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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코로나블루’ 날리는
파주 핫플레이스

by세계일보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드넓은 언덕에서 여유롭게 ‘거리두기’ 산책

수천여개의 바람개비 군무를 추고

국내 최장 220m 마장호수 흔들다리 통행 재개

벽초지 수목원에 알록달록 튤립

무심교 연못 주변 ‘비밀의 정원’ 온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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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바람의 언덕

바람이 분다. 굴곡진 언덕을 따라. “차르륵 차르르륵”. 바람개비는 드디어 신이 났나 보다. 파랑, 빨강, 노랑, 초록, 알록달록한 옷태를 뽐내며 신나게 돌아간다. 눈을 감으니 오로지 들리는 것은 바람개비 날갯짓 소리. 뺨을 스치는 시원한 봄바람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짓눌린 상처를 씻어준다. 어서 빨리 우리에게 지금 같은 휴식이 찾아왔으면. 코로나19가 물러가면 가장 먼저 달려가 평화를 만끽하고픈 곳,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바람의 언덕에 선다.

코로나19 극복하는 평화의 바람 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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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피스 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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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언덕으로 이어지는 작은 연못의 다리를 지나니 카페 디브런치안녕 앞의 바람개비 틈 사이로 빨간 대형 압정이 시선을 확 사로잡는다. ‘피스 핀(peace pin)’으로 불리는 ‘핀 프로젝트 넘버 원(Pin project_No 1)’이다. 가만 보니 ‘평화의 시작이 이곳에서’라는 부제가 붙었다. 설치미술가와 사진작가로도 활동하는 배우 이광기가 2018년 4월 선보인 작품으로 ‘평화의 핀을 여기에 고정한다’는 작가의 염원이 담겼단다. 작가는 안타까운 사연을 안고 있다. 2009년 11월 신종플루는 당시 6살이던 그의 아들을 무참히 앗아갔다. 실의에 빠져 지내다 이듬해 아이티 대지진 때 현지 자원봉사를 계기로 나보다 더 힘든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봉사로 슬픔을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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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바람의 언덕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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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조형물

피스 핀은 분단에서 통일로 가는 길목이란 의미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이 그리는 평화는 각자가 지닌 사연만큼이나 모두 다를 것이다. 바이러스로 아들을 잃은 작가는 다양한 일로 슬픔과 실의에 빠진 이들에게 다시 평화가 깃들기를 염원했으리라. 코로나19로 사랑하는 가족을 빼앗긴 많은 이들의 가슴에도 슬픔을 극복하는 평화의 바람이 어서 찾아오기를 바라본다.


언덕을 가득 채운 바람개비 3000여개는 김언경 작가 작품 ‘바람의 언덕’이다. 구름 한 점 없이 날이 좋은 날이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로 경쟁하듯 돌아가는 알록달록한 바람개비가 동화의 나라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자주 등장하는 포토명소. 바람개비의 군무 사이로 들어가 눈을 감고 그들의 속삭임을 꼭 들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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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통일부르기 인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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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언덕을 지나니 아이들이 신나게 연을 날리고 아빠는 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돕는다. 바람이 늘 풍부하게 불기에 주말이면 부모를 졸라 연을 날리러 온 아이들의 천국으로 변한다. 옆에는 랜드마크인 거대한 인물상이 땅에서 솟아오른 뒤 언덕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최평곤 작가의 ‘통일 부르기’로 대나무로 엮은 인물상 4개가 3∼11m 높이로 우뚝 서 있다. 마침 노모와 그의 손을 꼭 잡은 중년의 딸이 다정하게 인물상을 따라 걷고 있다. 오랜 ‘집콕’ 생활에 지쳐 기분전환에 나섰나 보다. 그들을 보고 있으니 인물상은 사람의 인생 같다. 뒤로 갈수록 키가 작아지는데 나이가 들면 허리가 굽으면서 점점 왜소해지는 인생의 장면들이 겹치는 듯하다. 평화누리공원은 2005년 세계평화축전 때 조성된 9만9000여㎡ 잔디언덕으로 드넓은 야외공간에 바람도 잘 불어 충분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하늘을 그대로 담는 마장호수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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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마장호수와 출렁다리

