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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박상현의 일상 속 미술사

자연이 품어버린 ‘나선형 방파제’… 영원히 볼 수 없다 해도 ‘예술’로 남아

by세계일보

(30) 일상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대지 미술가’ 로버트 스미스슨의 작품

美 유타주 그레이트솔트호에 설치

35세 스미스슨 불의 사고로 생 마감

작가가 떠나자 작품도 호수에 잠겨

세계일보

로버트 스미스슨(1938∼1973)이 만든 대지미술 작품 ‘나선형 방파제’(1970)는 제작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가 2005년경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예술가 중에는 피카소처럼 다양한 스타일과 작품들로 유명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평생 하나의 스타일을 완성해서 그걸로 이름을 알린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예술가는 후자에 속한다. 가령 피에 몬드리안이나 앤디 워홀, 콩스탕탱 브랑쿠시 같은 유명 예술가의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가장 잘 알려진 그들의 절정기 작품들을 떠올리지, 초기 작품이나 그들이 평생 했던 다양한 예술적 시도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예술가들은 아무리 활발하게 활동했어도 대중이 단 하나의 작품만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 에드바르 뭉크는 ‘절규’로, 조르주 쇠라는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로, 구스타프 클림트는 ‘키스’로 기억하는 식이다.


한 작품만으로 유명한 예술가의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아마 대지미술(Land Art, Earth Art) 작품인 ‘나선형 방파제(Spiral Jetty)’를 만든 로버트 스미스슨(Robert Smithson)이 아닐까 싶다. 미술책에서 한 번쯤 봤을 이 작품은 그의 예술가로서의 인생을 대표하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대지미술’이란 장르 전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힐 만큼 유명하다.


이 작품은 방대한 크기를 갖고 있다. 미국 유타주 그레이트솔트호에 설치된 폭 4.6m, 총 길이 460m의 이 기하학적인 구조물은 스미스슨이 1970년 대형 덤프트럭 등 중장비들을 동원해 ‘건설’한 작품이다. 공사장 인부들이 6일 동안 큰 바위와 흙을 쏟아부어 방파제를 완성시켰지만, 그 모양이 당초 생각과 다르게 나왔다고 판단한 스미스슨은 무려 7000t의 돌을 다시 퍼내도록 지시했다. 그러고 3일 뒤 현재의 모습이 나오게 되었다.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들 한다. 2002년 동계올림픽으로 잘 알려진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사륜구동 자동차를 빌려 비포장도로를 운전해 찾아가 방파제를 걸어보는 방법, 비행기를 타고 호수 위를 날면서 내려다보는 방법이다. 큰 제작비가 든 거대한 작품인 만큼 감상하는 데에도 적잖은 비용과 노력이 들어가는 셈이다. 이 ‘나선형 방파제’가 스미스슨의 대표작이 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이 작품이 완성된 지 3년 만에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텍사스주에 또 다른 대지미술 작품을 만들기 위해 경비행기를 타고 장소를 살펴보던 중 조종사의 실수로 비행기가 추락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죽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선형 방파제’도 사라졌다. 호수에 물이 차면서 수면이 솟아올라 방파제가 물밑으로 잠겨버렸고, 그의 작품은 건설 장면을 담은 비디오와 사진만 남기고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역시 예술가였던 그의 아내 낸시 홀트는 1999년, 남편의 유작을 유명한 디아예술재단에 기증해서 관리를 맡겼지만 이미 작품은 물속에 가라앉은 후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질문을 하나 던질 수 있다. 우리가 볼 수 없어도 미술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는 유명한 철학적 질문이기도 하다. 경험론에 대한 탐구로 유명한 17세기 아일랜드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는 이런 질문을 했다. “숲 속에서 나무 하나가 쓰러졌는데 아무도 그 근처에 없어서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 나무는 소리를 냈을까?” 물론 주위에 귀를 가진 생물체가 없다고 해서 쓰러지는 나무라는 물리적인 현상이 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소리’라는 것이 공기의 파동을 귀가 감지해내는 과정임을 생각하면, 들은 귀가 없으면 소리는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로버트 스미스슨의 작품이 물속에 잠겨서 볼 수 없게 되었어도 사람들은 그 작품이 물 밑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작품이 사라지기 전에 찍힌 사진을 통해 감상할 뿐이었다. 우리는 이런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고민을 더욱 밀어붙인 예술가가 앤디 골드워시(Andy Goldworthy)다. 1963년생인 골드워시 역시 스미스슨처럼 대지미술 작가로 분류된다. 하지만 불도저와 트럭을 동원해서 호수에 바위와 흙을 퍼부은 스미스슨과 달리, 골드워시의 작품은 자연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는다. 인적이 드문 숲에 들어가서 땅에 떨어진 낙엽들을 모아 색깔별로 구분해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고, 나뭇조각이나 자갈을 모아 기하학적인 형상을 만들어 놓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사진으로만 남은 채 바람에 흩어지거나 물에 떠내려가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예술작품을 찰나적인(ephemeral) 예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미스슨의 작품은 물에 잠겨도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알고 있지만, 골드워시의 작품은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만 사진으로 기억할 뿐 지금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을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골드워시의 작품이 가진 아름다움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아니, 많은 사람은 그의 작품이 짧은 한순간 존재하고 사라졌다는 사실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


어쩌면 사진으로 존재하는 그의 작품이 인스타그램과 핀터레스트 같은 이미지 기반의 소셜미디어에 잘 어울리기 때문에 더 큰 인기를 누리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우리의 질문은 오히려 그 깊이를 더하게 된다. 우리는 수천년 살아남아 매년 수만명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대리석 조각도, 단 몇 시간 동안 아무도 없는 숲 속에 존재하고 흩어져버리는 골드워시의 작품도 모두 인터넷을 통해 모니터에서, 폰에서 감상한다. 그렇다면 그 작품이 어딘가에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정말로 중요한 것일까?


15년 전인 2005년, 유타주에서 흥미로운 뉴스가 들려왔다. 수십년 동안 물밑에 잠겨 있던 스미스슨의 ‘나선형 방파제’가 다시 떠올랐다는 소식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레이트솔트호의 수면이 점점 낮아져 스미스슨 사후 영원히 보지 못할 줄 알았던 작품이 다시 사람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일부 애호가들은 마치 고대의 유적이 발굴된 듯 기뻐하며 작품을 확인하러 그 장소를 찾아갔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여전히 온라인에서 다시 떠오른 방파제의 사진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생각해보면, 그 작품이 물에 잠긴 것도, 다시 드러난 것도 우리가 그 작품을 감상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가 숲 속을 걷다가 유명 예술가인 골드워시가 만들어놓고 떠난 나뭇잎 조형물을 발견했다면 어떨까? 그것이 골드워시의 작품인 줄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는 온전하게 그의 작품을 즐길 수 있을까? 연주회를 하면 좌석을 매진시키는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인 조슈아 벨이 지하철 승강장에서 평범한 복장으로 연주를 하자 대부분의 사람이 걸음도 멈추지 않고 지나갔다는 유명한 일화처럼, 우리는 미술관이 아닌 곳에서 만난 아름다움을 지나치고 있을지 모른다. 미술관이 아니라는 이유로, 작가의 이름과 작품 제목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의 일상 속을 스치는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즐기지 못한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고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