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도 섬에도 지름길은 없다···돌아갈수록 다가오는 秘境
'섬 부자 마을' 고흥
물길 건너면 비경이···지죽도
높이 100m 주상절리 '금강죽봉' 장관
지붕 없는 미술관···연홍도
둘레길 따라 벽화·조형물 호젓하게 감상
손때 타지 않은 원시림···쑥섬
600종 나무·150종 야생화 가득한 별천지
여행자적 관점에서 섬이 많다는 건 커다란 행운이다. 숨은 보물을 발견하듯 비밀의 공간처럼 하나씩 찾아가는 섬 여행을 통해 코로나19 기간 국내 여행이 숨통을 틔우고 있다. 신안·여수 등에 가려 덜 알려져 있지만 전남 고흥 역시 국내에서 손꼽히는 섬 부자 마을이다. 소록도·나로도 같은 유명한 섬부터 이름을 알 수 없는 무인도까지 크고 작은 섬 200여 개가 남해에 별처럼 흩뿌려져 있다. 하늘을 지붕 삼아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곳, ‘지붕 없는 미술관’ 고흥을 다녀왔다.
수만 년 고흥이 꼭꼭 숨겨둔 비경 '금강죽봉'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해 고흥이 겹경사를 맞았다. 하나는 능가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16나한상’이 보물로 지정된 일이고 또 하나는 주상절리 ‘금강죽봉’이 명승으로 지정된 것이다. 고흥에 보물급 문화재는 여러 건 있지만 명승 지정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한복판인 고흥에서도 명승 1호로 지정될 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금강죽봉을 만나기 위해 맨 먼저 향한 곳, 지죽도다.
지죽도는 고흥반도 끝에 딸린 작은 섬이다. 대염도와 목도·죽도·대도 등 주변의 여러 섬들을 육지와 연결하기에 일대 섬 사이에서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지난 2003년 지죽대교가 놓이면서 이제는 배를 타지 않아도 갈 수 있게 된 섬이지만 지죽도라는 이름은 여전히 여행자들에게 생소한 편이다.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작은 섬의 유일한 자랑거리는 금강죽봉. 지죽도(支竹島)란 지명도 섬을 떠받치고 있는 주상절리 금강죽봉(金剛竹峯)에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로 여겨진다.
해발 203m 낭금산 남쪽에 자리한 금강죽봉은 높이만 100m에 달한다. 다른 곳의 주상절리와 달리 흰색의 응회암으로 이뤄졌고 바다 위에 대나무 수천 개를 수직으로 박아 놓은 것 같은 기이한 형상이다. 탐방로를 따라 산길을 1시간 30분가량 올라가면 너른 공터가 나오는데 그 바로 아래가 금강죽봉이다. 돌병풍처럼 동서로 길게 펼쳐진 금강죽봉 가운데서도 오른쪽 맨 끝부분에 홀로 떨어진 돌기둥은 ‘송곳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바위 위로 건너갈 수도 있지만 발아래는 천길 낭떠러지.
금강죽봉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려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뻬어난 경관임에도 금강죽봉이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게 이 때문이다. 대신 정상에서 바라보는 다도해 조망이 일품이다. 날이 맑을 때는 시산도·무학도부터 멀리 여수 손죽도와 소거문도까지 내다볼 수 있다. 금강죽봉 아래는 썰물 때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해식동굴이 있다. 동굴 안쪽에서는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 약수가 샘솟는다고 한다. 물 사정이 좋지 않던 시절에는 주민들의 식수원이기도 했다. 임도 제일 끝에서 해안 바위를 타고 금강죽봉 아래로 가면 만나 볼 수 있다. 해 질 녘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장관이다.
바다 위 미술관과 원시림을 간직한 두 섬
거금도 신양선착장에서 바라본 연홍도는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놓여 있다.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는 섬이지만 정작 배를 타는 시간은 2분 남짓. 고흥의 200여 개 섬 가운데 연홍도가 특별한 건 미술관이 있는 유일한 섬이라는 점이다. 연홍미술관이 처음 문을 연 건 2006년, 고흥 출신 선호남 화백과 그의 아내가 섬으로 들어오면서부터다. 선 관장은 1998년 폐교한 금산초등학교 연홍분교를 중심으로 섬 곳곳에 작품을 내걸었고 지방자치단체의 지원까지 더해지면서 섬 전 전체가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미술관을 가는 기분으로 연홍도를 찾는 발길이 하나둘 늘고 있다. 탐방은 ‘ㄱ’자 모양의 섬을 3등분한 둘레길을 따라간다. 섬 한가운데 자리한 연홍미술관을 지나 북쪽으로 난 길이 ‘좀바끝(940m)’, 섬 중앙인 마을 골목을 따라 걷는 길이 ‘담장바닥길(1.16㎞)’, 섬의 남쪽 구릉지대를 지나는 구간이 ‘아르끝숲길(1.7㎞)’이다.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와 아기자기한 조형물을 보고 싶다면 담장바닥길이, 섬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호젓함을 즐기려면 인적이 드문 나머지 두 길이 좋다. 육지와 달리 천천히, 그리고 되도록 멀리 돌아가는 게 이 길을 걷는 방법이다.
