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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강화 교동으로 떠나는
갬성여행

by세계일보

시간의 느림에 빠지다 / 푸른 하늘과 구름이 풍덩 빠진 ‘고구저수지’ 낚싯대 드리우고 강태공은 어디 갔을까 / 물고기를 잡지 못해도 좋으리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풍경인 것을 / 향수 어린 골묵시장…추억의 블랙홀에 빠지다 / 실향민들이 고향 ‘연백시장’ 본떠 만든 대룡시장 / 말뚝박기 아이들·이발수·옛 상점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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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나이키란 고무신이지 말입니다. 아세요?” 시장 골목 좌판에 놓인 고무신. 주인장은 유관순 누나가 검정 고무신 신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며 눈요기 말고 추억을 사 가란다. 고무신을 신은 기억은 없지만 나이키는 추억이 많다. 어린 시절 나이키 운동화는 부잣집 아이들이나 신을 수 있었으니 그림의 떡이었다. 대신 시장통에서 ‘짝퉁 나이키’를 사 신었지. 옆에서 보면 영락없는 나이키 로고이지만 운동화 발목 뒤에는 ‘Nice’ 또는 ‘Nikei’라 쓰여 있어 그걸 감추려고 땅바닥에 끌릴 듯 바지는 늘 길었다. 짝퉁 나이키마저 살 돈이 없던 친구는 그냥 하얀 운동화에 직접 빨간 매직으로 나이키 로고를 감쪽같이 그려 신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친구보다는 형편이 조금 나았나보다. 골목 어귀에 들어서자 곧장 추억의 블랙홀로 빠져든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곳, 강화 교동도 대룡시장이다.

고기도 잡고 연꽃도 낚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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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는 고려·조선시대 유배지다. 연산군이 이곳에서 최후를 맞았을 정도로 외부와 철저하게 고립된 곳이었다. 2014년 다리가 놓이면서 섬 아닌 섬이 됐지만 교동도는 지금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다. 북한이 바로 코앞인 접경지역으로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있어서다. 교동대교에 이르자 군인들이 신분증을 요구한다. 쪽지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건네면 군인은 신원을 확인한 뒤 ‘해병대 제2사단장’이 적힌 차량통행증과 바꿔 준다. 이를 대시보드에 잘 보이게 얹은 뒤에야 교동대교는 여행자에게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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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긴 다리를 건너 교동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강태공의 천국’ 고구저수지다. 호수에 푸른 하늘과 구름이 데칼코마니로 담겨 있는 풍경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호수가에 선 듯 아름답다. 좌판에 앉아 한가로이 시간과 물고기를 낚는 낚시꾼들. 식욕을 자극하는 삼겹살 굽는 냄새 정도가 이곳이 낚시터임을 일깨운다. 대자연의 빼어난 풍광을 만끽할 수 있으니 물고기를 낚지 못해도 좋으리. 그냥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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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저수지를 가로지르는 도로 왼쪽은 연꽃으로 가득하다. 이곳에도 몇몇 강태공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고기를 잡으려는 것인지 연꽃을 낚아 마음에 가두려는 것인지 도통 분간이 가지 않는다.


연꽃 사이로 데크길이 길게 나있고 끝에는 고풍스러운 2층 정자가 그림처럼 서 있다. 데크길 중간쯤 20대 후반 커플이 서서 낚시에 몰두하고 있다. 낚싯줄을 던지는 폼이 어색한 걸 보니 초보인가보다. 그래도 둘의 얼굴에는 즐거운 표정이 끊이지 않는다.


정자 2층에 올라서면 고구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저수지 끝자락 언덕 위 예쁜 집들이 눈길을 끈다. 아파트에 사는 도시인들에게는 절대 닿을 수 없는 꿈 같은 풍경이다. 언젠가는 저런 곳에 살아야지. 그래도 희망을 품고 교동도 안으로 더 깊숙하게 들어간다.

추억을 낚는 시장골목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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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면으로 들어서면 회전교차로 중앙에 설치된 ‘평화의 섬 교동’이란 조형물이 여행자를 반긴다. 근처에 교동도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찾는 교동 제비집이 있다. 이곳에서 교동도의 역사와 여행지가 소개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제비집 앞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어미새가 입에 문 벌레를 아기새들 입에 넣어주려 한다. 제비는 교동도의 상징이다. 왜 제비일까. 교동도는 실향민들이 살던 곳이다. 6·25전쟁 때 북한 연백군에서 교동도로 잠시 피란 온 이들은 한강하구가 분단선이 되면서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그들의 향수를 달래주던 새가 제비다. 두고 온 고향의 흙을 입 안 가득 가져온 제비가 지은 집에는 생이별한 고향 마을의 사랑하는 부모형제들 웃음소리가 가득 담겨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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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들은 생계를 위해 하나 둘 좌판을 차리기 시작했고, 고향 연백시장을 그대로 본떠 만든 골목시장이 생겨났는데 바로 대룡시장이다. 시장은 50년 동안 활기가 넘쳤지만 실향민들이 대부분 사망하고 인구가 급격하게 줄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다 교동대교가 개통돼 1980년대 영화세트장 같은 모습을 담으려는 여행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이제는 수도권에서 인기 높은 여행지가 됐다.


