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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강렬한 원시적 생명력… 화폭으로 뛰어든 설악

by세계일보

(37) ‘꽃의 화가’ 김종학 / 대학 졸업 후 추상회화로 해외 전시 / 日·美서 다양한 장르 경험하며 탐구 / 실의에 빠져 1979년 돌연 설악 칩거 / 보지도, 읽지도 않으며 죽음 생각만… / 할미꽃 피는 광경 보고 마음 치유돼 / 설악산의 사계 본대로 그리지 않고 / ‘색채 조화’와 ‘기운생동’에 중점 둬 / 꽃·벌 등 개성 살려내 활기 느껴져 / 화업인생 60년에도 전시활동 활발

세계일보

‘추상’(1964). 김종학이 대학 졸업 후 그린 작품. 당시 미술사조에 따라 추상작업을 시도한 기록이다.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 김종학의 자연, 그 너머의 그림

“긴 겨울 동면기를 지나 봄이 오면 만물이 탄생하고, 뜨거운 태양 아래 숲이 울창해지면 여름 숲은 새소리로 가득 찬다. 열매가 익고 만물이 살찌는 가을이 지나면 산천이 메말라가고 숲은 깊은 잠에 빠진다. 차가운 겨울이 지나 다시 잎이 돋아나고 애벌레가 껍질을 벗고 나비로 변신하면서 봄을 알린다. 이러한 생과 사의 순환, 투쟁과 인내의 과정을 거친 강인한 생명력이 숲의 본체이자 자연의 본령이라면, 물이 흐르고 새들이 날아들며 만화방창(萬化方暢)하고 잡풀과 덤불이 무성한 김종학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숲은 생명의 숲, 살아 있는 숲이라 할 것이다.”


매년, 이 무렵이면 산으로 바다로 계절을 체감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올해는 조심스러운 마음에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는다. 여전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지속해서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다렸던 전시마저 보지 못한 채 전시기간을 흘려보내는 중이다. 그중에는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지난 봄부터 얼마전까지 열린 전시도 있다. 한국현대미술작가조명 세 번째 전시인 ‘김종학’이다.


아쉬운 마음에 전시자료를 찾아보는 데 이 구절이 있었다. 김현숙의 ‘김종학의 숲에는 새가 산다’의 일부다. 이 구절을 읽자 여름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무더위에 외출을 삼가 계절이 실감나지 않던 차였다. 하지만 김종학의 그림을 한 점씩 꺼내어 보자 여름이 내 안으로 쑥 들어왔다. 계절의 생기와 푸르름이 꽃잎 펼치듯 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설악산에 살며 화려한 색채와 분방한 필치로 그려낸 그림이었다.

# 긴 겨울이 동면기를 지나 봄이 오면

김종학(1937)은 1937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1962년 서울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며 작가활동을 시작했다. 이제 곧 화업 60여년에 이르지만, 작가는 여전히 전시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2018년 프랑스 기메국립동양박물관(Muse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Guimet)에서 회고전을 개최했고, 2019년에는 프랑스 파리 페로탕 갤러리 본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무라카미 다카시, 마우리치오 카텔란 등이 전속 작가인 대형 화랑이다. 그의 작품은 전 세계 미술계의 주목과 재조명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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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1992). 김종학은 ‘서양 물감으로 그린 한국화’라고 부른 겨울산 시리즈를 제작한 바 있다. 설악산의 형상성이 선으로 명확하게 드러난다.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김종학은 ‘설악의 화가’, ‘꽃의 화가’로 불린다. 설악산에 살며 자연을 그려낸 작품으로 대중에 이름을 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단순한 자연 포착, 그 너머에 있다. 자연을 내면에 체화시키고 그것을 표출하려는 노력의 연장이다. 그리고 그것의 밑바탕에는 미술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와 한국적 미감에 뿌리를 둔 자연 본질 이해가 있다. 작업 초기 추상미술에서 시작해 긴 시간 이루어온 것이다.


김종학은 대학을 졸업한 직후 김창열, 박서보 등과 함께 ‘악뛰엘(Actuel)’을 창립했다. 앵포르멜의 추상성을 기조로 삼는 회화와 판화로 해외 전시에도 선발, 진출했다. 일본 도쿄로 건너간 이후에는 설치미술과 대지미술 작업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이 실험적 서구미술 수용에 그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념의 노예가 된 예술’에 회의가 계속되자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다양한 현대미술 장르의 공존을 경험하며 전과 다르게 구상성을 탐구했다.


귀국 후에도 계속하는 화업과 인생에 대한 실의에 서울을 떠났다. 1979년 설악산에 들어가 칩거를 시작했다. 일년 간은 보지도, 읽지도 않았고 삶보다 죽음을 더 자주 생각했다.