연홍도가 미술관이 있는 섬이라면 쑥섬은 난대 원시림을 간직한 섬이다. 삼치 파시가 들어서며 한때 수백 명이 모여 살던 작은 섬 안에서 어떻게 원시림이 유지될 수 있었을까. 숲이 외부에 정식으로 개방되기 시작한 건 불과 10여 년. 주민들은 죽은 나무도 땔감으로 가져다 쓰지 않을 정도로 숲을 신성시해 오며 자연 그대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숲이 통째로 지켜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주민들이 마을에 무덤을 쓰지 않기로 한 약속을 무려 400년이나 지켜 왔기 때문이다.
쑥섬은 그 크기나 위치·생김새까지도 연홍도와 많이 닮았다. 연홍도가 거금도에 딸린 섬이라면 쑥섬은 나로도에 붙어 있는 작은 섬이다. 쑥섬 역시 육지와 연결된 나로도를 거쳐 배를 타고 들어간다. 나로도항에서 섬까지 배를 타는 시간은 불과 1분. 도토리 키 재기지만 섬에서의 거리는 연홍도보다 오히려 더 가깝다.
배에서 내려 오리 모양으로 지어진 카페 옆으로 향하면 원시림 탐방로가 시작된다. 바다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녹음이 우거진 숲길을 따라 다양한 수종을 만나볼 수 있다. 육박나무·후박나무·꾸지나무·소사나무·자귀나무 등 섬에서 자라는 나무만 해도 600여 종, 그 주변으로 사시사철 150종의 야생화가 번갈아 가며 꽃을 피운다.
원시림을 통과하면 화려한 꽃밭이 펼쳐진다. ‘별정원’이라 이름 붙은 이곳은 2000년부터 김상현·고채훈 부부가 주민들과 힘을 합쳐 일구기 시작했다. 섬을 뒤덮은 칡넝쿨을 거둬 내는 데만 무려 7년이 걸렸다고 한다. 쑥섬 정상에 자리한 별정원에서 키우는 꽃의 종류만 400여 종으로 봄이면 섬 전체가 알록달록 꽃천지로 변신한다. 전라남도는 별정원을 제1호 민간 정원으로 지정했다. 올봄에는 노란나팔수선화가 제일 먼저 꽃을 피웠다. 육지에서도 봄꽃 구경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해상꽃정원은 쑥섬만이 간직한 진귀한 풍경이다.
이맘때 육지에서 볼 만한 것들···매화바다와 동백터널
먼저 꽃을 피운 나무는 토종 매화나무. 근처만 가도 코끝을 자극할 정도로 향이 짙고 꽃이 작은 게 특징이다. 이 나무를 기준으로 정확히 보름 뒤에 다른 나무들도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린다. 이곳은 원래 매실청을 담가 판매하는 매실 농장이지만 꽃이 피는 시기에 한해 상춘객들에게 농장을 개방한다. 산 정상까지 임도가 나 있지만 매화가 만개하는 철에는 여행객들이 몰리는 만큼 농장 입구에 차를 대놓고 걸어 올라오는 게 좋다.
고흥에서 유명한 절을 꼽으라면 단연 천년고찰 능가사다.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곳은 아니지만 포두면 천등산 기슭에 자리한 금탑사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나무숲이 있다. 이맘때 금탑사를 소개하는 건 비자나무보다 그 앞에서 자라는 동백나무 때문이다. 절을 찾는 사람 대부분은 이 동백나무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내 가장 위쪽에 자리한 선방으로 올라가면 비자나무숲 입구에 적어도 수령 100년이 넘은 아름드리 동백나무 수십여 그루가 꽃터널을 이룬다. 이곳 동백나무는 키 큰 비자나무에 가려 고흥에서도 가장 늦게 꽃을 피운다. 3월 중순이면 양탄자를 깐 듯 동백꽃잎으로 뒤덮인 숲길을 걸어 볼 수 있다.
글·사진(고흥)=최성욱 기자 secre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