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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산으로 퇴근합니다, 별 보러”

by월간산

[퇴근박 특집-포천 왕방산 르포]

주중 반차 내고 즐긴 왕방산 전세 퇴근박…

일상 벗어나는 설렘에 일주일이 행복해

퇴근 후 산으로 갔더니 평범한 일상이 특별한 밤으로 바뀌었다. 왕방산 정상 부근 팔각정에서 백패킹을 즐기는 한민혜·최별님씨. 일상은 지루함의 연속이다. 집-회사-집이든, 집-학교-집이든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일상은 지겹다 못해 지친다. 더구나 코로나라는 불청객은 우리의 삶을 통째로 옭아매었다. 이럴 때 행하는 ‘작은 일탈’은 삶의 활력소가 된다. 


퇴근 후 집으로 가는 대신 백패킹 배낭을 메고 산으로 가보자. 오후 6시 퇴근 후라도 좋고, 오후 반차를 내고 가도 좋다. 익숙한 집 대신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설렘은 긁지 않은 로또를 가지고 다니는 것처럼 미지의 행복을 준다.

오지재에서 급경사를 40분 정도 오르면 소나무가 장관인 편안한 주능선길이 정상까지 이어진다. 온순한 주능선 숲길이 매력인 왕방산 지난 4월 하남 검단산 산행을 함께했던 한민혜(31)씨를 6월의 어느 월요일 오후 2시에 동두천과 포천을 잇는 고개인 오지재에서 만났다. 안양에서 보습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민혜씨는 원래 ‘출근 산행 마니아’다. 주로 오후 늦게부터 강의를 시작하는 덕에 출근 전에 산 하나를 다녀오는 식이다. 


“밤늦게까지 강의하고 나면 지쳐서 아무것도 못하고 쓰러져 자곤 해요. 그런데 평소 퇴근박 꼭 해보고 싶었거든요. 저 별 보는 거 되게 좋아해요.” 민혜씨는 퇴근박 취재를 위해 특별 게스트도 모시고 왔다. 그와 중학교 동창인 최별님(31)씨는 최근 등산과 백패킹을 함께 다니고 있는 ‘찰떡’ 사이다. 체대를 수석으로 입학한 별님씨는 크로스핏 코치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최근 잠시 휴식기를 가지고 있다. 

왕방산 정상에서 소나무를 배경 삼아 ‘발랄 샷’ 한 장.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운동을 하고 있지만 정작 등산을 시작한 건 최근이에요. 민혜가 스승인 셈이죠. 얼마 전부터 백패킹에도 입문했고요. 저 또한 주로 오후 시간에 일하는 직업이라서 퇴근박은 오늘이 처음이네요.” 차에서 배낭을 꺼내는 설렘이 평상시와는 조금은 다르다. 이 좋은 날, 밤하늘의 별과 도시 야경을 바라보며 백패킹을 즐긴다는 사실에 마치 소풍가는 아이처럼 눈망울이 초롱초롱하다. 

별님씨가 팔각정 옆 공터에 텐트를 치고 있다. “원래 남들 일할 때 놀아야 제 맛이잖아요. 하하.” 커다란 65리터 배낭을 메고 산행을 시작한다. 오지재에서 왕방산王方山(737.2m)까지는 초반만 힘들고 나머지는 온순한 숲길 정도라 백패커에게 인기가 좋다. 초반부터 나무계단이 나오는데 높이가 장난이 아니다. 팔다리 길쭉한 ‘엘리트 체육인’ 별님씨가 앞서 나간다. 20kg을 상회하는 배낭도 그녀에겐 가벼워 보인다. 


“산에 다니려고 그렇게 열심히 운동했었나 봐요. 실내에서 운동할 때는 근육을 키우고 점점 무겁게 중량 치는 재미가 있었다면, 등산은 또 다른 재미가 있어요. 산에 오면 특별한 목표가 생긴다기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자연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걷고 또 걷는 거죠. 그러면 또 몸이 건강해지니 가장 재밌고 효과적인 운동 방법이 아닐까 싶어요.”

일상의 구두를 벗고 등산화로 갈아 신는 일은 그녀들이 가장 설레는 순간이다. 등산하면 으레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할진데, 역시 피트니스 전문가의 등산에 대한 해석은 남다르다.  40분 정도를 치고 오르니 이내 주능선에 오른다. 앞으로 갈 길을 슬쩍 내다보니 완만한 능선이다. 눈에 띄게 높이 선 봉우리 대신 멋진 소나무가 의장대처럼 도열해 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어도 이 정도면 감사할 따름이다. 


“근데 왜 산 이름이 왕방산이에요? 왕방울 생각나는데.” 어떤 산을 가든 이름에 관심이 많은 현직 국어강사 민혜씨다. 

