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고지 통제된 겨울 제주서 설문대할망을 만나다

[여행]by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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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제주에 다녀왔다. 평일인데도 공항은 여행객으로 가득했다. “제주가 ‘2022년에 가장 가고 싶은 여행지’로 뽑혔다”는 며칠 전 제주항공의 보도자료가 떠올랐다. 괌, 하와이, 사이판을 제친 것은 코로나19 시국인 탓이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날씨가 심상치 않다. 겨울의 호젓한 바닷가를 기대한 일정이었다. 1100로(路)가 폭설에 얼어붙어 통제되면서 눈꽃 트래킹이 강제됐다. 바다라고는 카페 아라파파 북촌에서 다려도 풍광을 배경으로 본 게 전부다.


이튿날 잠시 날이 개며 한라산 풍경이 눈에 들었다. 겨울 제주 여행에서 흰눈이 쌓인 설문대할망의 얼굴을 마주할 줄 몰랐다. 예측불허 제주의 겨울 날씨나 과음으로 쓰린 속은 빌레왓의 보말파스타로 해장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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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로 통제된 날… 습지 대신 눈밭

1100로는 한라산 정상을 동쪽에 끼고 제주와 서귀포시를 잇는 산간도로다. 도로 꼭대기인 1100고지에는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개척한 산악인 고상돈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원과 휴게소가 있다. 한라산을 가장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뷰 포인트라 사계절 내내 북적인다. 휴게소 건너편은 2009년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1100고지 습지다. 습지 16곳이 군데군데 퍼져있다. 노랑턱멧새, 흰눈썹황금새, 큰부리까마귀, 곤줄박이, 노루, 오소리 등이 살고 있다고 한다.


제주 도착 첫날 1100로의 서귀포 방향이 폭설로 통제됐다. 스노체인이 없는 차량들이 1100고지를 메웠다. 요즘 눈이 잦고 기온이 낮아 상고대가 지천이다. 휴게소 오른쪽에 있는 사슴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는 이들이 넘쳐난다. 길 건너 나무 데크가 놓인 675m의 탐방로를 따라 20분가량 눈꽃 트래킹에 나섰다. 하얀 눈이 온세상을 덮어 습지는 온데간데없다. 가는 곳마다 눈 터널이다. ‘제주 최고의 눈꽃 명소’라거나 ‘여름보다 겨울 여행객이 많다’는 설명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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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길을 나선 제주 토박이 배유정 하쿠다(Hakuda) 대표는 “평소 1100고지 가는 길은 정체가 심한데 폭설로 통제됐다는 게 알려져서인지 차가 없는 편”이라고 했지만, 내려가는 길에 차량이 몰려드는 것을 목격했다. 제주 방언으로 ‘하겠다’는 의미인 하쿠다는 통합마케팅커뮤니케이션 기업으로, 지난 2018년 제주에 본사, 서울에 지사를 두고 일을 시작했다.


1100고지에서 조금 내려오니 눈밭이 조금씩 희미해지더니 멀리 바다가 보일 때쯤엔 주변에 눈이 없다. 배 대표는 “제주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며 “겨울에 해를 볼 날이 적어 섬을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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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최장기 프로젝트 돌문화공원

돌문화공원은 제주 탄생 신화인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을 주 테마로 제주 혼을 담은 100만평의 대자연 속 박물관이자 생태공원이다. 공원 한쪽 설문대할망 제단에는 “설문대할망이 치마폭으로 돌과 흙을 날라 제주 섬을 만들었다”며 “이때 치마의 헤진 틈으로 흘러내린 돌과 흙이 여기저기 쌓여 360여개의 오름들이 생겨났다”는 설명이 붙었다. 또 다른 제주 토박이조차 오름이 300개가 넘는다는 설명에 감탄하고 만다.


설문대할망에 얽힌 이야기는 더 있다. 설문대할망이 오백 아들을 먹이려 솥에 몸을 던졌고, 뒤늦게 이를 알게된 오백장군이 원통해하며 한라산 영실과 차귀도의 기암괴석이 됐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매년 5월 한라산 정상을 붉게 물들이는 철쭉은 그때 오백 아들이 흘린 피눈물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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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탄생 신화는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돌문화공원은 2004년부터 매년 5월15일 설문대할망제를 지내고 있고, 2011년 이후 5월을 ‘설문대할망의 달’로 정해 여러 행사를 연다. 2015년부터 ‘사랑의 죽 한 그릇’을 재물로 바치는 제례와 9인 여성 제관들이 철쭉꽃나무를 심는 행사가 추가됐다.


돌문화공원의 탄생 배경은 유명하다. 1971년 여름 탐라목물원으로 문을 연 탐라목석원은 2009년 여름 폐원했다. 백운철 전 목석원장은 평생 모은 돌 2만점을 기증하고 돌문화공원 조성을 도맡기로 했고, 20년 협약 기간이 지난 2020년 12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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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돌박물관, 돌문화전시관, 야외전시장, 오백장군갤러리, 용암석 전시관 등이 문을 열었다. 지난해 하늘연못 한가운데에 맨발로 닿을 수 있는 포토존을 만들고, 공원 곳곳을 다니는 전기 셔틀버스가 생기면서 관람객이 늘었다. 한라산 백록담과 영실의 죽솥 등을 상징하는 하늘연못은 지름이 40m나 된다. SNS에 떠돌고 있는, 돌박물관 인근 바농오름을 뒤로한 호수 사진은 모두 하늘연못 포토존에서 찍은 것이다. 하늘연못 포토존은 화∼일요일 개방한다. 바농은 제주도 말로 ‘바늘’을 뜻하는데, 오래전 오름 주위에 가시덤불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오백장군갤러리로 향하는 길에 한라산 영실의 기암절벽에 내려오는 전설 속 오백장군을 형상화한 석상과 상징탑이 즐비하다. 공원 동북쪽에 건설 중인 설문대할망 전시관까지 완성되면 공원 조성이 마무리된다. 언제쯤 완전한 돌문화공원을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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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에서 노는 스누피, 한라산 배경으로 타는 카트