파주는 북쪽이라 봄이 늦다. 마장호수 주차장에는 만개한 벚꽃이 꽃잎을 흩뿌리며 슬슬 떠날 채비를 한다. 주차장 한편 벚꽃나무마다 여러 가족이 돗자리를 펴고 늦은 벚꽃 피크닉을 즐기는 중이다. 그들을 부러워하며 제방의 가파른 계단을 헐떡이며 오르자 “여기가 우리나라 맞아?”라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펼쳐진 푸른 호수가 압도한다. 가슴이 탁 트이니 코로나블루(우울증)는 금세 날아간다. 마침 날이 맑아 호수 표면에 산과 하늘과 구름이 그대로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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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파주의 가장 핫한 여행지를 꼽으라면 산책로 중간쯤에 걸쳐 있는 마장호수 흔들다리다. 2018년 3월 설치된 흔들다리는 길이 220m로 우리나라에서 물 위에 설치된 다리 중 가장 길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까지만 해도 다리는 시퍼런 호수의 아찔한 절경을 즐기려는 여행자로 붐볐지만 지난 주말 다리에는 아무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코로나19 감염 우려 때문에 지난달 28일부터 출렁다리 통행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로 지난 21일부터 통행이 재개됐다. 호수를 따라 걷는 산책로 데크는 3.3km 거리로 호수 전체를 둘러보려면 2시간가량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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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마장호수 벚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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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마장호수 분수

오토캠핑장에서는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아름다운 호수를 감상하며 쉴 수 있는 곳이지만 캠핑 사이트가 많지 않아 주말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마장 호수로 가는 길에는 맛난 스페셜티 커피를 내는 카페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그중 한 디저트카페에서는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콩가 G2와 과테말라 안티구아 SHB 원두 500g을 1만1000원의 착한 가격에 판매하길래 얼른 집어들고 나왔다.

‘비밀의 정원’ 벽초지 수목원에서 나를 사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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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벽초지 수목원 튤립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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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벽초지 수목원 튤립축제

마장호수 가는 길에 있는 벽초지 수목원에는 튤립이 탐스럽게 피고 있다. CF나 드라마 등에 가끔 등장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수목원이다. 그만큼 주말에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잘 유지하며 여유로운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입장료가 성인기준 9000원으로 저렴한 편은 아니지만 충분히 보상하고 남는다. 벽초지는 푸른(碧) 풀(草)과 못(池)이 있는 정원이란 뜻인데 아기자기한 정원과 다양한 토종식물이 산책의 즐거움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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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벽초지 수목원 말리성의 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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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벽초지 수목원 채플돔

안으로 들어서니 은은하게 흐르는 재즈선율이 정원을 감싸고 있다. 가장 처음 만나는 여왕의 정원에는 노랑, 빨강, 보라색 튤립이 마치 우아한 여왕처럼 자태를 뽐낸다. 튤립축제는 5월5일까지 이어진다. 여왕의 정원을 중심으로 서쪽은 유럽식 정원인 말리성의 가든, 동쪽은 연못이 있는 한국식 정원이다. ‘신화의 공간’ 말리성의 가든으로 들어서면 다양한 유럽의 조각상들이 도열해 여행자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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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벽초지 수목원 스핀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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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벽초지 수목원 천사상

아폴론가든을 지나 체스가든에서는 한 가족이 대형 체스판 위에서 사람만한 체스말로 놀이를 즐기는 중이다. 스핀스톤은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든다. 무게 7.5t, 지름 1.8m의 화강암볼이 오로지 물의 힘으로 표면 0.5㎝ 위에 떠올라 빠른 속도로 힘차게 자전한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 말리성의 가든 랜드마크 채플돔을 지나면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험의 공간 자작나무 놀이터와 와일드 어드벤처를 만난다. 정원을 돌아 나오는 길에는 다양한 천사의 조각상들이 무리지어 ‘평화’를 합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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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벽초지 수목원 파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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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벽초지 수목원

반대편 연못으로 건너가 무심교에 섰다. 벽초지는 하늘거리는 버드나무 군락이 늦게 핀 벚꽃과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며 한폭의 수채화를 그려낸다. 운치 있는 파련정과 연화원 덕분에 사람의 손길이 잘 닿지 않은 비밀의 정원에 온 듯하다. 벽초지를 끼고 단풍길이 이어진다. 가을이면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든다니 그때쯤 다시 찾아야겠다. 단풍길이 끝나는 곳에서 영화, 드라마, CF 등에 등장한 주목나무정원이 시작된다. 길이는 100m가 안 되지만 주목나무가 양옆에서 중앙을 향해 서로 인사하듯 엇갈리고 있다. 삼각형 모양의 터널을 이뤄 독특한 공간을 연출하니 안에 들어선 이의 뒷모습은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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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벽초지 수목원 단풍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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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벽초지 수목원 주목나무숲

그리고 비움의 길과 느림의 정원 바닥에 놓인 나무판에 적힌 문구 하나. ‘느리게 느리게 조금만 더 느리게’ 가보라 한다. 아주 천천히 걸으며 나를 조금씩 비어본다. 가문비 쉼터를 지나면 드넓은 잔디광장이 나타난다. 마치 모내기를 하듯 끝없이 심어진 튤립을 배경으로 여행자들은 인증샷을 남기기 바쁘다. 코로나19가 어서 물러가고 우리 가슴도 ‘블루’ 대신 알록달록 튤립색으로 물들었으면.


파주=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