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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차 한잔 나누며

“60여년 ‘병영 장도’ 외길… 은장도 정절은 없었어”

by세계일보

울산시 무형문화재 1호 장도장 장추남씨 / 유년기 울산 병영서 공예일 배워 / “軍 다녀온 뒤 얼굴 한쪽 마비 증상 / 사지 멀쩡… 장도는 내 운명 생각 / 아들 전수자지만 맥 끊길까 걱정”


‘탕, 탕, 탕.’


공방에서 망치를 내려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백발의 노인이 돋보기를 쓰고 가로 3㎝, 세로 5㎝ 크기의 은판에 무늬를 새기고 있었다. 기자가 인사를 건넸지만 노인은 묵묵부답이다. 어느새 은판에는 용 한 마리가 꿈틀대고 있었다. 용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때가 돼서야 노인은 힐끗 기자를 보더니 “신문기자요?” 묻곤 다시 용을 새기는 데 몰두했다. “잠시 기다리시오.” 노인은 은판을 응시하다가 5㎝ 정도 크기의 정을 망치로 내리쳐 무늬를 새기는 작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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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추남 장도장이 울산시 중구 교동 자신의 공방에서 장도를 만들고 있다.

무심히 치는 것 같은 망치와 정 끝에 섬세한 용 비늘이 새겨지고, 용의 수염이 굽이치는 것이 신기했다. 한참을 구경했을까. 노인은 눈길도 주지 않고 “구경할라요?” 하더니 일어나 선반에서 주섬주섬 상자 2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상자 속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가 새겨진 10㎝ 크기의 은장도와 용이 새겨진 15㎝ 크기의 은장도, 목장도 등 10여개가 들어 있었다. 노인은 그렇게 망치를 내리치다 멈춰 고심하고, 다시 내리치는 작업을 30분간 이어갔다. 7일 울산시 중구 교동에 있는 공방 ‘고정민예사’에서 60년 넘게 장도를 만들어온 장도장 장추남(90)씨를 만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장추남 장도장은 지난해 1월 울산시 지방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됐다. 1997년 장도장이 시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면서 고 임원중씨가 인정됐으나 2004년 임씨의 별세로 공석이 됐다. 장씨는 유일하게 ‘병영 장도’의 기술을 온전히 재현할 수 있다. 병영 장도는 특히 검정색 구리(오동)를 은장도에 상감해 만든 ‘오동상감장도‘로 유명하다. 다른 장인들이 대개 부분적인 문양을 넣는 데 반해 그는 은장도 전면에 문양을 넣어 완성도 높은 예술성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을자형 장도와 일자형 장도 외에 목장도, 까치장도, 첨자사각일자도 등 전 분야에 걸쳐 장도 제작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그가 처음부터 장도를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1930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1946년 아버지의 고향인 울산 병영에 왔다. 병영은 조선 초기 경상좌병영이 설치된 이래 군사기지였다. 철로 무기를 만드는 야장들이 모여 살았다. 야장들은 평소엔 숟가락, 밥그릇, 담뱃대, 은장도와 같은 금속공예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 병영에 온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학교도 다닐 수 없었던 터라 장씨는 열일곱되던 해부터 담뱃대 공방에서 공예일을 배웠다. 당시 공방에서는 담뱃대와 목장도, 백동장도 등을 만드는 기술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6·25전쟁이 나 군을 다녀온 뒤, 1960년쯤 병영에 다시 자리 잡고 담뱃대와 장도를 같이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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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다녀 온 뒤 오른쪽 얼굴이 마비되는 증상이 나타났어요. 상이군경 5급이지만 팔, 다리는 멀쩡하니 장도를 만들라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구나 이런 일(공예) 하는 노인 중에 지팡이 안 짚고 다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요.” 그때부터 장씨의 일상은 장도로 채워졌다. 오전 8시20분쯤 공방에 도착해 오후 3시쯤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9.9㎡ 남짓한 공방에서 장도를 만든다. 365일, 주말과 휴일 없이 반복된 일이다.


그는 자연스레 장도 만드는 방법을 소개했다. “이래(이렇게) 문양 새기고, 망치로 쳐서 평평하게 해. 판재 양끝을 연결해 원통형으로 만들고, 은땜하고 장식 붙이고…. 그래(그렇게) 만드는 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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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는 ‘은’으로만 만들지 않는다. 나무와 동물의 뼈, 상아, 옥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다.


“은으로 만든 건 보기만 좋지 관리도 힘들어. 사람 손 타면 금세 그 부분만 까맣게 변하거든. 그것보단 실용성 있는 목장도가 좋지.”


옛 여인들이 자신의 정절을 보호하기 위해 지녔다는 것도 잘못된 것이란다. 조선 전기의 ‘신속삼강행실도’에도 여인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장도를 사용했다는 사례는 없다. 은이나 백동 같이 귀한 것은 양반들이나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일반 백성들은 나무로 만든 장도를 사용했다. 칼로 스스로를 해치는 방법 역시 조선시대 사람들이 선호한 방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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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고름에 매다는 장식으로도 쓰고, 손톱 깎을 때, 면도할 때. 칼이 필요할 때 꺼내 사용한 거라. 용도가 그래 다양했어요.”


오랜 시간 그가 이어온 ‘병영 장도’의 맥이 끊길까 걱정이 됐다. 그의 아들인 장경천(59) 전수자가 병영 장도 만드는 일을 배우고 있었다. 배관기술자인 아들은 쉬는 날 장도를 만든다. 그러나 그는 “다 큰 아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나. 그저 두고 보는 것이지. 내가 좋은 날 받아 가는 날까지야 (장도를) 계속 만들 것이지만, 이걸로 끝이 아닌가 싶소” 하고 씁쓸히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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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수의 노인은 ‘병영 장도’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장식품으로도 팔릴까 말까인데 이 힘든 길을 젊은 사람들이 들어서려 하겠소. 하겠다는 사람 있다면야 좋겠지만 아쉬워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말을 마친 장씨는 다시 장도 만드는 일에 빠져들었다. 노인의 굽은 어깨가 애처로워 보였다.


울산=이보람 기자 boram@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