스누피가든을 여정에 넣을까 고민했다. 어릴적 스누피나 찰리 브라운보다 담요를 끼고 사는 라이너스를 더 좋아했지만, 이 역시 수십년 전 얘기이다. 찰스 슐츠가 1950년부터 50여년간 신문에 연재한 토막 만화 피너츠는 비글인 스누피와 찰리 브라운, 루시, 라이너스 등의 일상을 소재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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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스누피가든은 계절과 무관하게 ‘실패가 없는’ 제주의 실내외 여행지이다. 아이를 데려온 가족이 많긴 하지만 찰리 브라운과 스누피, 루시, 라이너스 등에 친숙한 젊은 여성이 더 많은 것 같다. 실내 테마홀, 너무 많아 이름도 헷갈리는 오름들을 바라볼 수 있는 루프톱, 미니가든, 기념품점과 카페를 돌고 나왔다. 스누피가 나오는 영상의 배경에 오름 등 제주의 자연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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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존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 없다. “여기 볼 게 너무 많다”거나 “저쪽에서도 찍자”, “이쪽 봐봐”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야외에도 11개의 테마정원을 갖췄는데, 셔틀버스를 타고 정원을 한바퀴 돌 수 있지만 선착순이라서 대기 시간을 고려해야 한다.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방탄소년단 지민이 방문해 더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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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토평 중산간지대 3만평 규모의 윈드1947는 카트 테마파크다. 카트체험, 서바이벌, 다락정원 등으로 구성됐다. 2019년 2월 문을 열었다. 그해 여름, 방탄소년단 뷔, 최우식, 박서준이 함께 이곳에서 레이싱을 즐긴 일로 화제가 됐다. 다락정원에서는 감귤따기 체험을 할 수 있고, 시기별로 수국·유채·동백꽃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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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우 총괄이사는 “아시아 최장인 1947m의 서킷을 최대 시속 60㎞, 체감속도 시속 120㎞로 달려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며 “날씨 좋은 날 한라산을 바라보면 설문대할망의 누워있는 옆모습을 볼 수 있다”고 소개했다. 윈드1947은 코로나19 사태에도 호황이었다. 양 이사는 “코로나 초기 움츠러들었지만 지난해 30만명이 다녀갔다”며 “카트를 안 타더라도 수국(6월), 동백(11월 말∼12월 말)만 구경 온 분들도 많은데, 앞으로 감귤 체험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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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드러낸 설문대할망… 추사관·공공수장고·야시장

정오쯤 되자 한라산에 설문대할망의 얼굴이 드러났다. 전날 내린 눈으로 하얗게 분칠한 할망 얼굴 위로 구름이 지나가자 SNS에 “설문대할망이 담배를 피운다”는 글이 떠돌았다. 배 대표는 “설문대할망 얼굴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날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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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현대미술관의 공공수장고로 향했다. 미술품 소장 공간을 몰입형 영상공간으로 꾸몄다. 미술관 소장품 120여점을 활용해 미디어아트 ‘제주의 자연 현대미술을 품다’도 보여준다. ‘바람이 만든 제주’ 영상이 오르자 한 아이가 내달린다. 눈꽃이 아이의 움직임에 맞춰 흩날린다. 움직이며 즐기는 미디어아트다. 이미경 학예연구사는 “원래 커다란 조각 작품을 전시하는 등 다목적실로 이용하려고 2019년 지어졌다”며 “영상을 단순히 수장고 벽면에 표현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관람객의 손짓과 몸짓에 영상이 반응한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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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추사관은 조선 후기 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의 삶과 학문, 예술세계를 기리기 위한 공간이다. 지난해 12월 말 재개관했다. 1전시실에는 추사의 일생을 담았고, 2전시실은 추사의 제주 행적을 보여준다. 추사관 인근에 수선화가 지천이다. 건축가 승효상이 세한도 속 건물 모양과 동일한 형태로 지었다고 한다. 추사관 옆에 추사가 유배 시절 거주한 곳이 복원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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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밤에 할 일이 없다는 평가가 많다. 2018년 6월 제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소나무군락지에 수목원길 야시장이 생긴 이유다. 경찰청과 도가 다문화가정의 일자리 창출, 청년 창업, 지역 소상공인을 위해 서울의 밤도깨비 야시장을 본떠 수목원길 야시장을 만들었다. 인근 식당가에 피해를 줄이려 낮 장사를 배제했다. 수목원에 임차료를 내고 공간을 빌린 18개 푸드트럭이 여러 야식을 판다. 트럭 옆에서 소상공인들로 구성된 판매팀 30여곳이 플리마켓 형태를 이룬다. 야시장이 열린 지 4년이 다 돼가지만 푸드트럭 중에 망한 이는 없다. 야시장 상인회 회장을 2년째 맡고 있는 와이키키 제주의 사장 이승훈(33)씨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해 가장 힘들었다”면서도 “건강 탓에 트럭 운영권을 넘긴 한 곳을 빼곤 다들 원년 멤버들”이라고 소개했다.


제주=글·사진 정재영 기자 sisley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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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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