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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경계 희미한 색채의 바다…
알 수 없는 먹먹함에 사로잡히다

by세계일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들


색면화의 대표 화가 마크 로스코 작품

커다란 화폭에 두 세 개 정도 색 사용

어둡고 숨 막히는 공간으로 끌어 당겨


밀레의 ‘만종’ 앞서도 같은 경우 많아

어둡고 희미한 색면속으로 빠져들어

슬픈 장면 없는 데도 감정들 폭발해


5년 전 일이다. 나는 아는 사람에게서 당시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던 마크 로스코(Mark Rothko) 전시회 표 몇 장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로스코는 1930, 40년대 미국 미술의 힘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던 추상표현주의의 일부였던 ‘색면화(color field painting)’의 대표적인 화가로, 대개 커다란 화폭에 두 개, 혹은 세 개 정도의 색을 사용해 경계가 희미한 사각형을 그려넣은 작품들로 잘 알려져 있다. 평소 로스코의 작품을 좋아했던 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함께 일을 일찍 마치고 전시회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미술관에 가면 남들보다 두 배 가까이 오래 머무르는 나는 함께 가는 사람들에게 다 보면 나를 기다리지 말라고 말해둔다. 다행히 주중이었고 아직 직장인들이 퇴근하기 전이라 전시장에는 관객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에서 쫓기지 않고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편안하게 작품을 감상하던 나는 어두운 실내 한구석에 따로 코너를 마련해서 전시 중인 거대한 작품 앞에 서게 되었다. 검은색과 짙은 회색만으로 이루어진, 로스코의 그림 중에서도 어두운 그림이었다. 처음에는 떨어져서 보다가 그림 앞으로 한 걸음 발을 옮겨 가까이 다가섰다. 내가 작품 앞에서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세계일보

무제(1955). 마크 로스코(1903∼1970)는 대개 두세 개의 색채를 대형 캔버스에 넓게 칠하는 색면화가로, 미국 미술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추상표현주의의 일원이지만, 유독 정적인 화면과 종교적인 느낌을 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목이 메어오고,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누가 볼까 싶어 급하게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지만 그치질 않았다. 살면서 셀 수 없이 미술관을 다녔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림 앞에서 울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놀란 것은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대책없이 분출된 내 감정이었다. 중년 남자가 그림 앞에서 펑펑 우는 모습을 본다고 생각해보라. 엄청난 실의에 빠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거다. 물론 당시 나는 오랫동안 살던 미국을 떠나 사업을 위해 장기간 한국에 체류 중이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일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그리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비극적인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마크 로스코의 추상화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눈물이 터졌을까?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미국 내셔널갤러리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관람객의 60%가 예술작품 앞에서 울어본 적이 있다고 답했는데, 그렇게 울어본 적이 있다고 답한 사람의 70%가 자신이 앞에서 울었던 작품이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었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나는 그때의 일이 나만의 개인적인 경험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로스코의 작품 앞에서 울었다면 그의 작품에는 어떤 비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알아보니 짐작했던 대로 이 주제를 깊이 탐구한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제임스 엘킨스. 그의 책 ‘그림과 눈물: 그림 앞에서 울어본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의 첫 장은 ‘단지 색깔 때문에 울다’로, 오로지 마크 로스코만을 다루는데, 여기에서 마크 로스코의 전기를 쓴 제임스 브레슬린의 말을 인용한다. “로스코의 어떤 작품들은 어둡고 숨이 막히는 무덤 같은 공간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엘킨스는 로스코의 작품들이 멀리서 보면 아름답고 예쁘기까지 하지만, 사실은 덫과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관객은 방향감각을 잃고 당황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한가람미술관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을 마치 속에 들어와서 목격한 듯 정확한 설명들이었다.

세계일보

만종(1859). ‘이삭 줍는 여인들’과 함께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대표작이다. 그림 자체는 슬픈 장면을 묘사하고 있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이 작품 앞에서 슬픔을 느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나만의 경험이 아니라면 로스코의 색면화 외에 또 어떤 작품들이 관객을 울게 만드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과학적인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실험을 할 수는 없고, 단지 경험담을 들어보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엘킨스를 비롯해 이 현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사례를 많이 수집해서 기록으로 남겼다. 기록들을 보면 로스코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앞에서 우는 작품이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이다. 이 작품에 관해서는 밀레의 작품전이 파리에서 열렸던 1887년 당시 밀레와 경쟁관계에 있던 인상파 화가 카미유 피사로가 남긴 기록이 있다. 피사로는 그 전시장에서 지인을 우연히 만났는데 “방금 큰 충격을 받았다”며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고 한다. 피사로는 그 사람의 가족이 세상을 떠났나 했는데, 알고 보니 밀레의 만종을 보고 충격을 받고 울고 있었다는 것.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작품이 “슬픈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술작품 중에는 피에타와 같이 누구나 알고 있는 슬픈 이야기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정작 사람들이 많이 운다고 하는 이 두 작품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 그렇다면 이 작품들의 어떤 부분이 사람들을 울게 만들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영화 배우들의 말을 들어보면 가장 쉬운 감정표현은 폭발하는 분노다. 분노는 거칠고 단순하다. 반대로 슬픔은, 특히 그것이 오열이 아닌 경우, 아주 복잡한 감정들의 혼합인 경우가 많다. 후회, 상실감, 외로움, 그리움, 절망 등은 모두 슬픔을 느끼게 하는 요소들이지만 각 감정의 경계선은 아주 모호하고, 대개의 경우 몇 가지 감정이 슬픔 속에 혼재 되어 나타난다. 연기의 천재라고 하는 메릴 스트리프의 표정연기, 특히 슬픔의 표현이 압권인 이유는 그의 얼굴에 등장하는 슬픔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스트리프는 실제 인물에 빙의해서 똑같이 복잡한 감정을 겪고, 그래서 그의 감정 연기는 사실적이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서 밀레의 만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로스코의 작품과의 유사성이 발견된다. 어둡고, 무겁고, 정적인 화폭에 희미하게 등장한 형체들은 지나치게 어두워서 디테일이 쉽게 구분되지 않고, 경계선은 모호하다. 우리는 그렇게 경계가 희미한 색채의 전이를 보면서 알 수 없는 ‘먹먹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먹먹함은 대개 이유를 하나만 집어낼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다. 우리는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서 “왜 힘들어하는지 말해달라”고 말하는 순간 눈물이 쏟아진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쏟아지는 눈물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감정을 모두 담고 있다. 로스코와 밀레의 작품에 등장하는 어둡고 희미한 색면은 그렇게 복잡한 감정을 머금은, 언제라도 눈물이 되어 쏟아질 수 있는 먹구름이다.


로스코는 말년에 건강이 크게 나빠졌고, 작품활동에도 크게 제약을 받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와 사이가 나빠져 황혼 이혼을 하게 된 로스코는 1년 후인 1970년, 66세의 나이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종교적인 체험을 하기를 원한다던 로스코가 세상을 떠난 후,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모아서 ‘로스코 채플(예배당)’을 만들었고, 이 채플은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성지순례 코스가 되었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 있는 이 채플에는 검은색의 거대한 색면화가 벽을 둘러가며 걸려 있다. 이곳이 마티스 같은 다른 예술가들의 채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곳에 걸린 로스코의 작품들을 보다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우는 관객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진정시켜주는 카운슬러가 상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글 박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