로 벽에 비쳐서 ‘거울벽’이라고 부른다. 매끄럽게 닦인 벽면은 다양한 문자와 그림을 남겨서 그래피토Graffito로 이용하기도 했다.  거울벽에는 역대 왕조의 흥망을 노래한 서사시와 시기리야 벽화의 여인을 칭송하는 시들도 새겨져 있어서 문학적 가치가 높다.

수직에 가까운 절벽에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철제 계단을 통해 요새왕궁으로 올라간다.

난공불락의 하늘왕국에 서다

거울벽을 지나오니 드디어 사자 테라스. 계단 양쪽에는 엄청나게 큰 사자의 앞발과 발톱이 있다. 원래는 사자의 머리도 있었다고 한다. 사자의 양발 사이에 만들어진 계단을 오르면 왕궁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철제 계단은 거의 90도처럼 느껴질 만큼 급한 경사이다. 절벽 옆으로 만들어진 난간을 지날 때는 다리가 후들거린다. 무려 1,200여 개의 계단을 밟은 후에야 정상에 도착했다.


시기리아 바위의 정상에 오르는 길은 마치 인수봉을 등반하는 것처럼 힘들었다. 정상은 국제 규격의 축구장 2개를 합한 정도.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무척 크다.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 조금 여유롭게 주변을 돌아본다. 정상에는 왕궁 터와 병영, 주거지, 연회장 등이 있고 조금 아래에 수영장과 목욕탕이 있다. 그리고 워터 가든과 분수가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고 또 놀랍다. 옛날의 영화는 사라지고 지금은 잔재만이 남아 있다. 정상에 서면 360도 조망이 열린다. 날씨가 맑으면 멀리 아누라다푸라의 하얀 다고바까지 보인다고 한다.


바위산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열대림의 모습은 평화롭기만 하다. 그 열대림에 둥글게 솟아오른 피두랑갈라의 모습이 마치 어머니의 젖가슴 같다. 오늘 새벽에 어둠을 뚫고 올랐던 바로 그 피두랑갈라이다. 시기라아 왕궁 터를 돌다가 화강암으로 만든 왕좌를 발견했다. 이곳에 앉아 열대림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궁금하다. 아버지를 살해한 것을 후회했을까? 동생이 언제 복수하러 올지 걱정하며 두려워하고 있었을까?


욕망에 눈이 멀어 패륜까지 저질렀던 카샤파가 만들어놓은 난공불락 왕국은 너무 쉽게 무너졌다. 스리랑카 유적을 찾는 여행에서 이제 시기리아는 빼놓을 수 없는 코스가 되었다. 카샤파 왕의 재위 기간은 약 18년. 시기리아 고대도시를 건설하는 데 8년을 소요했다고 하니 왕궁으로 사용한 것은 10년 정도이다. 너무 짧은 시간 동안 왕궁으로 사용되었고 많은 희생이 따랐겠지만 스리랑카의 어떤 고대 유적지보다 매력적이고 온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스리랑카의 명소로 태어났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역사의 세계이다.


본 기사는 월간산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2021.05.3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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