팔각정에서 내려다 본 포천 시내 야경. 하늘의 별이 땅으로 내려 앉은 듯하다. 왕방산 이름에 대한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포천시청 홈페이지에서는 ‘신라 헌강왕 3년(872)경 도선국사가 이곳에 머무르고 있을 때 국왕이 친히 행차해 격려했다 해서 왕방산이라 불렸고, 도선 국사가 기거했던 절을 왕방사라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고 적혀 있다. 쉽게 말해 ‘왕이 방문한 산’이라서 왕방산이다. 유래를 알고 앞에 선 소나무에게 마음속으로 “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라고 물어본다. 갑자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역시 하늘은 다 알고 있다. 

왕방산의 명물인 배바위. 영락없는 돛대를 단 배의 모양이다. 1.7km 지점을 지나자 긴 나무계단이 나오고 부드럽기만 했던 육산 능선에 조금씩 바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돌기둥 두 개가 마주선 바위는 특별한 이름은 없지만 기둥 위에 아슬아슬하게 얹어진 둥근 바위가 인상 깊다. 얼핏 사람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이곳은 바위를 그대로 지나도 되고 왼쪽 우회로를 따라도 된다. 배낭이 무거운 터라 괜히 바위에 올랐다가 넘어질 것 같아 몸을 사린다. 


작은 공터를 지나 왕방산 명물 배바위를 만난다. 역삼각형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소나무의 모습이 마치 돛대를 단 배와 같아서 배바위라 부른다. 바위틈도 아닌 바위 표면에 뿌리를 내린 모양새가 경이롭기까지 하다. ‘전망 맛집’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녀들은 배바위 옆에서 인증샷 삼매경이다. 배를 밀고 끌고 신이 났다.

푹신한 흙길에 자라는 이름 모를 야생화. 퇴근은 휴식의 시작이다 조금 더 걸어 이번엔 ‘조망 맛집’인 장기바위를 만난다. 나무데크 계단을 따라 멋진 소나무가 자라는 바위 위에 선다. 동두천 6산 종주(마차산~소요산~국사봉~왕방산~해룡산~칠봉산) 인증 스탬프를 찍는 빨간 우체통이 포인트를 준다. 왼쪽으로 왕방산 정상이 보이고 포천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무미건조해 보이는 도시, 하지만 이제 곧 멋진 조명이 되어 축제의 밤을 밝혀 줄 것이다. 


출발한 지 2시간 20분여 만에 왕방산 정상에 닿았다. 사진 찍고 수다 떨고 경치 구경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급할 것이 하나도 없으니 여유만만이다. 정상석과 함께 인증샷을 찍고 곧바로 팔각정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제 백패킹의 시간이다. 

산에서 마시는 커피가 가장 맛있다는 그녀들의 티 타임. 팔각정 뒤로 넓은 공터가 오늘의 박지다. 월요일의 백패킹 명소엔 다른 팀이 하나도 없어 자연스레 전세캠핑이 되었다. 혹시나 올라오는 팀이 있을까봐 서둘러 맨 앞 명당자리에 텐트를 친다. 며칠 전에도 아우라지에서 백패킹을 하고 왔다는 그녀들이 능숙하게 장비를 꺼내고 뚝딱뚝딱 설치한다.  


“퇴근박이란 문화가 참 좋은 것 같아요. ‘퇴근’이라 하면 녹초가 되어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떠올랐거든요. 사실 ‘휴식의 시작’이라는 느낌보다는 ‘하루의 끝’이란 느낌이 강했어요. 하지만 퇴근한다고 해서 하루가 끝난 건 아니잖아요. 그때부터 재미있는 일이 시작되는 건데 너무 일이 치여서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 퇴근박을 하기로 했을 때 3일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지금도 좋지만 그 기다리는 설렘이 너무 좋았어요. 퇴근박을 취미로 한다면 일상이 확 달라질 것 같아요.”   


둘은 “이 좋은 걸 왜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며 입을 모았다. 으레 휴일에만 여가생활을 즐긴다는 것에서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하루가, 일주일이, 일상 전체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텐트 치고 의자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며 수다를 떨다 보니 이내 어둑어둑해지고 퇴근박의 메인이벤트가 시작되려 한다. 


“먹는 게 남는 거죠. 하하.” 드디어 그녀들의 배낭이 무거웠던 비밀이 풀린다. 시원하게 얼려 온 맥주와 다양한 음식들이 쏟아져 나온다. 샐러드와 진공 포장한 수육, 주꾸미 볶음, 닭가슴살 소시지 등 산에서는 귀한 진수성찬이다. 예전에는 가스버너를 사용해 화식으로 요리를 해먹었지만 백패킹 성지 굴업도에서 화재가 발생한 사건 이후로는 비화식 음식을 챙겨 발열팩을 사용해 데워 먹는다.   