시장 입구에 서니 갑자기 허기가 몰려오는데 교동반점이 눈에 들어온다. 자장면으로 소문난 곳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안에서 먹을 수 없으니 포장해서 차에서 해결한다. 옛날자장면인데 감칠맛이 뛰어나 국물 한 방울까지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다. 고민을 덜었으니 이제 시장 구경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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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편의점 벽화는 ‘아이스케이키∼”를 외치며 커다란 통을 메고 달리는 까까머리 아이 벽화로 꾸며져 정겹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다. 일행은 오늘 여행 끝이라며 집에 가자고 재촉한다. 포기하고 돌아 서려는데 거짓말처럼 비는 멎고 하늘은 다시 파란 얼굴을 밝게 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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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여기 코로나 백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꼬옥 이길 수 있어라. 코로나 그까지껏 수입이야요. 수입이 까불어∼ 확’. 좌판의 글들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백신’ 맞다. 그런데 코로나 백신이 아니라 하얀 고무신이다. 주인장의 재치에 배꼽 빠지게 웃는다. 조선 나이키 원조는 고무신이고 좀 여유 있는 집에서는 흰색 고무신을 신었단다. 닳으면 엿 바꿔 먹거나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기도 했고, 말 안 들을 때는 고무신으로 등짝을 맞았다는 설명도 빼곡하다. 추억 돋우는 순정 만화의 한 페이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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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골목은 볼거리가 많아 모두 둘러보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와글와글 거리에는 말뚝박기 놀이하는 아이들 조형물이 재미있다. 가위 바위 보에서 진 말지기는 울상이고 올라탄 아이는 의기양양하다. 어린시절이 떠올라 달려가 올라타고 싶은데 ‘정말 올라타실 건 아니시죠?’라는 벽의 경고문이 진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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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튀기 기계가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뻥”하고 터질 때 모두 귀를 막던 풍경을 담은 벽화를 따라가면 우물터에는 아낙네 둘이 빨래를 하고 아이는 커다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린다. 교동극장과 궁전다방, 지금은 불량식품 취급을 받는 추억의 옛날 과자를 파는 가게들은 시간여행을 돕는다.


동산약방은 아직 약을 팔고 교동이발관 아주머니는 바닥을 쓸며 손님을 맞는다. 영심이네 커피에서는 약탕기에 담긴 대추차가 진하게 끓으며 시장 골목을 향기로 채우고 있다.

시간을 길어 올리는 고즈넉한 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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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더 거슬러 교동향교로 향한다. 고리타분한 곳이라 여길 수 있지만 기대 이상이다. 입구에 읍내리 비석군이 독특하다. 조선시대 선정을 펼친 교동 목민관들의 선정비 40기가 운치 있는 소나무숲을 배경으로 세워져 있다. 교동면에 흩어져 있던 비석을 한곳에 모았단다. 향교로 오르는 오솔길을 따라 심어진 감나무에는 제법 큰 감이 달렸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맛있게 익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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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내려앉은 돌계단을 올라 향교에 들어서면 명륜당이다. 툇마루 앉으니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찾는 이가 거의 없어 사색하기 좋다. 현재 남은 가장 오래된 향교다. 고려 인종 5년(1127) 화개산 북쪽에 처음 세워졌고 조선 영조 17년(1741)에 지금 위치로 옮겨져 오랜 세월을 지키고 있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에 안향이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처음으로 공자 초상을 가져와 모셨다고 한다. 내삼문, 외삼문 등 모든 공간에서 멋진 인생샷을 얻을 수 있다. 돌담과 시간이 묻어나는 돌계단이 오랫동안 머물라고 잡아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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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 앞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오르면 화개사가 나온다. 고려 때 목은 이색이 공부한 곳으로 빛바랜 흑백사진 같은 소박한 암자와 수령이 200년이 넘은 소나무가 잘 어우러진다. 조선 전기 폭군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폐위돼 교동도에 유배됐고, 가시나무(탱자나무) 울타리로 가둔 처소에 가두는 ‘위리안치’ 형벌로 석달 만에 죽는다. 화개산 자락에 연산군 유배지가 있는데, 지금은 화개정원 조성공사로 폐쇄됐고 내년 말 다시 문을 열 예정이다.


강화=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