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꼰대’와 ‘어른 철부지’ 둘이 백패킹 하면?

[여행]by 월간산

홍성 용봉산

용봉산 악귀봉에서 맞는 일몰. 넋을 잃을 만큼 환상적인 노을과 풍경을 드론으로 담았다.

용봉산 악귀봉에서 맞는 일몰. 넋을 잃을 만큼 환상적인 노을과 풍경을 드론으로 담았다.

백패킹을 준비하는 건 간단할 수도 어려울 수도 있다. 몇 년 전 내가 세계여행을 할 때 가진 거라고는 배낭 하나와 그 안에 채워진 게 전부였다. 낯선 곳에서 머물다가 어느 날 문득 떠나야겠다 싶을 때는 넣고 빼고 할 것도 없이 가지고 온 걸 몽땅 배낭에 넣고 걷기만 했다.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은 대부분 만년설이 있는 고산이었기 때문에 여름에도 동계 장비를 챙겼다. 그 짐을 메고 대중교통을 타기 위해 1시간씩 기다리기도 했고 지나가는 차가 있으면 히치 하이킹으로 이동했다. 3일에서 길게는 12일 동안 산 위에 머물렀다. 혼자였기 때문에 산 위에서 뭘 먹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가벼운 라면과 빵 그리고 분말로 된 스프 같은 것만 먹었다. 거의 2년 동안 매일 그렇게 먹다 보니, 이젠 질려서 라면은 연례행사처럼 1년에 한 두 번 먹는다. 


그런데 한국에서 나의 백패킹 배낭은 다르다. 날씨나 산행 난이도에 따라 불필요한 장비는 뺀다. 함께하는 멤버의 기호에 맞춰 메뉴도 고민한다. 메뉴에 따라 수저를 넣을지 포크를 넣을지도 결정한다. 배낭 속에 불필요한 1g의 무게도 허용할 수 없다는 의지가 강하다. 차가 없으니, 교통편을 알아보는 것도 여간 수고스러운 일이 아닌데, 이 과정들을 나는 출발 전날 저녁에, 혹은 당일 새벽에 결정한다. 물론 혼자 갈 때의 경우다. 그래서 “다음달 산행지는 어디인가요?”라는 담당 기자님의 물음에 선뜻 답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해가 지기 전 텐트를 치고 잠시 누워 휴식을 취했다.

해가 지기 전 텐트를 치고 잠시 누워 휴식을 취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매주 다양한 지인들과 백패킹을 가려다 보니, 새로운 달이 시작되기 전에 한 달 스케줄이 잡히게 된다. 일단 날짜를 정해 놓고, 그 날이 되면 출발하면 되는데, 하지만 약속된 날이 되기 한 달 전부터 함께 가는 멤버들에게 문자가 날아온다. 

“까똑!”

[우리 어디가?]

[그때 날씨 보고 결정하자]

“까똑”

[뭐 타고 가?]

[날씨 보고 어디 갈지 결정되면 알아보자]

“까똑”

[음식은 뭐 가져갈까?]

[글쎄, 음식은 미리 준비 안 해도 되니까 그때쯤 다시 의논하자]

벼락치기가 몸에 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멤버들도 처음엔 여유가 있으니 그냥 넘어간다. 출발 일주일 전, 참다 못한 멤버들에게 또 문자가 날아온다. 

“까똑!”

[우리 교통편 예약하려면 빨리 장소 정해야 할 것 같아…] 

노적봉의 솟대 바위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한예진. 뒤쪽으로 돌을 던져 올리면 행운이 온다는 행운 바위가 있다.

노적봉의 솟대 바위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한예진. 뒤쪽으로 돌을 던져 올리면 행운이 온다는 행운 바위가 있다.

혼자라면 ‘표가 있는 곳 중에 아무데나 가면 되지’라는 생각이지만, 그들은 다르다. 일단 목적지를 정하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교통편을 예약하고, 공동 장비를 분배하고 짐을 싸놓는다. 메뉴를 정하고, 상하지 않는 음식부터 차근차근 준비하고, 출발 전날 밤 빠진 게 없는지 다시 점검한다. 당일 아침 멤버가 무사히 모이면 일단 안심한다. 이 복잡한 일들이 빠짐없이 단톡방에서 서로에게 보고된다. 회사 업무보다 더 조직적이고 계획적이고 철저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홍성 용봉산에 다녀온 이야기를 해보자. 1년 동안 산에 가지 못했던 한예진은 이제 여유가 생겨 1월에 백패킹 한 번 가자고 작년 말부터 졸라댔다. “그래!”라고 해놓고는 깜빡 하고 다른 약속을 잡아버렸다. 미안한 마음에 2월 첫째 주말에 가자고 냉큼 달력에 메모해 놓았다. 그때부터 한예진의 공격이 시작됐다. 

“까톡”

[언니 어디로 갈까요?] 

라고 보내놓고, 쉴새 없이 장소 링크가 올라온다. “까똑” “까똑” “까똑” “까똑” “까똑”(ⅹ 1,000개쯤 알림이 쏟아졌던 것 같다)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마치 내일 떠날 사람 같았다. 