“집에서 요리를 해 진공 포장해 놓으면 간편해요. 데우기만 하면 되니까 어떤 요리라도 가지고 올 수 있어요. 솔직히 삼겹살 구워 먹는 맛이 그립긴 하지만 자연을 보호해야죠. 최근에 차박도 몇 번 다녔는데, ‘성지’라는 곳들이 하나둘씩 폐쇄되는 걸 보면서 백패킹 명소들은 우리 스스로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을 사용하지 않고 따끈하게 데운 음식들은 꿀맛이었다. 더운 여름날 땀을 한 바가지 쏟아냈던 터라 어떤 음식이라도 맛없을 수 없다.  


“전날 저녁에 미리 요리해 놓고 진공포장해서 냉동실에 넣어두면 편해요. 배낭 꾸릴 때 그냥 쓱 넣기만 하면 되니까요. 아이스팩을 챙길 필요도 없어요. 산행하는 동안 녹으니 밥 먹을 시간쯤 되면 딱 먹기 좋아요. 발열팩이 진짜 대박 아이템이에요.” 

“남들 일할 때 노는 게 가장 즐겁다”는 그녀들. 퇴근박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일상은 비극이 아닌 희극 산도 좋고 음식도 좋고 바람도 좋은데 딱 한 가지, 별이 보이지 않는다. 전날까지만 해도 구름 한 점 없는 밤이 예보되었으나 아침에 날씨가 바뀌었다. 부슬부슬 비도 내렸고 안개도 끼었다.  “어, 별 떴는데 최별님.” 무심결에 아재개그 한 번 쳤다가 분위기가 나락으로 떨어진다. 급히 분위기를 수습하느라 “하늘의 별들이 저기 다 내려와 있었네”라며 도시 야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반짝거리는 조명과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별 못지않게 아름답다. 


“진짜 별이면 어떻고 가짜 별이면 어때요. 이렇게 망중한을 즐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반짝거리는 인생을 사는 거죠.” 찰리 채플린의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란 명언을 빌려 ‘가까이서 보면 일상, 멀리서 보면 별’이 되는 풍광이다. 퇴근하고 집 대신 산으로 오길 정말 잘했다. 

왕방산 737m 경기도 동두천시·포천시  산행 거리 약 7.2km 산행 시간 약 4시간 40분 산행 난이도 하(초반 600m 정도만 급경사, 이후 주능선 완경사) 산행 길잡이 오지재 산행 들머리에 차량 7대 정도 세울 수 있는 주차장이 있다. 등산객이 붐비면 도로 갓길에 주차하기도 한다. 푸드트럭 맞은 편 입구로 들어서 T자 갈림길에서 오른쪽 포장길로 조금 가다가 왼쪽 철조망이 열린 곳이 등산로 입구다. 


T자 갈림길에서 왼쪽 임도(왕방산 여유길 8.2km)를 따라가다가 첫 번째 이정표(←임도 끝 7.1km, ↑능선 0.4km, →오지재고개 1.1km)에서 능선 방향으로 올라가도 되지만 길이 희미하고 거칠어 추천하지 않는다.  초반 600m 정도는 경사가 급하지만 주능선에 올라서면 정상까지는 산책로 정도의 완경사길이다. 동쪽 포천 대진대학교 방향이나 서쪽 동두천 쪽 임도로 내려서는 탈출로가 두 군데 정도 있다.  왕방산 정상에서 ‘팔각정’ 이정표를 보고 동쪽으로 100m 정도 가면 팔각정을 앞에 두고 텐트 10동 정도를 칠 수 있는 공터가 나온다. 팔각정 앞으로 포천 시내와 세종포천고속국도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하산은 정상에서 국사봉 방향 북서릉을 600m 정도 따르다가 ‘깊이울 분기점’ 이정표에서 왼쪽 급경사길을 600여 m 내려서면 임도와 만난다. 이곳에서 오지재까지는 이정표 상으로는 3.55km라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2.7km 정도 거리다.   백패커들은 주로 왕산사를 기점으로 원점회귀 코스를 많이 이용한다. 왕산사에 주차장이 좋고 정상까지 2.1km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교통 오지재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지하철 1호선 동두천중앙역 3번 출구에서 50번 버스를 타고 왕방리·산장 정류장에서 내려 1.7km 정도를 걸어야 한다.  동두천중앙역에서 택시를 타면 1만1,000원 정도 나온다. 자가용으로는 세종포천고속국도 선단나들목으로 나와 364번지방도를 이용하면 된다.  


식사(지역번호 031) 선단나들목에서 나와 오지재로 가는 길목에 식당이 여럿 있다. 곤지암할매소머리국밥 대진대점(541-4781), 포천한우마을(544-1500), 토방갈비탕(543-9865) 등. 오지재 산행들머리에 명물 푸드트럭이 있다. 커피, 식혜, 마즙 등 음료와 김치전, 잔치국수, 도토리묵 등을 낸다. 트럭 옆 호스에서 마실 수 있는 물이 나온다.  


본 기사는 월간산 7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