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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영웅인가 반역자인가…백선엽 장군에 대한 상반된 평가 나오는 이유는

by세계일보

세계일보

1950년 10월 백 장군(가운데)이 참모로부터 전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100세를 일기로 4일 별세한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의 장례가 5일간 육군장으로 거행된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2묘역이다.


육군은 15일 오전 7시 30분 서울아산병원에서 서욱 육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육군장 영결식을 연다고 11일 밝혔다. 같은 날 11시 30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안장식을 거행한다. 서 총장이 장의위원장, 김승겸 육군참모차장이 부위원장을 맡았다.


백 장군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행적을 놓고 논란이 적지 않았다. “6·25 전쟁 영웅” “친일파”라는 상반된 평가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6·25 전쟁과 건군 과정서 핵심 역할

육군은 5일 보도자료에서 “고 백 장군은 1950년 4월 제1사단장으로 취임해 낙동강지구 전선의 다부동 전투에서 한국군 최초로 합동작전을 통해 대승을 거둬 반격작전의 발판을 제공했다. 같은 해 10월 국군 제1사단이 먼저 평양을 탈환해 민족의 자존심과 국민의 사기를 드높였다”고 밝혔다.


6·25 전쟁 이전의 건군 과정에서 백 장군은 군 내 숙군 작업을 진행했다. 당시 군에서는 여순 반란사건 등으로 군 내 좌익 세력을 색출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백 장군은 혐의가 가볍다고 판단되는 인물들을 선별해 징계를 낮출 것을 건의했는데, 백 장군의 건의로 기사회생했던 인물 중의 한 명이 당시 소령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백 장군은 박 전 대통령을 구명해 정보국에서 문관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했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박 전 대통령은 군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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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국방컨벤션에서 열린 생일 파티에서 생각에 잠긴 백 장군. 연합뉴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백 장군은 1사단을 이끌고 임진강 일대에서 치열하게 싸웠으나 한강 이남으로 후퇴해야 했다. 비록 후퇴했지만, 사단 편제를 유지하며 전력을 보존한 것을 높이 평가받아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대구의 관문인 다부동에서 북한군을 격퇴하면서 반격의 실마리를 유엔군에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 유일하게 미군 군단(1군단)에 배속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후 평양에 제일 먼저 입성하는 기록을 세웠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 공비토벌을 위한 ‘백 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서 육군 2개 사단과 전투경찰부대를 이끌었다. 이 사령부는 1952년 육군 제2군단 사령부로 개편됐다. 같은해 7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백 장군은 미군의 벤플리트 장군과 함께 10개 예비사단 창설, 군 훈련체계 개혁 등 군 근대화에 힘썼다.


미군의 신뢰와 더불어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해 영어에 능통했던 백 장군은 전쟁 수행을 둘러싸고 유엔군과 이승만 대통령간의 이견을 중재하는 역할도 맡았다. 33세이던 1953년 1월 육군 대장으로 진급, 대한민국 군 역사상 최초의 4성 장군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휴전 직후인 1954년 2월에는 제1야전군사령부(현 지상작전사령부) 초대 사령관으로서 1957년 초까지 휴전선 일대 방어태세 강화에 힘썼다. 당시 1야전군은 국군의 핵심 부대가 모두 배속되어 있었던 부대다. 북한의 재침을 우려하던 유엔군 수뇌부와 군 내 쿠데타 동향을 의심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이 없었다면 야전군사령관을 장기간 맡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직후인 1960년 전역, 세계 각국의 대사를 맡았다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9년 교통부 장관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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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7월 10일 유엔 대표들이 휴전회담을 위해 개성으로 가기에 앞서 기념촬영 하고 있는 모습. 휴전협정 당시 계급으로 왼쪽부터 버크 제독, 크레이기 공군 소장, 백선엽 소장, 조이 해군 중장,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호디스 육군 소장/ 연합뉴스

“전쟁영웅” VS “친일 부역자”

한미 군 당국에서는 백 장군을 전쟁영웅으로 높이 평가한다. 실제로 백 장군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국군 장병을 대표해 한평생 대한민국과 군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백 장군에게 높은 경의를 표하고, 가슴 깊이 추모한다”며 “군은 백 장군의 숭고한 헌신과 투철한 군인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겠다”고 강조했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은 “진심으로 그리워질 영웅이자 국가의 보물”이라며 애도했다.


그러나 백 장군의 친일 행적을 이유로 그의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백 장군은 1943년 12월 간도특설대 소속으로 중국 팔로군 공격 작전에 참여했다. 광복 당시 그의 신분은 만주군 중위였다. 간도특설대는 일제 패망 전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대상으로 108차례 토공 작전을 벌였고,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 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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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1일 오전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깜짝 생일파티가 열린 서울 용산구 국방컨벤션에서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그의 손을 잡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백 장군은 생전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적은 있지만, 독립군과 직접 전투를 한 적은 없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백 장군이 포함되면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지난 5월 말 백 장군이 위독하다는 소식과 더불어민주당 김병기·이수진의원 등 정치권을 중심으로 친일파 파묘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증폭됐다.


하지만 6·25 전쟁을 전후로 군에서 활동했던 이형근·정일권·채병덕 등 핵심 인물 다수가 일본군·만주군에서 복무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백 장군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민다는 반론도 나온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드골 휘하의 자유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 15만명을 중심으로 군을 재건한 프랑스와 달리 한국군은 건군 과정에서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이 주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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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2일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왼쪽)이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백 장군 사무실에서 백 장군과 셀카를 찍고 있다. 주한미군 제공

‘대한민국 군번 1번’으로 알려진 이형근 장군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포병대위로 복무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정일권 장군도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다. 6·25 전쟁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장군은 1937∼1945년 일본 육군에서 복무했다.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던 김종오 장군도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관학교에서 임관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초기 국군 건설과정에 공헌했던 김백일 장군은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1950년대 재무장을 진행했던 서독 연방군도 나치 독일 국방군 출신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큰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나치와의 철저한 결별을 외쳤던 서독 연방군·정부와는 사정이 다르다는 반박도 많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