[워~워~ 한예진 진정해. 아직 한 달이나 남았다고! ㅎㅎ] 

[언니! MBTI가 뭐에요?]

[나는 ENFP지. 너는?]

[저는 ISFP인데 E들이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이래요. 언니랑 딱 맞는 것 같아요. ‘I’들은 좀 성격도 급하고 미리 해두지 않으면 불안해 한대요.]

평소 MBTI에 관심이 없었는데, 듣고 보니 잘 맞고, 흥미로웠다. 호기심에 주위 지인들에게 물어보았다. 나 빼고 모두가 I였다. 나는 ‘아이’들과 궁합이 잘 맞나보다.  

노적봉의 솟대 바위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한예진. 뒤쪽으로 돌을 던져 올리면 행운이 온다는 행운 바위가 있다.

노적봉의 솟대 바위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한예진. 뒤쪽으로 돌을 던져 올리면 행운이 온다는 행운 바위가 있다.

1년 만에 떠나는 그녀의 기분이 어떨지 충분히 이해했다. 보내준 링크를 하나하나 클릭했다. 전에 함께 가려다 포기했던 홍성 용봉산이 눈에 들어왔다. 설악산 못지 않은 풍광이 매력적인 곳이었다. 한예진과는 설악산에서 처음 만났다. 성격은 정반대였지만, 둘 다 설악산(암릉)과 운동, 회를 좋아하기 때문에 산 아래도 급속도로 친해졌다. 


용봉산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녀가 출발 일주일을 남겨놓고 다시 용봉산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교통편과 준비물과 메뉴까지 정해서 나열해 놓았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해야 하나?  일주일 내내 준비물, 코스와 관련된 대화를 하며 각자 랜선으로 준비했다. 나는 전날 밤 새벽배송으로 연어를 주문했다. 당일 새벽에 일어나 막 도착한 연어와 함께 짐을 꾸렸다. 겨울의 끝자락, 마지막 눈雪을 눈目에 담으려는 백패커들이 모두 강원도로 향한 듯 도로는 한산했다. 용봉산 들머리에는 등산객 서너 명이 있을 뿐이었다. 다쳤던 무릎이 온전히 나은 게 아니라서 걸음이 더뎠다. 예진이는 나의 느린 걸음이 신경 쓰인 듯했다. 

노적봉에서 바라 본 악귀봉. 노적봉의 기암들 사이로 계단이 나 있다. 안전하게 풍광을 즐기며 산행할 수 있다

노적봉에서 바라 본 악귀봉. 노적봉의 기암들 사이로 계단이 나 있다. 안전하게 풍광을 즐기며 산행할 수 있다.

“언니 짐 좀 저한테 주세요!” 

“괜츈괜츈!! 나는 조심을 하는 거지 체력이 떨어진 건 아니야. 천천히 걸으면 돼” 

“언니, 이제 언니를 업고 산에 다녀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한예진과 나는 9살 차이가 난다. 예진이는 젊꼰(젊은 꼰대)이고, 나는 아직 철부지라서 모든 주제를 가지고 스스럼 없이 대화한다. 내가 다리를 다쳤을 때, “내가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되면 내가 좋아하는 산에 고려장해줘. 그럼 나의 주식 계좌는 너에게 넘겨주마!”라고 농담한 적이 있다. 이후 그녀는 업어준다며 호시탐탐 고려장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아직 어림없어!!!” 단호하게 말했다.


거대한 바위산은 쉴 틈을 주지 않고 가파르게 이어졌다. 절벽 위로 뛰어내릴 듯 까치발을 한 채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흔들바위가 나타났다.

드론으로 촬영한 악귀봉. 장군이 갑옷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선 모습이다. 웅장했다.

드론으로 촬영한 악귀봉. 장군이 갑옷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선 모습이다. 웅장했다.

“밥풀로 발라놓았나? 이름은 흔들바위인데 전혀 미동도 없어!”

“아니, 언니 밥풀이라뇨! 그걸로 붙겠어요?” 


그녀는 밥풀로 뭘 붙인다는 게 있을 수 없다는 듯 내가 지어낸 얘기인 줄 안다. 엄밀히 말하자면 6남매 중 막내인 나는 종종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들의 이야기를 내 경험처럼 얘기한다. 


“무슨 소리야! 나 때는 말이야~! 풀이 없어서 밥풀로 붙였어!” 

과장된 손짓으로 훈계하듯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했다. 

“네~네~ 홍대 꼰대님!!” 

흔들바위를 밀어보자! 이 포즈는 이 포인트의 시그니처다.

흔들바위를 밀어보자! 이 포즈는 이 포인트의 시그니처다.

용봉산 오름길에서 바라 본 노적봉과 사자바위. 한낮의 밝은 햇살을 머금어 은벽처럼 빛나고 있다

용봉산 오름길에서 바라 본 노적봉과 사자바위. 한낮의 밝은 햇살을 머금어 은벽처럼 빛나고 있다.