하지만 설악의 자연 풍광은 김종학에게 예술을 다시 가능케 했다. 봄 할미꽃 피는 광경을 보고 자살까지 생각했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화업과 인생에 대한 실의가 산의 사계순환처럼 자연스럽게 회복됐다.


이 시기에 김종학은 고미술 수집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미술사학자이자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최순우(1916~1984)와의 인연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최순우 관장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라는 책으로 대중에 알려지기도 했다. 강원대학교 교수 재직 시절에는 한국 미술사 강의를 할 정도로 고미술에 애정을 가졌다. 1987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소장품이 특별전으로 선보여진 적도 있다.


김종학은 이러한 수집품을 금호미술관에서 전시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목기 수집이 내 작업에 준 영향이라면 조형적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는 점이다. …보자기의 색감과 비례감이 보여주는 현대감각에 감격했다. 몬드리안보다 훨씬 이전에 그렇게 기하학적이고 그렇게 창조적인 물건을 우리 조상들이 만들었음에 감탄했던 것이다. …멋대로 놓아서 오히려 현대적인 것이 되고 만 것이 내 마음에 든다.”


자연과 고미술은 작가의 안목과 작품세계를 전과 다른 차원으로 성장시켰다. 자연의 형태를 동양화에서처럼 사의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설악산은 작가의 경험과 감각에 따라 재배치되어 화면에 드러났다. ‘“그림 그리기란 사람이 자유롭게 되고자 하는 것”이라는 노화가는 어느덧 “마음대로” 그리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어느 평론가의 표현이 딱 맞다.

# 만화방창(萬化方暢)한 살아 있는 숲

김종학은 작품의 최우선 과제를 ‘색채 조화’와 ‘기운생동’에 둔다. 그는 자연을 보고 그대로 그림으로 묘사해 그리지 않는다. 대신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장면을 꺼내어 직감에 의존해 표현한다. 그가 작업하는 모습에서는 화면 위에서 자동적으로 분출하는 기의 붓놀림을 볼 수 있다. 작가의 신체, 호흡과 분출이 물감이라는 물성과 함께 합쳐지고 자연의 본질과 하나 되어 물아일체의 경지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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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2011). 김종학이 설악산을 그린 작품 중 하나. 작가가 화면의 대형화를 시도하는 모습이 보인다. 조화롭고 정리된 조형성이 드러난다.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숲’(2011)은 2011년에 그린 작품이다. 초록 잎들이 땅을 가릴 정도로 무성하게 펼쳐졌다. 그 위에서 또렷하게 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양분을 수송하는 잎맥이다. 잎맥으로 오가는 물과 양분에서 잎의 탄탄함이 느껴진다. 잎 사이로 몸을 비집고 나와 자리를 차지한 것은 꽃들이다. 빨갛고, 노랗고, 파랗게 화려한 색채로 발현한다. 그 드러냄에 벌과 나비가 끌려와 날아다니며 기운을 전한다. 이 모든 것들은 화면에서 수직, 수평, 대각선의 구도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가로 3m에 이르는 대형화면 앞에 서 있으면 주변과 멀어지는 기분이다. 그 안의 화려한 색채와 자연의 면면에 눈을 빼앗기고 만다. 모티브 하나하나의 개성을 살려내며 표현한 필법 덕이다. 대담한 선으로 구성한 거친 질감에서 운동감이 느껴진다. 그 운동감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 그리고 작가의 활기가 보는 이에게도 전해온다.


설악산은 인제와 양양, 속초, 고성에 걸쳐 있는 산이다. 우리나라의 척추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중심에 있다. 금강산의 절경에 견주어 제2의 금강산이라고 불린다. 금강산이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있다면 설악은 기암절벽이 웅장하다. 어느 날부터 김종학의 작품을 보면 조나스 우드(Jonas Wood, 1977)의 작업이 떠오른다. 조나스 우드의 작품 속 식물이 금강산이라면 김종학의 자연은 설악산 그 자체인 것 같다.


자연은 깊이 들어갈수록 진해진다. 제주의 곶자왈만 걸어도 알 수 있다. 초입에서 연녹색이던 잎들은 점차 짙푸른 초록으로 눈앞에 나타난다. 거기서 오는 원시성은 생(生)을 전한다. 김종학의 ‘숲’에서는 이 생이 느껴진다.


조심성 많은 성격에 여전히 사람 많은 곳으로의 여행은 꺼려진다. 그래도 평일 설악산 등반은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주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마스크를 벗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익숙해지고 무디어졌지만 여전히 생의 기운이 절실한 시기다.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학교 미술관, 박물관학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