굳이 변명하자면 나는 꼰대는 아니다. 주위에 동생들이 많아서 상담해 줄 때 스스로 “이 꼰대 생각으로는 말이지~” 라며 조언해 주곤 한다. 그래서 동생들은 나를 홍대 근처에 사는 자발적 꼰대라며 별명처럼 부르곤 하는 것이다. 강력한 밥풀로 고정된 흔들바위를 뒤로하고 능선에 올라섰다. 수많은 암릉과 아파트가 한눈에 들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사자바위와 장군바위가 아파트와 싸우기 위해 선 군사들처럼 장엄했다.


노적봉은 용봉산의 하이라이트 코스였다. 산에 놓인 구조물을 좋아하지 않지만, 첨예한 바위 사이로 이어진 빨간 계단이 멋스러움을 더했다. 케첩 뿌린 프렌치프라이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 감동을 반감시키는 멋대가리 없는 표현이지만, 나는 그 장면이 찰떡 같이 떠올랐다.


숙영지인 악귀봉은 금방이었다. 용봉산은 말 그대로 가성비가 좋은 산이다. 짧고 굵게. 가파르지만 위험하지 않게. 산행시간은 짧지만 경치는 설악산에 버금가는, 말 그대로 ‘개꿀’ 코스다. 등산객은 우리뿐이었다. 용봉산 전세캠이었다. 붉게 물든 저녁 노을이 펼쳐졌다. 기세등등했던 거대한 바위공룡도 발그레한 얼굴로 수줍게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우리도 공룡의 등에서 멋들어진 석양을 감상했다.


다음날 아침 햇살에 텐트를 덮은 성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용봉산을 오르는 부지런한 등산객과 마주치지 않도록 아침식사는 하산 후 하기로 했다. 하산 시작이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봉산 매표소에 도착했다. 어라? 근데 차를 대놓은 주차장이 없다. 지도를 보니 들머리와 날머리가 전혀 다른 곳이었다. 


“언니! 왜 차가 없죠??”

“허당 한예진 슨생님! 코스 다 확인하고 오신 거 아니셨어요?” 

악귀봉 한켠에 마련된 전망대. 등산객이 모두 떠나고 나면 멋진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펜트하우스가 된다.

악귀봉 한켠에 마련된 전망대. 등산객이 모두 떠나고 나면 멋진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펜트하우스가 된다.

평소 허당끼가 있는 예진이를 놀렸다. 늘상 있는 일이라 놀랄 것도 없었다. 지도를 보니, 언덕 하나를 가로질러 가면 될 듯했다. 알바 전문이라 길이 아닌 길을 가는 것도 익숙했다. 운 좋게 지도에도 없는 길을 찾아냈다. 언덕을 넘어 도로가 나왔다. 아스팔트 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걸어 올라가야 했다. 


“한예진! 가위바위보!!”

그녀가 상황을 인지할 새도 없이 외쳤다. 그녀는 보자기를 냈고, 나는 가위를 냈다.

“네가 졌으니, 차 가져와! 크크”

“아~ 나는 왜 가위바위보를 이렇게 못하지!? 맨날 져~”


앓는 소리를 하며 배낭을 내려놓고는 아스팔트길을 걸어 올라갔다. 갑자기 그러는 게 어딨냐며 우길 만도 한데, 그녀는 좌석까지 데워놓고 차를 내 앞에 세웠다. 1년 만의 산행이 너무 즐거웠다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쉴 새 없이 재잘댔다. 다음은 봄맞이 백패킹이다. 

산행 코스

용봉산자연휴양림-최영장군 활터-최고봉-노적봉-악귀봉(1박)-용봉사-일주문-구룡대 매표소-용봉산자연휴양림

*용봉산자연휴양림에 주차했을 경우, 구룡대 매표소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숲속의 집 산림휴양관으로 이어진 길이 있다. 휴양관 앞을 지나 나무계단을 오르면 다시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무덤을 지나 희미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도로가 나온다. 도로로 조금만 올라가면 용봉산자연휴양림에 도착한다.

민미정(A형이지만 O형이라 불림)

ENFP

삘feel에 살고 삘에 죽는 사람들. 동심 충만. 사람을 좋아함. 감수성이 풍부하므로 지나친 비난은 삼가할 것. 텐션이 낮아질 경우 먹이(관심)를 줄 것.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은 시키지 말 것. 일을 몰아서 하므로 미리 재촉하지 말 것. 눈치 빠름. 고집 셈. 첫인상과 실제 성격이 비슷함.


한예진(O형이지만 B형이라 불림)

ISFP

시체형, 집에 누워서 음식 시켜주고 영화 틀어주기. 아무 생각이 없어 보임. 왜냐면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기 때문. 공감능력 탁월. 겸손함. 속마음 얘기 안 함. 결정장애. 불만 표출 못 함. 눈치 많이 봄. 개인주의. 감정기복 심함. 자존심 엄청 셈.

월간산 3월호 기사입니다.

2023.03.2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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